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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트에서 산 강아지 옷이 너무 커서 바꾸기 위해 외투를 걸치고 현관 앞으로 갔다. 신발을 신으며 우리 집 강아지 '분이'를 봤는데 글쎄 이 녀석 표정이 가관이다. 감기 기운이 있어 머리도 '띵' 하고 만사 귀찮은데도 녀석 옷을 바꾸러 가는 내 정성도 무시한 채 '아줌마가 나가던가 말던가' 하는 포즈로 나를 바라보는 것이 아닌가.
내가 나가던 들어오던 자신은 조금도 관심 없다는 태도였다. 아랫배를 바닥에 깐 채 납작하게 엎드려서 눈만 내 행동을 살피고 있었는데 그 눈빛도 내가 나가던 들어오던 자기는 관심 없다는, 그런 무관심한 눈빛이었다.
아이들이나 남편이 나가거나 현관문을 들어설 때의 반응하고는 완전히 다른 것이었다. 큰 애가 들어올 때 가장 좋아하는 것 같았다. 응석부리듯이 안아달라고 낑낑거리고, 팔짝팔짝 뛰어오르고, 손을 핥고 그야말로 난리도 아니다.
그런가하면 작은 애를 대하는 태도는 사뭇 다르다. 좋기는 한데, 목욕과 똥오줌 처리, 양치질, 병원에 데리고 가서 주사 맞히는 일 등 온갖 잡일을 담당하는 작은 애에게 분이는 이중의 감정을 느끼는 것 같았다. 자기를 아프게 하는 사람이라는 생각 때문인지, 반갑다고 살랑거리다가도 어느 새 자기 집으로 도망가 버린다.
저녁 늦게 보는 남편도 분이는 반갑게 맞는다. 내일 등교해야 하는 관계로 아이들이 일찍 잠들다 보니, 밤 늦게 들어오는 남편을 누구보다 반갑게 맞이하는 것은 분이다. 남편도 분이가 자기를 반가워하니까 좋은지, 과일을 깎아주면 먹다가 한 입 베어서 분이에게 먹여주고 손가락도 핥게 내버려 둔다. 그러다 어제 저녁에는 손가락을 핥다가 이제 이가 나기 시작해서 근질거리는지 손가락을 꽉 깨물어서 혼도 났지만, 남편 발소리가 들리면 큰 애를 반길 때처럼 팔짝팔짝 뛰면서 좋아한다.
다른 식구를 반길 때의 반응을 알고 있는 나로서는 나를 대하는 녀석의 태도에 한편으로는 씁쓸해져왔다. 녀석에게 나는 무관심한 존재였다. 우리 사이에는 '무심'이 가로놓여 있었던 것이다.
분이가 우리 집에 온 지 보름 정도 됐는데 그 시간 동안 우리는 무심한 관계가 돼버린 것이다. 같은 집에 살면서 어떻게 그럴 수 있을까, 무심한 관계가 될 수 있을까. 놀랐지만 분이는 내게 놀라울 정도로 무관심했다. 미워하지도 않고 두려워하지도 않고 좋아하지도 않는, 어떻게 보면 괜찮은 관계고, 어떻게 보면 한심한 관계가 우리 사이다.
분이는 내가 집을 나간다 하여도 슬퍼하지 않을 듯하다. 반면 아이들이 나갈 때, 현관 앞을 떠나지 못하고 서성이는 것을 보면 무척 마음 아파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별의 아픔이 컸던 만큼 아이들이 학교에서 돌아오면 무척이나 반가워 한다. 그러나 나와 분이는 아픔도 기쁨도 없는 그야말로 무심한 관계이다.
분이와 나 사이에 '무심'이 생긴 것은 물론 나의 책임이다. 아이를 낳을 때도 부모가 될 때도 마음의 준비가 필요한 것처럼 강아지를 키울 때도 마음의 준비가 필요한데 난 무엇에 홀린 사람처럼 아이들에게 강아지를 사주겠다는 약속을 해버렸다. 그리고 어느 날 강아지를 사기로 한 날이 됐고, 그래서 강아지 '분이'가 우리 집에 오게 됐다.
강아지를 한 번도 키워본 적이 없고, 또 동물을 좋아하지 않는 나는 강아지에 대해서 막연한 두려움이 있었다. 손가락을 깨물지는 않을까, 그 날카로운 발톱으로 내 팔을 긁어버리지는 않을까, 하는 걱정만 들 뿐 강아지에 대한 믿음이 없었다.
강아지와 나 사이에는 '나는 사람, 너는 강아지' 이런 편견이 가로 놓여 난 강아지를 좀처럼 믿지 못했다. 화장실에 가서 오줌을 싸고, 귀여운 짓을 할 때는 등이라도 쓰다듬어주고 싶지만 핥을 게 걱정돼 분이가 가까이 오면 '저리 가' 하고 밀쳐버리면서 철저하게 무관심으로 대했다.
그렇다고 강아지를 싫어한 것은 아니었다. 아이들이 학교로 가버리고 혼자 심심하고 외로운 듯 등을 말고 누워있는 모습을 보면 애잔한 마음이 들어 작은 애가 훈련 때 준다고 숨겨둔 소시지를 꺼내 던져 주기도 했다.
분이에게는 안아주고 쓰다듬어주고 놀아주고 가끔 맛있는 간식을 먹여주고, 먹던 거라도 이빨로 잘라 손바닥에서 놓고 먹게 하고 손가락을 물게 하는 등 이런 게 필요했다. 이런 식으로 애정을 보여주는 사람에게 분이는 정을 느끼고 마음을 주는 것 같았다.
내가 보여준 애정은 분이에게는 전달 되지 않는 것들이었다. 배고플까 사료를 챙겨주거나 혼자 자던 방에서 외로워하는 것 같아 방석을 슬쩍 아이들 방으로 옮겨 주거나 혼자 두고 집을 나설 때 외로울까봐 잔잔한 음악을 틀어주고 나가는 나의 섬세한 마음 씀이나 애정은 강아지가 느끼지 못하는 것들이었다.
가만히 생각해보면 분이와 내 나 사이를 가로막고 있는 것은 믿음의 부재였다. 난 분이를 믿지 못했다. 분이가 귀엽지만 분이는 늑대 과의 동물이기에 언제든 야성을 드러내면서 나를 물어뜯을지도 모른다는 이런 불신이 있었다. 그래서 마음을 열지 못하고 언제나 담을 경계로 나는 이쪽, 분이 너는 저쪽, 이런 식이었다.
양치질을 시키기 위해 분이 입 속에 손가락을 집어넣는 작은 애나 먹던 거를 손바닥 위에 올려놓고 먹게 하는 남편이나 분이를 껴안고 자는 큰 애는 모두 분이와의 사이에 확고한 신뢰가 있었다. 사람과 사람 관계에서도 이런 단순한 믿음이 큰 차이를 만든다는 생각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