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나 환상은 깨지게 마련이다. 예선전과 본선에서 두 번이나 그 코를 납작하게 해주었던 일본에게 가장 중요한 라운드에서 카운터펀치 한 방에 우리의 환상은 나가 떨어졌다. 세계의 올스타라 해도 과언이 아닌 미국을 홈런 두 방으로 잠재운 대한민국 드림팀이 가장 지기 싫은 상대인 일본에 나가 떨어졌으니 그 비참함과 허망함은 이루 말할 수 없는 참담함이다. 반도는 침묵 속으로 가라앉고 부아 끓는 속을 감추던 열도는 흥분의 도가니로 변했다.
이게 스포츠다. 이길 수도 있고 질 수도 있다. 좀 더 나은 종목이 있고 아직 격차를 좁히지 못하는 종목도 있을 수 있다. 사실 우리의 야구 여건과 일천한 야구역사에 비하면 드림팀의 선전은 기적 같은 일이다. 졌다고 슬퍼할 일도 자조 섞인 우울함으로 분통을 터트릴 일도 아니다.
선수 생활에 커다란 부담이자 위험일 수도 있는 이번 경기에 전원 동참한 선수들의 애국심은 칭찬해 주는 것이 마땅하다. 경계하고 혼내주어야 할 것은 그들의 선전을 전체주의, 상업적 애국주의의 수렁으로 끌어들여 이용한 미디어의 횡포다.
우리는 MBC '피디수첩' 보도로 촉발된 황우석 사태에서 그릇된 포퓰리즘과 내셔널리즘에 기댄 미디어의 해악을 이미 몸으로 정신으로 깊이 체험하였다. 진실이 밝혀지기 전 황우석에 대한 환상은 전 언론이 신봉하고 믿어 의심치 않은 신앙에 가까웠다. 맹신은 광기를 부르고 광기는 오직 하나의 담론만을 허용하는 전체주의 한국으로 국민을 통합(?)하였다. '황우석교'의 열성적인 전도자들은 언론이었다. 진보언론이라 내세우는 매체 역시 마찬가지였다. 전파와 활자는 파시즘의 광풍으로 휘몰아쳤다.
불행하게도 우려하던 재앙은 현실이 되었다. 황우석을 비롯한 노성일, 김선종 등 각기 자신의 선함을 주장하던 선지자들이 가짜인 것이 분명해지기 시작하자 미디어는 일제 식민지와 군사독재 시절부터 연마한 '무적 변신공'을 극성으로 끌어올리며 이번에는 '황우석교'의 사악함을 알리는 데 전력투구한다. 어느 광고의 카피를 흉내 낸 '미디어의 변신은 무죄'라는 그 뻔뻔한 얼굴로 섬뜩한 미소를 짓고 있다.
일본을 연파하자 야구 경기는 스포츠라는 애초의 의미는 사라지고 언론은 '극일'이라는 데 초점을 맞추어 선량한 백성의 말초를 자극하기에 혈안이 된다. 야스쿠니 신사를 참배한 고이즈미며 보수우경화하는 일본의 선택을 거품 물며 비난하던 미디어가 꼭 같은 꼴불견을 그대로 답습한다. 국민의 열광과 환희 뒤로 몰래 숨어든 빗나간 애국주의는 전체주의의 유령이 휩쓸던 나치의 거리를 재현하는 수준에 가깝다.
혹자는 야구경기에 심취하고 승리에 열광하는 것에 뭔 '안티'냐고 기자를 욕할지 모르겠다. 물론 기자도 우리의 드림팀을 열렬히 응원하고 이기기를 간절히 기도했다. 그것은 당연한 감정의 발로다. 그러나 일개 야구경기에 국민을 월드컵 경기장으로, 서울역 특설무대로 불러내야 할 만큼 대단한 것인지는 별개의 것이다. 아무리 변명하고 스스로 위안을 삼으려 해도 그 광장에 모인 사람들의 심리 밑바닥에는 오직 승리에 대한 염원과, 나아가 절대 져서는 안 된다는 집착만이 그들을 지배한다.
