메뉴 건너뛰기

close

서울 중구 태평로 삼성그룹 본관건물. 구조조정본부는 지금까지 이 건물 26층에 위치해왔다.
서울 중구 태평로 삼성그룹 본관건물. 구조조정본부는 지금까지 이 건물 26층에 위치해왔다. ⓒ 오마이뉴스 권우성
'삼성공화국의 청와대', '총수 친위부대', '삼성CEO의 산실'….

삼성 구조조정본부를 일컫는 말들이다.

삼성 내 '또 하나의 권력'으로 불리던 구조본이 사실상 폐지된다. 지난 98년 외환위기 당시 만들어진 이후 9년만이다. 구조본은 그동안 막강한 영향력만큼 법적 책임을 지지 않고 있다는 지적을 받아왔다.

8일 삼성이 내놓은 구조본 개편의 요지는 조직 축소다. 이름도 '구조본' 대신 '전략기획실'이다. 인력도 147명에서 99명으로 줄인다. 법무실은 구조본에서 떨어져 나간다. 내부 조직도 슬림화 된다. 지난달 7일 삼성이 내놓은 대국민 사회공헌약속의 후속 조치라는 설명도 이어졌다.

당시 이학수 구조조정본부장(부회장)은 불법정치자금 제공 등에 대해 대국민 사과와 8000억원의 사회공헌기금을 약속했다. 특히 시민사회단체로부터 폐지 압력을 받아온 구조본 기능도 조정하겠다고 밝혔다. 한달 만에 실천방안을 내놓은 셈이다.

구조조정본부 → 전략기획실, 이름은 바뀌는데...

이날 삼성은 구조본 개편 의미를 담은 자료도 함께 언론에 내놓았다. '미래 환경변화에 적극 대응할 수 있도록 그룹 경영체제를 미래전략형으로 바꾸겠다는 강력한 의지를 담고 있다'는 친절한(?) 설명까지 덧붙였다.

'미래전략형으로 가겠다'는 것에 굳이 토를 달 사람은 없을 듯 하다. 또 전략기획실이 앞으로 그룹의 중장기 대응전략을 주로 수립할 것이라는 부분도 마찬가지다. 글로벌 경쟁이 날로 치열해지는 현실 속에선 어찌 보면 당연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구조본이 정말 변할까라는 의문은 쉽게 가시질 않는다. 그동안 논란이 됐던 구조본의 책임성과 투명성을 보장하기 위한 장치가 이날 발표에선 빠져있기 때문이다.

구조본은 법적으로 실체가 없다. 그럼에도 그동안 이건희 회장을 보좌하면서 그룹 내외부에서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해 왔다. 그룹 인사나 경영, 감사는 말할 것도 없다. 게다가 불법정치자금 전달과 이재용 상무로의 편법적인 경영권 승계과정에도 깊숙이 개입해 왔다.

이 과정에서 불거진 각종 불법, 탈법적인 행위에 대해 구조본에 법적 책임을 지우기란 쉽지 않았다. 전략기획실로 이름이 바뀌어도 이같은 상황은 변하지 않을 전망이다.

공정거래위원회의 한 간부는 "구조본의 현행법상 제재대상에 포함돼 있지 않다"면서 "전략기획실로 바뀐다고 하더라도 마찬가지"라고 말했다. 그는 또 "그룹차원에서 부당내부거래에 개입했다고 하더라도 처벌은 각 계열사가 떠안는 것이 현실"이라고 말했다.

시큰둥한 반응 "구조본의 실질적 개혁방안이 나와야"

지난달 4일 출국 5개월 만에 일본 홋카이도 지토세 공항에서 회사 전용기인 '보잉 즈니스제트(BBJ)'를 타고 김포공항을 통해 입국하고 있는 이건희 삼성그룹 회장.
지난달 4일 출국 5개월 만에 일본 홋카이도 지토세 공항에서 회사 전용기인 '보잉 즈니스제트(BBJ)'를 타고 김포공항을 통해 입국하고 있는 이건희 삼성그룹 회장. ⓒ 오마이뉴스 권우성
구조본의 투명성도 그렇다. 누가 얼마나 어디서 어떻게 활동하는지, 돈은 어디서 나오는지 등 일반 대기업이라면 당연히 공개되어야할 것들이다. 하지만 이 역시 여전히 베일에 싸여 있다.

