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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찬주 장편소설 <야반삼경에 촛불춤을 추어라> 1권 앞표지
ⓒ 김영사
극락심 보살은 보따리 행상을 하다 들판의 원두막에 폐병 환자가 짐승처럼 웅크리고 있는 것을 발견하고는 그냥 지나치지 못했다. (중략) 극락심 보살은 환자를 깨워 일어나게 하여 통도사로 데리고 갔다. 그러나 통도사에서는 이런저런 이유를 대며 환자를 받아 주지 않았다. (중략) 할 수 없이 극락심 보살은 10여 리 떨어진 극락암으로 환자와 함께 걸었다. 찬바람이 쌩쌩 불었으므로 환자는 곧 동사할 것처럼 얼굴이 시퍼렇게 변해 갔다. (중략)

그런데 환자는 경봉을 보자마자 피를 토하며 쓰러져 버렸다. 극락암까지 올라오느라 기진맥진한 데다 방 안의 따뜻한 기운이 덮치자 그만 혼절한 것이었다. 환자의 붉은 피는 경봉의 얼굴과 장삼을 적셨다. 극락심 보살은 당황하여 어찌할 바를 모르고 울상을 지었다. 그러나 경봉은 차분하게 혼절한 환자의 얼굴과 팔에 묻은 피를 먼저 닦아 주더니 벽장에서 새 법복을 꺼내 환자에게 입혀 주었다. 그런 다음 자신의 몸에 묻은 피를 닦아 내며 당황해 하는 극락심 보살을 안심시켰다. - <야반삼경에 촛불춤을 추어라> 249~250쪽에서


누구든 감동할 만한 경봉 스님의 한 모습이다. 여기서 그친 게 아니고 그 폐병 환자가 극락암 위의 빈 암자에 머물면서 생식을 하게 하였다. 약도 구해다 주고 하여 몸이 좀 좋아지자 부산에 데리고 나가 보신탕을 사 먹였다.

경봉 스님 일대기 소설로 출간

소설가 정찬주씨가 마침내 200자 원고지 분량으로 2200매의 연재를 마치고 다듬어서 경봉 스님의 일대기를 다룬 소설책을 내놓았다. <야반삼경에 촛불춤을 추어라> 1, 2권(2006년 3월 1일 김영사 펴냄).

이 소설은 크게 두 기둥으로 나누어진다. 하나는 경봉 스님이 선방에서 치열하게 정진하는 수행 이야기요, 다른 하나는 깨달음을 이룬 후 그것에 갇히지 않고 중생을 제도하는 이야기다.

1892년 경남 밀양에서 태어난 경봉 스님은 어머니를 여의고 삶과 죽음에 의문을 품고서 16세에 출가한다. 이미 한문에 조예가 깊었던 그는 강원까지 마친 뒤 스승 성해 스님의 신임을 받아 행정 업무를 맡게 되었다. 그러나 어느 날 <화엄경>에서 '종일토록 남의 보배를 세어도 반 푼어치의 이익도 없다'는 구절을 읽고는 크게 발심한다. 1915년(23세)에 통도사를 나온 그는 가야산 해인사 선방으로 찾아들었다. 졸음과 망상이 올 때마다 집중하기 위해서 허벅지에 피가 나도록 못으로 찍고 계곡에서 얼음을 가져와 입에 물었다. 심지어 기둥에 머리를 박아 피를 흘리기도 했다. 그래도 집중이 안 될 때는 뒷산에 올라가 엉엉 소리 내어 울었다,

"빨리 돌아오라"는 스승의 부름이 있었지만 경봉 스님은 직지사로, 금강산 마하연사로, 안성 석왕사로 옮기면서 참선 정진을 거듭했다. 그가 통도사로 돌아온 것은 어느 정도 화두에 몰입할 수 있게 된 30세. 36세 때 되던 해 겨울에 비로소 그는, 갑자기 벽이 무너지듯 시야가 툭 트이면서 오묘한 일원상만이 드러나는 경지를 체험하기에 이른다. 그래도 쉬지 않고 정진을 계속한 지 20여 일 뒤, 새벽 두 시 반에 문틈을 파고든 바람에 촛불이 "파파파팟" 소리를 내며 춤추는 모습을 본 순간 억겁의 의문이 찰나에 녹아버렸다.

