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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고등학교의 학부형 모임. 학교에 가는 게 두렵지 않다.
미국 고등학교의 학부형 모임. 학교에 가는 게 두렵지 않다. ⓒ 한나영
심규상 기자가 쓴 '치사하게... 돈 안 보내면 집으로 찾아갑니다' 기사를 읽고 나니, 이와 비슷한 과거의 경험이 떠올라 묵은 이야기지만 꺼내 보려고 한다.

큰딸이 중3이었던 2년 전 일이다. 3월 어느 날, 부반장에 당선됐다고 딸아이가 문자를 보내왔다. 직장에 다니느라 바쁜 나로서는 아이가 학교 임원이 되고, 엄마인 내가 '임원엄마'가 된다는 것이 무슨 뜻인지 대충은 아는지라 딸의 당선 소식이 솔직히 반가운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이미 엎질러진 물이었다. 그나마 반장이 아닌 것이 나로서는 조금 부담이 덜 가는 상황이었다(물론 모든 학부형들이 이런 반응을 보이는 것은 아니겠지만 자녀가 왜 임원이 되는 것을 꺼려하는지 학교 측에서는 한 번 생각해 볼 필요가 있을 것이다).

하여간 나는 그날부터 '임원엄마'가 되었다. 말로만 듣던 임원엄마의 역할을 직접 하게 된 것이었다. 그런데 그 역할이 무엇인지 시원하게 가르쳐 준 사람이 있었다. 바로 반장엄마였다. 반장엄마는 평일 낮에 모이는 임원들의 첫 모임에 나를 불렀다.

하지만 직장 때문에 갈 수 없었다. 반장엄마는 싫어하는 눈치였지만 어쩌겠는가. 그 모임에 참석하자고 직장을 빠질 수는 없는 노릇 아닌가. 결국 반장엄마에게 논의된 내용만 알려 달라고 부탁을 했다. 그렇지만 대충 짐작은 할 수 있었다. 그동안 자모회에 참석한 주변 엄마들로부터 들은 이야기가 많기 때문에.

임원엄마의 첫 번째 역할은 돈을 내는 것?

물론 모든 학교가 다 그런 건 아니겠지만 임원 자모회의 중요한 역할은 돈을 내는 것이라고 한다. 그 돈은 대개 소풍이나 체육회 때 아이들 간식으로 쓰이기도 하고, 스승의 날과 학년 말에 교사의 선물 비용으로 들어간다는 게 돈을 걷는 회장엄마들의 공공연한 설명이다.

나 역시 반장엄마로부터 회의 결과를 통보 받았다. 그동안 들은 이야기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문제는 돈이었다. 반장엄마는 통장 번호를 불러주며 돈을 부치라고 했다. 십 만원이 넘는 돈이었다. 그러나, 사실 '임원엄마'라는 감투를 처음 쓰는 나로서는 솔직히 잘 몰랐다. 왜 그런 돈을 거둬야 하는지, 학교 발전 기금도 아닌 그런 사적인 목적의 돈을 왜 내야 하는지 말이다.

반장엄마는 소풍과 체육대회 간식비, 기타 선생님 회식과 선물에 들어갈 돈이라고 설명했다. 순진했던(?) 나는 간식 따위야 학생들이 알아서 사먹으면 되고, 선생님 선물 역시 정성껏 감사의 마음을 표시하면 되지 꼭 그렇게 돈을 거둬야 하는 것인지 이해가 안 되었다.

찬조금은 임원 감투(?) 값?

찬조금은 '임원 감투 값'으로 내는 것인가? 그렇다면 형편이 어려운 아이들은 임원도 될 수가 없는가. 물론 일부의 이야기이고 큰 돈도 아니라고 한다면 할 말은 없다. 하지만 조금이라도 부모에게 부담이 되는 돈이라면 문제가 있는 게 아닌가. 반장엄마는 이런 찬조금이 이미 관행으로 굳어진 '시스템'이라도 되는 것처럼 설명을 했다.

그리고 전통(?)이 되어버린 관행에 '딴지'를 거는 나를 답답한 엄마로 치부하는 듯했다. 하여간 그 엄마는 내가 짜증스러웠던지 서둘러 전화통화를 마무리하려 했다. 그때 반장 엄마가 내게 마지막으로 불쑥 던진 한마디 경고!

