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마이뉴스의 모토는 '모든 시민은 기자다'입니다. 시민 개인의 일상을 소재로 한 '사는 이야기'도 뉴스로 싣고 있습니다. 당신의 살아가는 이야기가 오마이뉴스에 오면 뉴스가 됩니다. 당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나는 가끔씩 내 자식들을 보면서 나와는 전혀 다른 존재라는 것을 실감할 때가 많습니다. 부모 자식이라는 관계를 접어놓고 생각해 보면 녀석들은 나와 전혀 다른 존재입니다. 나와 똑같은 인격체로서 평등한 관계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와 녀석들의 관계는 참으로 불평등합니다. 나는 녀석들에게 마음자리를 놓고 이래라 저래라 강요하고‘이것이 좋다’ ‘저것은 나쁘다’ 가르치려 들지만 녀석들은 내게 이래라 저래라 강요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날도 그랬습니다. 대전으로 밥벌이하고 돌아왔더니 우리 집 작은 아이 인상이 친구인 최00가 다녀갔다고 합니다. 최00은 인상이와 같은 학교에 다녔는데 이번에 4학년으로 진학하면서 공주 시내로 전학을 갔다고 합니다.
최00은 1학년 때 인상이를 엄청 괴롭혔던 아이였습니다. 거의 매일 같이 인상이의 뺨을 때리다시피했던 기억이 있습니다. 결국 그 일로 인상이 엄마하고 최00 엄마하고 한바탕 신경전을 벌이는 사건까지 벌어졌었습니다. 당시 이 ‘사건’의 전말을 지난 2003년 6월 10일자 <오마이뉴스> ‘인상아 오늘부터 격투기 배워라’에 상세하게 기록해 놓은 적이 있습니다.
그 당시 나 역시 화가 나서 인상이에게 격투기를 가르치기도 했었습니다. 하지만 인상이는 여전히 맞고 들어오면서 최00 녀석에게 전혀 그 격투기를 써 먹지 않았습니다. 최00가 울까봐, 불쌍해서 때릴수 없다고 했습니다.
그때 만약 인상이가 아빠에게 배운 격투기로 복수극을 펼쳤다면 어떻게 됐을까요? 더이상 얻어 맞지 않겠다고 어른들의 해결 방식으로 주먹질로 맞대응을 했다면 과연 전학간 최00이 인상이를 찾아 왔을까? 전혀 그렇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토록 인상이를 괴롭혔던 녀석이 전학 가고 나서 열흘도 채 안 돼 인상이가 보고 싶어 찾아왔으니 아내는 두 녀석의 '기묘한 우정'에 감동을 했던 모양입니다.
아내는 인상이를 잊지 않고 찾아온 최00에게 전학 간 이유를 물었더니 같은 반 아이들이 자신을 싫어해서 그랬다는 것입니다. 모든 아이들에게 따돌림 당한 것은 아니었고 몇몇 아이들이 자신을 싫어했었다고 합니다. 하지만 자신에게 그토록 얻어맞았던 인상이는 언제나 함께 놀자면 놀았다고 합니다.
최00 녀석이 안타까웠지만 나 역시 인상이를 찾아왔다는 소식을 듣고 찾아온 녀석이 고맙고 또한 너무나 기분이 좋았습니다. 그래서 인상이 녀석에게 꼬치꼬치 캐물었습니다. '몰라'를 가장 잘 알고 있는 인상이 녀석의 대답은 빤했습니다.
“최00이 와서 뭐하고 놀았냐?”
“몰라.”
“아까 있었던 일인디 그것도 몰라?”
“그냥 놀았어.”
“마당에서 곰순이 하고 놀았구나?”
“응.”
늘 그렇듯이 인상이 녀석은 내가 물으면 그날 있었던 일들을 낱낱이 설명해 주는 게 아니라 내가 상황을 설정해 주었습니다. 녀석은 주특기인 그림 그리기에 코를 박고 별관심 없다는 듯 싱겁게 짧은 답만 내놓았습니다.
“너 저번에 일학년 때 최00가 널 매일같이 때린 거 기억나지”
“응.”
“그때 걔 싫었지?”
“몰라 기억 안나.”
“미워했냐?”
“아니 미워하지는 않았어.”
“너 찾아오니까 좋지.”
“좋아.”
“그거 봐라, 화가 나도 참고 나면 이번처럼 좋은 일이 생기는겨, 친구가 찾아오잖아.”
그 말을 해놓고 생각해 보니 참으로 우습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당시 인상이 녀석에게는 참겠다는 관념도 없었습니다. 그저 싸우기가 싫어서 싸우지 않았던 것뿐이었습니다.
그런 녀석에게 ‘인내는 쓰다 그러나 그 열매는 달다’ 식으로 삶의 지혜를 가르치려 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실천도 못하면서 입만 열었다면 ‘사랑’이 어쩌니 저쩌니 떠들어대는 거짓 성직자들처럼 말입니다. 내 안에 강 같은 평화도 없으면서 바다 같은 평화를 노래했던 것이었습니다.
나를 포함한 모든 어른들은 과연 아이들에게 지혜로운 삶이 무엇인지를 가르칠 자격이 있는 것일까? 그렇게 나는 컴퓨터 통계처럼 확실한 대답을 원하는 세상살이를 하면서 그저 ‘몰라’‘그냥’‘응’ 이라는 단순한 대답만 하고 있는 인상이 녀석에게서 한수 배웠습니다.
녀석과는 달리 나는 참으로 어리석고 어리석은 행동을 하고 있었습니다. 어떤 일이든 평화로운 방법으로 해결해야 평화가 찾아온다는 것을 빤히 알면서도, 그 지혜를 주워 들고 그걸 머릿속에 입력해 지식으로 바꿔 놓고 있었던 것입니다. 땅투기꾼들이 이미 망가뜨린 집 주변 숲에 대해 평화롭게 해결하지 못하고 있었으니까요. 내가 분노할수록 내 자신은 물론이고 당장 내 주변의 가족들이 불안해 하고 있었으니까요.
새삼스럽게 다시 한번 생각해 보아도 우리집 아이들은 분명 나와는 또 다른 인격체입니다. 나는 아이들에게 알게 모르게 지혜를 준답시고 아이들의 본래 가지고 있는 지혜로움과 순수성을 망가뜨리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그날 저녁 인상이 녀석의 일기장을 보았습니다. 대충 내용을 요약해 보면 이렇습니다.
‘오늘은 개와 놀았다. 학교 갔다 와서 가방을 내려놓고 친구들 대신 밖에서 개와 함께 놀았다. 방안에 들어와 있다가 다시 밖으로 나가 개와 놀았다. 개와 노니 친구들하고 노는 것처럼 재미있었다. 개가 짖을 때 보면 사람처럼 말하는 것 같다.’
나는 녀석에게 개하고 어디서 어떻게 놀았는지 구체적으로 쓰라고 말하려다 그만두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