"이왕 사바세계에 왔으니 근심 걱정 놓아버리고 한바탕 멋들어지게 살아라." 대도(大道)의 성취였다. 이후 경봉 스님은 통도사 주지 등을 지내고 1953년(62세)에 극락호국선원의 조실로 추대 받아 전국에서 찾아오는 선승들을 지도한다. 언제나 온화하고 자상했으며, 청렴하고 검소한 생활을 하였다. 82세 때부터는 일요일마다 정기법회를 열었고, 90을 넘어 부축을 받으면서도 법상에 오르는 일을 빼놓지 않았다.

수좌들이 공부가 안 된다고 물어오면 "야반삼경에 촛불춤을 보아라"고 하였으며, 세수 91세 되던 1982년 7월 17일, 시자 명정 스님이 "스님, 가시면 보고 싶습니다. 어떤 것이 스님의 참모습입니까?"하고 물었을 때는 "야반삼경에 대문 빗장을 만져보라"는 임종게를 남기고 대문 빗장을 잠그듯 열반에 드셨다.

한국전쟁 중 통도사 극락암에서 법회가 열리면 국군과 공비가 함께 스님의 법문을 경청했다고 한다. 왜 서로에게 총구를 겨누는지조차 모르던 그들은 법문에 감화를 받고 눈물을 주르르 흘리고 말았다고 한다.

참다운 수행자의 길

▲ 소설가 정찬주.
ⓒ 오마이뉴스 강성관
산 속에 집을 짓고 농사를 지으며 사는 작가와 전화 통화를 하였다.

- 과거에 성철 스님의 일대기와 만해 스님 이야기를 각각 소설로 창조해낸 일이 있다. 이번엔 왜 경봉 스님의 일대기를 쓰기로 마음먹었나?
"참다운 수행자를 거울삼아서 우리가 잃어버린 자비심, 사랑, 덕성, 즉 인간의 조건을 일깨우는 계기가 됐으면 하는 바람에서 쓴 것이다. 근현대사에 이만한 넓이와 깊이를 가진 큰 그릇이 있었나 싶다. 가장 존경하는 스님으로 경봉 스님을 말하는 스님들이 많다."

- 입적하신 분을 우리가 소설을 통해 다시 만날 수 있다는 것은 기쁨이다. 집필이 쉽지 않았을 것 같은데.
"자료수집과 취재, 그리고 집필기간을 합쳐 보니 어느새 5년의 세월이 흘렀다. 알음알음으로 취재해 나갔다. 극락암 신도들에게 많은 것을 물었고, 경봉 스님의 일대기를 연재중이라는 신문 보도를 보고 장문의 편지 제보를 해주신 대학 교수도 있다. 취재에 도움을 주셨던 분들 중에는 노환으로 돌아가신 분도 있다. 작년 봄에 세상을 떠나신 극락심 할머니도 그 중 한 분이다. 경봉 스님에 대한 자료를 한 아름 쌓아 두고 구상만 하면서 미적거리던 내게 발심(發心)의 도화선이 되어 주셨던 분이 바로 극락심 할머니다. 1960년대 초에 실제로 있었던 경봉 스님의 일화를 그분에게서 생생하게 듣고 나서야 경봉 스님에 대한 흠모와 경외감에 휩싸였고 집필의지에 불을 댕길 수 있었다."