"만약 OO 엄마가 찬조금을 안 내면 우리반 몫으로 배정된 두 몫은 모두 내가 내야 해요."

나중에 반장엄마가 말해서 알게 된 사실이지만 임원 자모회에서 반장엄마는 이미 내 몫까지 내고 왔다고 한다. 그러니 내가 찬조금을 안 내게 되면 반장엄마는 돈을 뜯기는(?) 상황이 될 판이었다. 황당한 경우였다. 그러니 어쩌겠는가. 그냥 내는 수밖에. 하여간 학기 초의 찬조금 징수 사건은 그렇게 마무리가 되었다. 그런데 학년 말이 되어 또 다시 이해할 수 없는 상황이 발생했다.

"지난번 학년 초에 우리 임원들이 냈던 찬조금이 남아서 식사를 같이 하기로 했어요. ** 식당으로 오세요."

반장엄마가 전화를 걸어왔다. 학년 초에 냈던 찬조금이 남아서 점심식사를 한다는 것이었다. 가벼운 마음으로 식당으로 향했는데 식당 안에서 사건(?)이 발생했다.

3학년 회장엄마가 그동안 수고한 임원엄마들을 향해 다정한 인삿말을 건넸다. 그동안 학교에서 몸으로(?) 뛰는 일은 직접 못했던 나는 조금은 미안한 마음으로 앉아 있었다. 그런데 그날 식당에는 스무 명이 넘는 열세 개 반의 임원엄마들이 모여 있었다.

식사가 끝난 뒤 그동안 썼던 찬조금 내역 보고서가 엄마들에게 나눠졌다. 보고서에는 지난 1년 동안 소풍과 체육대회, 기타 스승의날 행사에 들어간 찬조금의 사용내역과 잔액이 적혀 있었다. 회장은 남은 돈을 어떻게 사용할 것인지에 대해 이야기를 했다.

"남은 찬조금이 모자라니 한번 더 수고해 주세요"

"그동안 임원엄마들이 수고해 주셔서 모두 '얼마'가 걷혔어요. 그런데 그 돈이 우리 3학년 학급 금액과 맞지 않지요? 그건 ㄱ반과 ㄴ반 부반장 엄마가 돈을 내지 않아서 그래요. 그 두 사람은 말이 많아서 내지 말라고 했어요. 제가 전화를 했더니 왜 이런 돈을 걷느냐고 하면서 교육청에 찌른다고(?) 하더군요. 두 몫이 비는 것은 바로 그 때문이에요.

찬조금 가운데 남은 돈으로는 종업식 날 교무실에서 파티를 할 거예요. 선생님들 수고하셨으니까요. 그래서 과일, 떡, 케이크를 주문하고 과자랑 음료수를 사려고 해요. 각 교실에도 과자와 음료수를 돌릴 거고요."

교육청에 찌르면 시끄러워지니 내지 말라고 했다는 말도 우스웠지만 이어진 회장의 말이 나를 더욱 곤혹스럽게 만들었다.

"이번에 우리 아이들이 졸업을 하니까 선생님 선물을 준비하려고 해요. 그런데 엄마들도 아시잖아요. 요즘 물가가 비싸다는 것을요. 지금 남아 있는 돈으로는 선생님들에게 십만원짜리 상품권밖에 드릴 수가 없어요. 그런데 십 만원 가지고는 구두 한 짝도 못 사잖아요. 그깟 십 만원으로는 정말 살 게 없어요. 그래서 최소 이십만원은 채워서 드리려고 해요."

무슨 이야기가 나올지 대충 짐작이 가는 상황이었다. 내 앞에 앉은 A반 부반장 엄마의 불편한 심기가 눈에 들어왔다. 회장은 계속해서 말을 이어 나갔다.

"그래서 남은 돈으로는 선물값이 부족할 것 같아서 임원엄마들이 한 번 더 수고를 해달라고 부탁을 하려고요."

"얼마면 되는데요?"

회장의 의견에 동조하는 눈치 빠른 엄마가 환하게 웃으며 물었다.

