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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주)창비
1998년 동아일보 신춘문예로 등단한 젊은 소설가 조헌용의 <파도는 잠들지 않는다>에 실린 8편의 중ㆍ단편 소설들은 모두 이 작은 갯마을 '까침바우'를 공간적 배경으로, 이 마을이 어떻게 해서 '소리를 잃은 마을'로 전락하게 되었는가를 매우 사실적으로 그려내고 있다.

작지만 언제나 활기에 넘치던 마을 까침바우가 이처럼 쇠락한 모습으로 변하기 시작한 것은 불과 10여 전의 일. 바로 마을에서 바라다 보이는 수평선 너머의 너른 바다를 모두 땅으로 만드는 새만금 간척사업이 시작되고 나서부터였다.

바다 한가운데를 가로질러 막는 거대한 방조제를 쌓아 그 안에 여의도 면적의 150배가 넘는 땅을 만드는 새만금 간척사업이 시작되면서 연안 바다는 조금씩 썩기 시작하고 온갖 종류의 조개들이 지천으로 널린 뻘밭도 생명력을 잃기 시작한 것이다.

부패하고 죽어 가는 것은 단지 자연 생태계 뿐만이 아니어서, 그와 동시에 누대에 걸쳐 그 바다와 갯벌에 뿌리를 두고 살아온 사람들의 공동체까지 무너져 내리게 된다. 작가가 시선을 두고 있는 곳은 바로 이 지점으로, 아직 이십대의 작가는 환경과 개발이라는 거대 담론이 미처 담아내지 못하는 새만금 사람들의 이야기를 젊은이답지 않은 냉정함으로 꼼꼼하게 점묘해내고 있다.

어류보다는 패류가 주된 수입원인 마을이지만, 좋은 시절에는 담배 인심보다 한결 좋은 것이 이 마을 고기 인심이었다. 생합이나 피조개 등은 말할 것도 없고 그 비싼 돔이나 광어 같은 것들이 어쩌다 잡힌다 해도 내다 파는 일 한번 없이 두리기상을 차려놓고 사람들에게 두루두루 나누어 먹였다. 이 마을 사람이 아니더라도 지나가는 이가 있으면 세워놓고 술잔을 권하던 오붓한 마을이었고 또 그만그만한 마을인심이었다. 그러던 것이 새만금 간척사업이 시작되고 마을인심도 사나워지면서 서로 무엇을 나누는 일도 뜸해졌다. (37-38쪽, <바다에 길을 묻다>)


넉넉하고 풍요롭던 마을인심이 이처럼 각박해진 것은 새만금 간척사업에 따른 보상금이 지급되면서부터였다. 마을 사람들은 좀 더 많은 보상금을 타기 위해 서로의 눈치를 살피기 시작했고, 차츰 서로가 서로를 믿지 못하고 서로가 서로를 돕지 않게 된 것이다.

또한 조개를 잡는 어촌계 사람들과 김 양식을 하는 사람들로 패가 갈려서, 마을 사람들 사이에는 서로 더 많은 보상금을 타기 위한 험담과 시기와 싸움이 끊이질 않았다. 보상이 끝나면서 그런 것들도 점점 줄어들었지만 한번 쌓인 마음의 벽은 여간해서 잘 허물어지지 않았다. 말하자면, 바다 한가운데 방조제가 조금씩 뻗어나감과 동시에 마을 사람들의 마음에도 불신과 시기의 벽이 조금씩 세워지고 있었던 것이다.

정답고 순한 사람들의 마음에 불어닥친 돈의 위력 앞에 인정(人情)은 이제 설 곳이 없다. 칠십 평생 바다에서 뱃일을 하면서 씩씩하게 살아왔지만 지금은 배를 새만금에 내어주고 화투판 꼬투리에 앉아 광이나 파는 초라한 인생으로 전락해버린 광팔이영감의 말처럼, 마을이 생기고 나서 불어닥친 어떤 태풍도 이렇게 모질고 거칠지는 않았다.

이 태풍 앞에서 순진하고 풋풋한 사람들은 비틀거린다. 노름에 빠져 몇 푼 보상금을 다 까먹고는 끝내 노름빚을 갚지 못하고 야반도주하기도 하며, 욕심이 지나쳐 엄청난 부채를 짊어지고 결국 빚쟁이의 칼에 맞아 죽기도 한다.

그러나 마을을 떠날 수도, 스스로 목숨을 끊을 수도 없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한푼이라도 더 벌기 위해 아등바등 생계를 꾸려나갈 수밖에 없다. 몇몇은 새만금 간척공사장의 덤프 트럭 기사가 되어 위험한 둑길 위를 질주하고 또 몇몇은 철조망 둘러쳐진 바닷가에서 불법 포장마차 영업을 한다. 또한 보상금을 받고 나서도 당국의 눈을 피해 다시 고기잡이에 나서는 사람들도 더러 있다.