공정거래위원회는 지난 2004년 5월 구조본의 활동과 경비조달, 사용내역 등을 의무적으로 공개하는 방안을 추진했었다. 하지만 당시 삼성의 강한 반대에 부닥쳤고, 재경부 등에서 법제화에 난색을 표시하면서 무산되고 말았다.

강 위원장은 같은해 6월 이건희 삼성그룹 회장과 만난 자리에서 "글로벌 스탠더드에 맞도록 구조본의 투명성을 높여 나갈 것"이라는 답변을 듣는 정도로 만족해야 했다. 1년9개월이 지났지만, 구조본의 변화는 규모를 일부 줄이거나 편제를 약간 바꾸는 정도에 불과했다.

김상조 참여연대 경제개혁센터 소장은 "구조본의 본질은 막강한 권한에 상응하는 책임을 지지 않는다는 것"이라며 "이학수 부회장이나 김인주 사장이 계열사의 인사와 재무에 직접 간여하지만 그에 따른 책임을 지는 일이 있나"라고 반문했다.

김 소장은 이어 "이름만 바꾸고, 일부 팀만 조정하는 구조본의 개편은 큰 의미가 없다"면서 "구조본이 법적 책임을 가질수 있도록 하는 실질적인 개혁방안이 나와야 한다"고 지적했다.

김선웅 좋은기업지배구조연구소장도 "총수일가의 적은 지분과 순환출자로 그룹을 지배하는 상황에서 구조본이 전략기획실로 이름이 바뀌더라도 역할이나 위상은 크게 달라지지 않을 것"이라고 전망했다.

그 역시 '사조직화'돼 있는 구본을 '공조직화' 하는 것이 시급하다는 점을 빼놓지 않았다.

다른 그룹들은 어떻게?... 삼성같은 구조본은 없어

재벌의 구조조정본부는 외환위기 이후 한시적으로 만들어진 조직이었다. 98년 국민의정부는 재벌간 빅딜을 주선하면서, 황제경영의 폐해로 지목되던 회장비서실 폐지를 적극 주문했다.

'구조조정'이라는 이름 자체가 내비치듯, 대부분 그룹들은 2~3년동안 한시적으로 그룹 구조조정을 위해 비서실을 구조조정본부로 대체했다. 이후 삼성을 빼고 대부분 그룹들에서 구조조정본부가 자취를 감추었다.

일부 구조조정 기능이 남아있는 재벌도 있지만, 삼성만큼 그룹 내외부적으로 막강한 영향력을 가지고 있는 곳은 거의 없다. 대부분 계열사 간 투자를 조정하는 업무 정도라는 것이다.

재계 2위인 현대기아자동차그룹은 구조본의 성격을 기획총괄본부가 대신하고 있다. 하지만 삼성 구조본과는 달리 그룹차원의 재무나 인사관리는 하지 않고 있다. 다만 현대-기아차사이의 중복투자 여부만을 조정하는 역할에 그치고 있다는 것이 현대차쪽 설명이다.

지난 2003년 지주회사로 전격 출범한 LG는 구조본이 (주)엘지의 지주회사로 옮겨갔다. 이 회사는 주 업무는 출자 계열사에 대한 사업 포트폴리오를 구성하고 경영자 육성과 평가를 전담하고 있다. (주) 엘지 관계자는 "과거 그룹 구조본에 비하면 기능이나 외형이 모두 줄어들었다"면서 "또 법인으로 있기 때문에 각종 투자 결정 등에 대한 책임도 지고 있다"고 말했다.

재계 4위인 SK는 지난 2003년 6월 아예 구조본을 해체했다. 분식회계와 불법 정치자금 제공 등으로 최태원 회장이 홍역을 치른 다음이었다. 대신 지주회사격인 SK(주)의 이사회 아래에 '투자회사관리실'을 만들었다. 이사회 아래에 있기 때문에 법적 책임을 갖는다.

이밖에 롯데를 비롯해 금호아시아나, 한진, 두산 등의 그룹들도 각각 구조본과 비슷한 조직들을 가지고 있다. 하지만 삼성처럼 그룹 내외부로 막강한 영향력을 갖지는 않고 있다.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대공황의 원인은 대중들이 경제를 너무 몰랐기 때문이다"(故 찰스 킨들버거 MIT경제학교수) 주로 경제 이야기를 다룹니다. 항상 배우고, 듣고, 생각하겠습니다.


독자의견

이전댓글보기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