"6만원만 더 내주시면 파티랑 선물이랑 다 할 수 있을 것 같아요. 부담은 되시겠지만 졸업식날 어차피 선물하려면 그 이상 돈이 들잖아요. 그러니 이번에 우리 임원엄마들이 같이 하면 좋을 것 같아요."

"좋아요."

회장의 말에 즉각 찬성하는 의견이 나왔다.

"다른 의견 없나요?"

"제발 선생님들을 욕되게 하지 마세요"

어느 광고 문구에 나오듯, 모두가 "예"라고 말할 때 "아니오"라고 말하는 건 쉬운 일이 아니다. 하지만 부조리한 상황에 대해 입을 다물고 암묵적인 동의를 하는 것은 '악'이라는 생각에 나는 투사(?)가 되기로 했다. 그리고 목소리를 높여 다음과 같은 요지의 말을 했다.

자모회라고 하는 것이 학교와 학생간의 가교 역할을 하는 생산적인 모임인 줄 알았는데 그렇지 않은 것 같다. 찬조금에 대해서도 나는 다른 생각을 가지고 있어서 솔직히 마음이 안 내켰다. 하지만 그 돈이 아이들과 선생님을 위해 쓰인다고 하니 냈다.

사실 이 자리에 모인 엄마들 모두가 경제적으로 여유가 있는 건 아닐 것이다. 물론 찬조금이 큰 돈은 아니라고 하지만 이마저 쉽지 않을 엄마도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지금 찬조금이 남아 선생님에게 선물을 한다고 한다. 반대는 안 한다. 하지만 남은 돈으로는 십만 원짜리 상품권밖에 살 수 없다고 하는데 그게 부끄러운 선물인가.

그리고 그 돈으로는 구두 한 짝도 못 산다고 하는데 솔직히 선생님 구두를 온짝으로 사 줘야 하는가. 감사의 마음은 개별적으로 '정성껏' 하면 된다. 나 역시 교육계에서 일하고 있지만 이런 식의 행동은 결국 선생님들을 욕 되게 하는 것이다.

우리의 교육이 바로 서려면 교육의 주체인 선생님, 학생뿐 아니라 학부형도 변해야 한다. 진정으로 아이들의 교육을 염려한다면 찬조금이 이런 식으로 쓰이는 것도 바뀌어야 한다. 관행이라는 미명하에 앞으로도 이런 식의 자모회가 계속된다면 우리의 교육은 희망이 없을 것이다.


학부형이 '혁신적으로' 바뀌어야

계획에도 없던 일장 연설(?)을 마치고 나니 좌중에 냉기가 흘렀다. 대단히 당황스러운 상황이었다. 그렇지만 내 손을 가만 쥐어주는 엄마도 있었다. 바로 옆에 앉은 B반 엄마였다. 그 엄마 역시 분위기에 압도되어 말은 못하고 있었지만 생각은 나와 같았던 것 같다. 결국 회장단이 이끄는 '화기애애한 분위기'를 썰렁하게 만든 죄(?)로 나는 그만 자리를 박차고 나올 수밖에 없었다.

선생님과 면담이 끝난 뒤 사진을 찍었다. 'Back to school Night'에서의 즐거운 시간
선생님과 면담이 끝난 뒤 사진을 찍었다. 'Back to school Night'에서의 즐거운 시간 ⓒ 한나영
사실 지나간 이야기를 이렇게 장황하게 쓰는 이유는 우리의 교육계가 바뀌어야 한다는 생각에서다. 교사도 바뀌어야 하지만 무엇보다도 학부형들이 '혁신적으로' 바뀌어야 한다는 게 내 생각이다.

지금은 많이 나아졌다고 하지만 우리의 고질병인 촌지문제만 하더라도 학부형이 소신만 가지고 있다면 그렇게 문제가 되지는 않을 것이다. 학부형이 먼저 변해야 한다. 말도 많고 탈도 많은 우리 대한민국의 교육현실, 그 희망의 싹을 학부형들이 먼저 틔울 수는 없을까. 우리의 교육 미래를 진지하게 생각해 봐야 할 새학기 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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