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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山)은 한자어이지만 순수한 우리 토박이말처럼 들린다. 산을 이루고 있는 흙이나 바위, 혹은 풀과 나무와 새와 꽃들이 모두 하나같이 토박이말이어서 그럴까? 그보다는 산의 순수하고 넉넉한 품성 때문이리라. 산은 인간이 타락하기 이전의 삶의 원형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다. 물질주의의가 팽배하면서 우리가 잃어버린 것들을 산에 가면 만날 수 있다. 그래서인지 사람들은 세속의 때를 벗기 위해 산을 오르기도 한다.

옛사람들에게 산은 생활의 공간이었다

우리나라의 모든 산은 옛 삶 속에서는 생활의 공간이었다고 내게 말해준 사람이 있었다. 그의 이름을 떠올리면 어김없이 지리산이 함께 떠오른다. 그의 말을 빌리면, '산의 모든 길은 등산로가 아니라 일상생활의 길이었다. 마을들이 산자락에 붙어 생겨나고 생필품과 에너지가 나무로부터 나오던 시절, 대부분의 사람들은 산을 오르내리는 것이 일상이었다. 그리고 두 다리만이 유일한 교통수단이었던 민초들에게는 마을과 마을, 지역과 지역을 연결하는 가장 가까운 일상의 교통로가 바로 산길이었다.'

시인 박두규(50세). 그는 나를 형이라고 부른다. 그러면 나는 그를 산이라고 부르고 싶어진다. 산을 찾는 마음으로 그를 찾아갈 때도 있다. 그에게서 그리운 산 냄새가 나기 때문이다. 산을 닮은 그가 <지리산-고라니에게 길을 묻다>(삶이 보이는 창)를 펴냈다.

다정한 귓속말로 소곤소곤 들려주던 것들이 활자화 되어 한 권의 책으로 묶어진 것이 참 반갑다. 그의 가슴에 켜켜이 쌓인 지리산 이야기는 혼자서만 전해 듣기에는 너무도 소중한 우리 모두의 자산이기 때문이다. 그는 책 서문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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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은 옛 사람들의 삶터였고 생활의 현장이었고 일상의 길이었다. 그리고 생활 속에서 자연스럽게 산의 품성을 배우며 자랐다. 조급하지 않으며 숱한 생명들이 조화를 이루고 서로를 위해 존재하는, 그 자비의 품성으로 서로 나누고 모든 생명을 모시며 함께 살았었다.

하지만 현대문명의 발달로 사람들은 산에서 내려오기 시작했고 자동차와 함께 속도문화가 일반화되면서 산은 사람들로부터 버림받았다. 속도의 걸림돌이 되어 파괴되었고 구경거리가 되어 짓밟혔으며 오히려 산을 내려와야만 삶이 풍요로워지는 현대문명의 구조 속에서 사람들은 본래의 품성을 잃어갔다.'

지난 해 여름이던가? 며칠 째 전화가 불통이었다. 나중에야 통화가 되어 물어보니 이돈기(42세) 사진작가와 함께 사나흘 지리산에 있었다고 했다. 그때 책 발간에 관한 이야기를 얼핏 들었던 것 같다. 순천의 한 시민단체인 (사)전남동부지역사회연구소가 기획하여 지리산을 소재로 한 포토포엠 에세이 형태의 책을 내게 되는데, 박 시인은 개인적으로도 지리산에 관한 이야기들을 정리하고 싶었던 터라 쾌히 응했다고 했다. 그는 왜 지리산을 가슴에 품고 살아온 것일까? 역시 책 서문에 실린 다음 글에서 그의 속내를 엿볼 수 있다.

"지리산은 한국전쟁을 겪으면서 애달프고 서러운 목숨들의 역사를 안게 되었다. 지금도 수많은 백골들이 녹슨 총열들과 함께 묻혀 있고 아녀자와 어린아이들의 처절한 울음소리가 묻혀 있는 산이다. 역사를 바르게 사는 일이 현실 속에서는 얼마나 많은 피를 흘리는 일이며, 생명들의 삶과 평화를 헌납해야 하는 일인가. 지리산은 그 모든 답을 알고 있을 것이다. 언제나 말이 없으나 늘 푸른 대답을 스스로 보내오는 지리산, 그 모든 것을 품어 내고 삭여내어 새살을 만들어내는 지리산, 바로 생명의 산이며 우리가 찾아야할 산이다."