- 작가가 느낀 경봉 스님의 가풍은?
"한마디로 '화엄의 바다'라 할 만하다. 참선과 불학(佛學), 염불, 기도, 다도(茶道) 등 불가의 모든 방편이 한데 어우러져 그 세계가 깊고도 넓다. 1만 일 동안의 염불만일회를 회향하고 극락선원을 수좌들의 고향 같은 전국 제일의 선방으로 이끌었다. 일찍이 운문사 사리암에 나반존자 소상을 봉안하여 삶이 고달픈 중생들의 기도 도량이 되게 한 것이 그 한 예이다."

- 경봉 스님은 어떤 분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스님은 지혜를 구하려는 사람에게는 문수보살 같은 분이셨고, 희망을 가지려는 사람에게는 관세음보살 같은 분이었고, 평안을 얻으려는 사람에게는 지장보살 같은 분이셨다. 그리고 극락암을 찾는 누구에게나 차별 없이 맑고 향기로운 차 한 잔을 권하시던 사람 냄새 물씬 풍기는 스님이었다. 많은 스님들이 극락선방에서 수좌(首座)로 공부하는 게 소원이었다고 한다. 한마디로 현대판 원효스님 같은 분이 아니었을까."

- 왜 수행자가 있어야 하나?
"뉴스를 보면 부자의 도도 깨어지고 인간의 도리가 깨져버린 불행한 시대를 우리가 살고 있음을 느낀다. 경봉 스님은 바로 남을 위하는 삶을 보여준 참다운 수행자였다. 이런 참다운 수행자가 있기 때문에 악이 판치는 사회가 한쪽으로 기울지 않고 균형을 이루어 나가는 게 아니겠는가."

인생을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야반삼경에 촛불춤을 추어라>. 이 소설을 불교소설이라 좁혀 말하는 것에 나는 반대한다. 또한 불교신자만이 읽는 소설인 것처럼 한 테두리에 가둬버리는 건 바람직하지 않다고 본다. 병원을 무대로 하고 환자가 주인물인 소설이라면 병원소설이라고 해야 하겠는가. 대학교를 무대로 하고 대학생이 주인물인 소설이라면 대학 소설이라고 해야 하겠는가.

▲ 정찬주 장편소설 <야반삼경에 촛불춤을 추어라> 2권 앞표지
ⓒ 김영사
이 소설에서는 경봉 스님의 상좌인 명정 스님이 명담 스님으로 등장하고 극락심 보살은 보살명 그대로 등장하는 한편, 김 화백이라는 가상인물을 창조하여 경봉 스님을 회상하는 것으로 소설이 시작된다. 그것이 이 소설에 접근하는 묘미다.

이 소설은 인생을 어떻게 살아야 할지를 보여주는 동시대의 한 한국인을 그린 것이 아니겠는가. 경봉 스님, 우리가 자랑스럽게 생각해야 할 멋들어진 한국인이었다.

명정 스님은 이 소설을 '불교에 조예가 깊은 정찬주씨는 경봉 노사께서 남기신 사실과 일화를 토대로 소설가로서 작가에게 허락되는 상상력을 이 책에서 십분 발휘하여 스님이 옆에 계신 듯 생생하게 환생시켜 놓고 있다'며 "어지간히 잘 썼다"고 평가했다.

현재 정씨는 화순군청 홈페이지에 빛과 그림자가 뚜렷한 실천유학자요 풍운의 개혁정치가였던 조광조의 일대기를 그린 장편소설 <하늘의 도(道)>를 연재하고 있다. 유학자들은 대체적으로 사림과 서원문화를 꽃피우게 한 그를 긍정적으로 평가하고, 역사가들은 대부분 이상과 현실의 괴리가 컸던 그의 삶을 부정적으로 평가하고 있다. 정씨는 소설 속에서 인간 조광조의 모든 것을 다룰 것이고, 평가는 겸허하게 독자에게 맡길 생각이라고 한다.

야반삼경에 촛불 춤을 추어라 1 - 경봉 큰스님 이야기

정찬주 지음, 김영사(2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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