그렇지 않고 그저 즐기기 위한 자리라고? 그렇지 않다. 솔직해지자. 또한 그 승리에 대한 갈증과 집착이 개인의 범주에서는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는다. 문제는 인간의 자연적인 감정의 지배를 집단화하면서 쇼비니즘의 벼랑으로 꾀어내 상업적으로 이용하다 가차 없이 내던져 버리는 미디어의 음흉한 마수가 우리를 지배하고 있다는 데에 있다.
황우석교의 미신에 진실의 칼날을 댄 MBC 피디수첩의 보도 이후 아직 몽매에서 벗어나지 못한 우리는 MBC 광고불매운동으로 순교의 성지를 만들었고 가혹한 비판으로 보도의 당사자들을 세기의 죄인으로 만드는데 조금도 가책하지 않았다. 그 죽음의 성지에서 겨우 탈출하여 명예회복을 한 MBC가 이번에는 스스로 정신 나간 망나니짓을 서슴지 않는다.
법적 분쟁을 불러올 수도 있는 동시중계를 강행하면서(중계권은 케이블 채널 엑스포츠의 모회사인 IB스포츠가 사들여 KBS에 재판매하고 이를 다시 SBS 등이 중계권을 양도받는 형식이었으므로 KBS는 반대하였음) 전파를 낭비하는가 하면(이는 SBS도 마찬가지다), 서울역 광장과 각 지역의 월드컵 경기장에 시민을 불러 모아 극일 감정을 부추기는 이벤트를 개최하였다. 이런 꼴사나운 장면은 방송 3사 모두 비난받아 마땅하다. 이것이 상업적 쇼비니즘, 징고이즘이 아니고 무엇인가.
이것이 자집단을 절대화하면서 타집단을 공포와 시기심으로 대하게 하는 원시감정을, 매스컴과 결부된 선전과 교육을 동원하여 대내적 억압과 대외적 침략을 위하여 사용되는 쇼비니즘의 전형이 아니고 무엇인가.
거기에 동원된 선량한 시민들은 스포츠 경기의 관람이라는 애초의 선의에서 자기도 모르는 사이 타도 일본의 사악한 격정에 사로잡히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쇼비니즘, 위장된 내셔널리즘은 비단 방송뿐만이 아니라 모든 언론이 보이는 공통의 보도행태였다.
신화가 깨어지고 환상이 걷히자 이번에는 '너무나 잘 싸운 선수들', '누구도 부인 못 할 6승 1패의 최강자', '잘못된 대진방식의 희생양' 등등 온갖 의미로 덧칠한 기사들을 양산하면서 예의 그 변신을 시도한다.
전혀 틀린 말은 아니다. 다만 스포츠 경기의 진정한 모습보다는 국가 간의 대항에 초점을 맞추고 결과 하나에 과도한 의미를 부여하면서 강토를 횡행하던 미디어의 광풍에 기가 질리는 것이다. 경기가 끝난 지금, 우리의 냄비 근성을 가지고 기사를 생산하는 언론의 발 빠른 변신에 혀를 내두르지 않을 수 없다.
병역혜택이라고? 미디어가 만들어내는 내셔널리즘의 재앙 속에서 모든 국가대표는 이미 전사(군인)이다. 그것도 전쟁의 최전방에서 매일 전투를 벌여야 하는 야전군이다. 어제는 미국과 싸우고 오늘은 일본과 세 번째 전투를 치른 "고단한 병사들이여, 수고했어!" 전화 한 통으로 위무하고 말면 그만인 것이 이 땅의 미디어다. 강제 동원된 예비군 훈련장에서 낙담하여 돌아가는 시민들은 이제 미디어에 더 필요치 않다. 휴전이 선포되었기 때문이다.
어떤 종목이든 다시 전쟁이 선포되면, 그것도 일본이라는 돈 냄새 풍기는 적과의 조우라면 미디어는 다시 호외를 뿌리고 격정적인 문구와 영상으로 우리를 전쟁의 한복판으로 몰아세울 것이다. 국민이여 단결하라. 이 글을 쓰고 있는 지금에도 브라운관에서는 '동해물과 백두산이~'를 록으로 외치는 광고의 붉은 함성이 귓전을 때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