산은 늘 푸른 대답을 먼저 보내온다

책장을 넘기다보면 유난히 그리움이라는 단어가 자주 눈에 띈다. 그것은 '산에 두고 내려온 우리 본연의 품성에 대한 그리움이고, 아름다운 생명에 대한 그리움'이다. 시인은 '이 그리움의 마음'을 '자비의 품성'과 동일한 것으로 인식하고 있는 듯하다. 그는 '그 자비의 품성을 일상 속에서 회복해야 한다. 그래서 지리산을 이야기해야 한다'고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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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 시인의 지리산과 고향 이야기는 이돈기 사진작가의 서정성 짙은 빼어난 사진들과 함께 모두 5부로 꾸며져 있다. 그런데 글과 사진이 딱 맞아 떨어지는 것은 아니다. 글은 글대로 흐르고 사진은 사진대로 간다. 사진이 글의 들러리가 되거나 글이 사진의 설명이 되지 않고 제 길을 갈 뿐이다. 마치 지리산 산자락을 끼고 유유히 섬진강이 흘러가듯이. 그런 부조화의 조화 속에서 제 1부 '푸른 대답'은 이렇게 시작된다.

'몰락한 백제 시절이나 아니 그보다 훨씬 이전부터
추쇄꾼들을 피해 고향과 사람들을 등지고 지리산으로 들어온 사람들이 있었다.
그들은 자신의 깊은 어둠을 산에 풀었고 산은 그들의 어둠을 품어주었다.
스스로 고립된 만큼의 세월이 지리산의 그리움이 되었다.
그리움은 해마다 수수꽃다리며 때죽나무 같은 꽃으로 무리지어 피어났다.'

'지리산에 들어온 사람들이 깊은 어둠을 산에 풀고 산은 그들의 어둠을 품어주었'기 때문일까? 이돈기 사진작가의 사진을 가만 들여다보면 아무리 밝은 햇살 속에도 어둠이 스며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아주 오래된 어둠이랄까. 그것이 오랫동안 어둠을 응시해온 시인의 마음을 읽어낸 사진작가의 눈빛처럼 느껴진다. 그리고 누구라도 그런 경험을 한 적이 있겠지만, 어둠을 오래 응시하면 환한 길이 열리기도 하는 법이다.

'주변이 어두워져도 산길은 좀처럼 지워지지 않는다.
저물어가는 산들의 어둠 사이로 길 하나가 질기게 살아남는다.
저렇듯 홀로 빛나는 것에는 언제나 슬픔이 묻어 있다.
계절의 경계에 까지 이르러 늦도록 꽃을 피우는 구절초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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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2부에는 '그 옛날, 세상을 등질 수밖에 없었던 사람들'이 드나들었을 문수골 이야기나, 칠불사가 된 칠불암 이야기며, '쌍계사 등 뒤로 사람들의 발길이 없는 내원골을 한참 오르다보면' 보이는 '서너 채 빈집'에 대한 이야기도 나온다.

언젠가 저 산을 품어야 하리

그곳에 살았던 '처사는 수년째 마당의 감꽃을 피우며 한 소식 기다리더니 어느 겨울머리에 나섰나 사립문조차 무너져 있다' 하지만 '부엌문을 열면 낡은 찬장에 아직도 가지런히 놓여 있는 숟가락과 젓가락이 슬프다. 먼지 수북한 망태기며 호미도 그렇지만 방구들에까지 올라온 잡초들의 인정머리가 또한 그러하다' 그야말로 그리움의 흔적들이다. 그 아련한 흔적이 이름에 그대로 남아 있는 것들도 있다.

'장터목은 장이 서던 곳이다. 지리산 전체가 삼도를 잇는 길이었던 시절, 잠시 쉬던 장꾼들이 모여 서로의 물건을 주고받았을 것이다. 지금은 쉽게 범접할 수 없는 높은 산이 되어 하루를 쉬어가라 하지만 예나 지금이나 장터목은 장터목일 뿐이다. 우리의 생각과 우리의 다리가 굳어졌을 뿐 장터목은 지금도 장이 서고 싶다.'

