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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족산 초입, 아스팔트 위에 자동차 바퀴에 깔린 개구리가 종종 눈에 띄었다. 네 다리를 쫙 벌린 개구리의 사체. 세상에 나와 너무 일찍 만나버린 죽음은 박제와도 같다. 그런 아스팔트 옆 양지쪽에 풀들이 돋아나 있었다. 경칩이었다. 봄은 그렇게도 왔다.

계족산성 가는 길을 찾느라 산 아래에서 힘을 다 뺀 탓에 산을 오르는 다리가 흔들렸다. 회덕정수장에서 출발한 산행은 능선길을 버리고 보다 쉬운 산복도로를 택하게 하였다. 산복도로는 산허리를 둥글게 휘감고 나갔다. 그러나 산복도로를 따라 걷는 걸음은 편안함에 비해 멀리 산정의 계족산성은 좀체 가까이 다가올 줄 몰랐다.

▲ 계족산성 남문
ⓒ 이용진
힘 빠진 두 다리는 '하필이면 저 높은 곳에 성 쌓을 생각을 했을까'하는 탄식을 꺼내놓는다. 이봉주 선수는 이 산복도로를 하루 세 바퀴씩 뛰었다고, 산 아래까지 태워다준 택시기사가 일러주었다. 걷는 길 하나인데 사람에 따라 이렇게 다르다.

미리 밝히면, 계족산성으로 가는 가장 짧은 코스는 장동산림욕장을 거쳐 가는 길이다. 다소 가파른 등산로이지만 등산의 묘미도 있고, 마지막 코스 바로 아래까지는 산복도로가 나있어, 그곳부터 약 1km 정도만 가파른 길을 올라가면 된다. 계족산성에 올랐다가 능선길로 팔각정을 거쳐 하산하는 것이 나을 법하다. 대전 외곽을 지날 때마다 멀리 산 능선에 보이던 팔각정에 올라보는 것도 계족산성 답사의 또 하나의 맛이라고 할 수도 있겠다.

임도삼거리에서 산복도로를 버리고 능선길을 탄다. 계족산성까지는 2.7km. 능선길은 역시 좌우를 고루 살필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이 땅의 모든 산성들은 그렇게 너른 조망권을 확보하고 있었다.

▲ 계족산성 서벽
ⓒ 이용진
계족산 능선을 따라 축성

대전 계족산(420m) 정상에서 능선을 따라 축조된 테뫼식 산성인 계족산성(鷄足山城)은 삼국시기 신라와 백제의 접경지역으로 전략적으로 매우 중요한 요충지였다. 백제가 쌓은 것으로 알려져 왔으나, 1998~99년 발굴을 통해 축성 기법에서 보이는 신라 축성의 특징, 출토 유물 등으로 볼 때 계족산성의 처음 축조 시기는 6세기 중후반경 신라에 의해 이루어졌다고 보고 있다.

성벽 높이는 약 7~10m, 가파른 북쪽을 제외한 동·서·남쪽에 문터를 만들었다. 고려와 조선시대까지도 중요시되었던 곳인데, 정교한 축조기법, 현존하는 성벽의 양호한 상태, 고려시대 기와편, 조선시대 봉수지와 자기편, 초기 축성시 만들었던 남문지, 저수지 등을 확인함으로서 그 가치를 높이 인정받고 있는 산성이다.

▲ 동벽의 바깥쪽은 무너지고 내벽은 잘 남아 있는데, 정교함이 돋보인다.
ⓒ 이용진
▲ 계족산성 동남쪽 성벽
ⓒ 이용진
<대전시 문화유적총람>에 따르면 "성체를 구축하는 공법에 있어서 작은 모쌓기를 기본으로 하고 있으나 가로쌓기와 세로쌓기를 교차로 축조하는 공법을 병행하고 있으며 납작한 자연 할석을 사용하고 있는 점 등이 보은(報恩) 삼년산성(三年山城)의 구축 공법과 궤(軌)를 같이 한다"고 한다.

특이한 점은 기단보축(基壇補築)으로 일컬어지는 공법인데, 성체의 하단부에 성벽을 보호하기 위하여 쌓은 보축으로, 성벽 곳곳에서 그 흔적을 확인할 수 있다. 이러한 기법이 적용된 신라 산성으로는 삼년산성, 충주산성, 대모산성, 명활산성, 성산산성 등이 있다.

문화재청 홈페이지에는 다음과 같이 보충 설명하고 있다.

"성쌓기 방법은 보은에 있는 신라 삼년산성과 같은 방식으로 쌓았다는 것이 발굴을 통해 밝혀졌고, 출토된 토기 중 가장 오래된 것이 6세기 중·후반의 신라토기임이 밝혀졌다. 이후에 나온 토기 형태도 백제계는 소수이며 다수의 신라계 토기가 보여, 한때 백제가 점령하긴 했지만 신라에 의해 만들어진 산성으로 조사되었다. 계족산성은 새로운 발굴 성과에 의해 신라가 쌓은 것으로 나타났으나 아직도 논란이 있으며, 6세기 중·후반 신라나 백제에 의해 만들어진 산성으로, 당시 대전지방이 가진 전략적 중요성을 보여준다."

