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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의 추억> 겉그림.
<아버지의 추억> 겉그림. ⓒ 따뜻한손
이 책은 그러한 부모, 그동안 어머니에 비해 그다지 스포트라이트를 받지 못했던 아버지에 관한 삽화이다. 우리 사회의 대표주자라 일컬어지는 각계각층의 유명인사들이 자신의 아버지에 관해 쓴 수필 형식의 짤막한 글들을 모아놓은 모음집으로 사업가, 정치인, 예술인, 문인, 왕족, 과학자 등 다채로운 필자군을 가지고 있다.

책은 신경림, 송자, 고건 등 이름만 들어도 누구나 알고 있는 화려한 유명인사의 수필로 시작한다.

...아버지를 추억할 때 처음 떠오르는 모습은 항상 웃음을 보여주시던 인자함이다. 나는 우리 아버님이 화를 내신 모습을 전혀 기억할 수 없다. 우리들이 잘못을 했을 때에도, 웃으시면서 "그렇게 하면 이래서 안 된다"고 그 이유를 설명하시는 것이 꾸중이었다. 친구들이 종아리를 맞는 것을 여러 번 봤는데, 우리 형제들은 그러한 것을 집안에서 본 일이 없다.

우리들에게만 그렇게 하신 것이 아니다. 집안에서 일하는 사람들에게나, 면장 시절 면에서 일하는 분들에게도 큰소리를 내셨다는 이야기를 들어 본 적이 없다. 모두들 웃으면서 사시는 아버님의 모습에 대하여 좋은 말씀들을 많이 하셨다. 그러나 집안 어른들은 가끔씩 "너무 그렇게 좋게만 대하지 말고, 혼내줄 때는 혼내주라"고 주문하시는 경우도 있었다. <송자, 아버지같은 아버지가 되기 위해>


이처럼 대부분의 유명인사들의 아버지는 굉장히 훌륭하신 분이었다. 집안에서도 화 한 번 낸 적이 없거나, 불의를 보면 참지 못했거나, 가난한 이들을 보면 자식들을 굶기는 한이 있더라도 꼭꼭 도와주었다거나 하는 훌륭하고 완벽한 아버지의 모습을 보다보면 초등학교 시절 도덕 교과서를 읽고 있는 듯, 아련한 추억에 잠기게 된다.

아무래도 사회 저명인사들이니 자신의 명성에 흠이 되는 이야기를 하기 보다는 완벽한 아버지의 모습을 그려냄으로써 은근히 스스로를 높이고 싶었던 게 아닐까. 너무나 완벽에 가까운 아버지들의 모습을 보면서 독자들은 혹 그런 생각을 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책장을 넘길수록 독자는 너그러워지지 않을 수 없다. 아버지, 지금은 불러도 대답하지 않는 아버지에 대한 연민과 그리움, 지나간 과거는 아주 사소한 것조차 결국 미화되기 마련인데 하물며 내게 육신과 영혼을 주신 아버지의 이야기이겠는가. 이들이 그리는 아버지의 이야기는 그리움이요, 뉘우침이요, 뒤늦은 깨달음이요, 자신의 존재에 대한 다짐이다.

그러나 모든 인사들이 다 완벽한 모습의 아버지만을 그린 것은 아니다.

...아버지는 자상하지 않았고 가정적이지 않았다. 아버지는 가난했고 거칠었으며 늘 울분에 차 있었다. 아버지에게 광야란 없었다. 아버지는 그 불모한 시대의 황무지에 인간의 울분과 열정을 뿌리고 갔다. 나는 언제나 그런 아버지의 편이었다. 내가 너무 아버지 편을 들어서 늙은 어머니는 지금도 내가 못마땅하지만 어쩔 수가 없는 일이다. <김훈, 광야를 달리는 말>

김훈, 그는 울분으로 가득찼던 아버지의 생을 미화시키지 않고 그대로 드러낸다. 그러나 직설적으로 쏟아낸 그의 아버지의 모습이 인생의 실패자로 느껴지기보다는 유한한 인생을 살았던 한 열정적인 인간으로 다가오는 것은 '김훈'이라는 작가가 가지고 있는 천혜의 문장력 때문이리라.

정치인이나 사업가들이 아버지를 위대하게 그려내려 노력한 반면, 작가나 화가 등 예술인들은 아버지의 나약한 면이나 치부를 있는 그대로 드러내었다. 이제는 머나먼 과거가 되어버린 어린 시절을 투명하게 회고해 가면서 비로소 이해하게 되는 인간으로서의 아버지. 아버지도 결점을 가진 인간이기에 그렇게 할 수 밖에 없었음을, 아팠던 아버지의 일생을 같은 나이의 성인이 되어서 이제는 연민어린 정서로 회고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이렇게 표출해낸 인간적인 아버지의 모습은 '위대하신 아버지'보다 훨씬 더 독자의 마음에 스며든다. 사실 일상속의 우리네 아버지의 모습이 다 이런 모습이 아니겠는가. 어느 아버지인들 위대하기만 할 수가 있을까.

아버지. 그는 어린 자식에게는 신의 모습이었다가, 청년기의 자식에게는 모순투성이의 가식적인 어른의 표상으로 돌변한다. 그런 아버지가 자신과 조금도 다를 바 없는 유한한 인간으로 보이기 시작하는 때는 중년에 들어서기 시작하는 무렵, 아버지가 자신을 낳았을 나이가 되어서이다. 비로소 아버지를 있는 그대로 사유할 수 있는 그 때, 그러나 아버지는 더 이상 세상에 계시지 않는다. 세상의 모든 부모는 그렇게 자식의 가슴에 별이 되어 반짝인다. 교훈으로, 뉘우침으로, 그리움으로, 뒤늦은 이해로, 영원한 추억으로.

사회 각계각층 인사들의 사적인 가족사와 사고방식, 그들이 내세우고 싶어하는 자신의 특성을 엿볼 수 있는 것은 모음집 형식을 띤 이 책이 주는 쏠쏠한 재미이다. 대부분의 아버지들의 출생시기인 20세기 초반, 조선조 말기를 살았던 이들의 생활상을 보는 것도 역사책을 보는 것과는 또 다른 맛을 선사한다. 조선왕조의 후손, 의친왕의 아들인 이석의 글을 보면서 망해버린 왕조의 후손 입장에 서서 현대사를 바라보는 맛도 일품이다.

사진 속의 여러 아버지들 옆에 어김없이 한복을 입고 서 있는 어머니들의 모습에서 혹독한 가부장의 질서 아래 살았던 그녀들의 삶을 반추해보는 것도, 이 시대 대표주자들을 선정한 편집인 개인의 가치관을 유추해보는 것도 이 책을 읽는 빼놓을 수 없는 별미이다.

아버지의 추억 - 우리 시대 대표주자 33인을 키운 아버지 이야기, 개정판

로버트 김,신경림,정운찬 외 지음, 따뜻한손(2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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