그들이 바다와 갯벌을 쉽게 떠나지 못하는 것은 그곳은 바로 그들 평생의 삶이 녹아 있는 삶의 터전이기 때문이다. 그들은, 그 바다와 갯벌에서 수천 수만 년 동안 평화로운 삶을 이어온 노랑조개, 피조개, 생합, 소라, 골뱅이, 꼬막 등의 조개무리에 다름 아닌 것이다. 그러니 그 바다와 갯벌이 썩어 들어갈 때, 그들의 삶 역시 썩어 들어가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이처럼 조헌용의 소설집 <파도는 잠들지 않는다>는, 무분별한 개발이 낳은 자연 생태계의 파괴가 어떻게 인간 생태계의 해체와 파괴로까지 이어지는지를, 르포르타주에 육박하는 현장감과 해학과 풍자가 넘쳐나는 생생한 문체로 그려내고 있다. 특히, 소설 속 등장인물들이 전라도 사투리로 주고받는 구수하고 정겨운 대화와 글의 흐름에 너무나도 잘 어울리는 다양하고 아름다운 순우리말의 구사는 놀라울 정도이다.

내가 모르는 낱말들이 너무나 많아 국어 사전을 옆에 함께 놓고서 그의 소설을 읽어야 했지만, 그게 불편하기보다는 내가 모르고 있던 순우리말을 덕분에 알게 되었다는 기쁨이 앞섰다. 마치 갯벌에서 흔전만전 널려있는 조개를 잡아 올리듯이 나는 광대한 순우리말의 갯벌에서 내가 미처 모르고 있던 수십 개의 낱말들을 새로 익힐 수 있었다.

전라도에서 태어나고 자라난 작가의 개인사적 배경을 고려한다고 해도, 순우리말에 대한 그의 해박한 지식과 그것을 놀라울 정도로 적확하게 글에 활용하고 있는 그의 솜씨는 예사로운 것이 아니다. 그 하나만으로도 그의 소설들은 한국문학사에 있어서 하나의 성취로 기록될 만하다. 그런데도 그는 그의 소설들이 이룬 성취를 자신의 것이 아니라 새만금 사람들의 것으로 돌리고 있다.

그들의 분노로, 그들의 절망으로, 그들의 흐느낌으로, 그리고 그들의 한숨과 견딤으로 소설들은 씌어졌다. 그러기에 이 책에 실린 소설들은 나의 것이 아니고 그들 것인지도 모르겠다. 바람이 있다면, 썩어가는 바다를 아직 버리지 못하고 묵묵히 살아가는 사람들의 힘겨움과 고단함에 이 책이 조금이나마 위안이 되었으면 하는 마음이다. (8-9쪽, 작가의 말)


새만금 간척사업에 대한 대법원 최종심과 그에 따른 마지막 물막이 공사를 목전에 두고 있는 지금, 작가의 말은 더욱 간절한 울림이 되어 내게 다가온다. 하지만 내가 바라건대는, 이 소설집이 단순히 썩어가는 바다와 갯벌을 아직 버리지 못하고 묵묵히 살아가는 새만금 사람들에게 위안이 되는 것에 그치지 않고, 새만금 간척사업이 나랑 무슨 상관이냐고 생각하는 많은 사람들에게 각성의 눈을 뜨게 하는 채찍이 되었으면 하는 마음이다.

더 욕심을 낸다면, 멀리 떨어진 도시의 호화로운 책상 앞에 앉아서 새만금 간척사업을 진두지휘하고 있는 관료들과 이 사업의 지속 여부를 판단할 대법원의 법관들도 이 소설집을 한번 읽었으면 하는 마음이다.

그들이 이 소설집 <파도는 잠들지 않는다>를 읽고 나면, 새만금 방조제의 마지막 물막이 공사를 강행하는 것은 죽어 가는 바다와 갯벌의 숨통을 결정적으로 틀어막는 자연 생태계 파괴행위이며, 결국은 그곳을 삶의 터전으로 삼고 있는 수천 수만의 어민들의 목숨까지도 틀어막는 전대미문의 야만행위라는 사실을 깨닫게 될 테니까.

덧붙이는 글 | 《파도는 잠들지 않는다》

ㅇ지은이 : 조헌용 
ㅇ펴낸곳 : (주)창비      
ㅇ펴낸때 : 2003년 10월 10일 초판      
ㅇ정  가 : 8000원


파도는 잠들지 않는다

조헌용 지음, 창비(2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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