▲ 성 안에서 바라본 계족산성 남문
ⓒ 이용진
신라 특유의 기법으로 쌓은 산성

임도삼거리에서 시작한 능선길을 따라 30여 분을 가자 웅장한 자태의 남문이 나타난다. 남문은 남벽에서 서쪽으로 치우친 지점에 설치되어 있는데, 서벽을 따라 길게 발달된 능선을 고려한 것으로 보인다.

대전광역시에 1993년에 발간한 <대전의 성곽>에 보면 "남문지는 성벽 서남단 지역의 능선이 통과하고 있는 부분에 위치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약간 동쪽으로 비껴나서 설치되어 있다. 따라서 남문으로 출입하기 위해서는 남문의 서남쪽 외곽부에 발달한 능선에서부터 약 20m 가량 동쪽으로 우회하여야만 한다. 성문을 'S'자형으로 우회하여 출입할 수 있게 한 이유는 외적의 침입에 대비하기 위한 배려라 생각된다"고 설명하고 있다.

▲ 납작한 자연 할석을 켜켜이 쌓은 성벽
ⓒ 이용진
성문을 들어서면 능선의 급경사를 이용하여 쌓은 서벽이 뻗어 있다. 그러나 서벽 성체는 대부분 붕괴되어 최근 복원되었다. 멀리 바라다보이던 성벽이 바로 서벽인 것이다.

서벽이 발달되어 가다가 직각으로 꺾여 약 110미터에 이르는 일직선의 북벽을 이룬다. 덤불을 헤치고 벽 가까이 나아가자 처음에는 무너진 흔적으로만 알았는데, 직선형태의 북벽의 약점을 보완하기 위한 치성이 구축되어 있음을 볼 수 있었다.

북벽은 다시 직각으로 꺾여 동벽으로 이어진다. 동벽은 성내에서 가장 낮은 지점을 통과한다. 외벽은 거의 무너져 내렸으나 내벽은 약 100여 미터에 이르는, 정교하고 치밀한 성벽을 잘 보존하고 있어 탄성을 자아내게 한다.

특히 동벽의 중간에서 약간 북쪽으로 치우친 곳은 성내에서 가장 낮은 지점인데, 이곳에는 성 안에 모여든 하수를 처리하기 위한 시설이 설치되어 있었다. 4단에 걸쳐 쌓은 저수지 축대는 정교하고 웅장할 뿐만 아니라 수위에 따라 계단으로도 활용할 수 있도록 설계한 점이 눈길을 끌었다.

▲ 동쪽성벽 안쪽 가장 낮은 지점에 위치한 저수시설
ⓒ 이용진
그러나 계족산성에 오른 등산객은 동벽 아래까지 내려가 보지 않고 능선을 따라 축조된 서벽만을 따라 가는 것으로 성 관람을 대체로 마무리한다.

성 곳곳에서 보수, 복원공사가 계속되고 있었다. 이제 봄이 왔으니 본격적인 복원공사가 진행될 것이다. 그러나 복원된 체성(성벽의 본체)을 살펴보면 천년 세월이 흐른 성벽과는 확연히 구분된다. 납작한 자연 할석을 켜켜이 쌓은 원장 성벽을 제대로 살려내지 못하였다. 그러한 복원은 성의 형태만을 보여줄 뿐, 신라 특유의 축성기법은 보여주지 못하게 된다.

문루(門樓)도 전루(箭樓, 활을 쏘는 높은 다락)도 없는, 전창(箭窓, 활을 쏘는 구멍)도, 옹성도 없는 산성에서 '한밭'을 굽어본다. 계족산성은 신라와 백제의 공간적 경계인 동시에 역사적 공존과 교체의 접점이었다. 그 접점은 깊은 상흔을 남겼겠지만, 그 접점이 팽팽하면 할수록 빛나는 결과물들도 남겼다. 계족산성 성벽의 정교함과 장중함은 접점이 낳은 대표적인 고대산성이 아니었겠는가.

덧붙이는 글 | <계족산성 가는 길>
승용차를 이용, 대전, 신탄진 IC를 나와 대전, 신탄진간 17번 국도를 타고 가다가 장동삼거리에서 장동산림욕장으로 들어간다. 
대중교통을 이용할 경우, 대전역 또는 대전버스터미널에서 703번 좌석버스나 724번 시내버스를 이용, 와동현대아파트에서 내린다. 바로 전 정류장인 정수장에 하차하여도 된다.

* 이 글은 한국토지공사 사외보 <땅이야기>에도 송고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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