오래 전 그와 지리산에 간 적이 있었다. 전날 폭설이 내려 눈이 무릎까지 푹푹 빠졌다. 그는 선두에 서서 눈을 치우며 길을 냈고 우리는 그가 내준 길을 따라 눈꽃 구경을 하면서 희희낙락 산을 올랐다. 그곳이 바로 '노고단 뒷자락에 있는 하늘 아래 첫 동네라는 심원마을'이다. 지금은 횟집에 노래방까지 들어서 있지만, 예전엔 집이 서너 채밖에 없었다고 한다. 시인은 그 가난하고 아름다웠던 시절을 이렇게 회고한다.

'하룻밤을 청하면 자연스럽게 민박이 되었는데 돈 받는 걸 어색해하며 미안해했다. 그래서 심원에서 자려면 미역이며 말린 홍합, 새우 등, 산중에서 쉽게 얻을 수 없는 것들을 바리바리 싸서 가져가곤 했다 그 집엔 마흔이 가까운 좀 부족한 듯한 아들이 있었다. 우리가 가면 군불을 듬뿍 때고 꼭 우리방에 와서 잤는데 사람이 그리웠는지 수염이 거친 얼굴을 내 볼에 비비며 잠들곤 했다. 그 노총각 어린이 창식이를 위해 사탕 한 봉지도 꼭 배낭에 들어 있었다.'

제 3부에는 산과 나무와 청설모에 대한 이야기가 나온다. 시인은 산에 가서 비를 만나 어디에도 비를 피할 데가 없음을 알게 되는 순간 '비를 피하는 나무는 하나도 없다'는 새삼스러운 사실을 깨닫는다. '나무는 그 엄청난 폭우를 밤새 온몸으로 받아내며 꼼짝도 하지 않는다'는 것도.

무심히 넘길 수도 있는 당연한 자연현상이지만 시인은 이를 자신을 돌아보는 기회로 삼는다. 그런 뼈아픈 자기성찰을 통해 다음과 같은 사실을 체득하기에 이른다.

'산의 자랑은 높은 해발의 고도가 아니라 숲이 거느리는 생명의 밀도다. 나무의 이파리들과 바람, 햇살과 고라니의 눈빛, 흰점나비와 원추리의 향기,
그 뭇 생명들이 하나로 어우러져 거대한 산의 생명을 이룬다. 주목 나무 한 그루가 산이며 청설모 한 마리, 노란망태버섯 하나가 모두 스스로 산이다. 천년 묵은 어둠 하나씩 내장한 헤아릴 수없이 깊은 것들이다.'

아직도 흐르지 못한 세월이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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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은 제 4부로 넘어가면서 동족상잔의 비극인 한국동란을 전후한 우리 현대사의 아픈 숨결이 진하게 느껴진다. 그 아픔이 주말만 되면 산을 찾아 홀가분하게 떠나기를 좋아하는 그를 일거리가 만만치 않은 여순사건순천시민연대 사무총장 일을 맡도록 붙잡았는지도 모를 일이다.

'그 시절, 해방된 조국을 그들에게 뺏기지 않으려고 싸웠던 사람들은 모두 수배자가 되어 지리산으로 들어와 파르티잔이 되었고 빨치산이라는 이름으로 불러졌다. 그리고 한국전쟁이 터지자 또 인민군들과 좌익세력들이 퇴각하며 들어와 합류하였다. 그들만이 아니었다. 마을에서 견딜 수 없어 올라온 노인도, 어린 조카도, 남편을 찾아 올라온 아내도, 아내 등에 업힌 간난아이도, 산에 발을 딛는 순간부터 모두가 빨치산이 되었다.'

그에게 빨치산은 사상과 이념의 문제가 아닌 듯하다. 그것은 천하와도 바꿀 수 없는 한 사람의 소중한 생명의 문제요, 우리 인류가 영원히 일구어 가야할 진실과 평화에 대한 희구로 읽혀진다. 그에게 빨치산은 당시 치열했던 좌우대립과는 거리가 먼 순박한 마을 노인이요, 남편을 찾아 올라온 아낙이요, 그 아낙의 등에 업힌 간난 아이일 뿐이다. 모두가 그들을 버렸을 때 끝까지 그들을 품어준 지리산처럼 그도 그러고 싶었으리라.

스스로 고향이 되어야 하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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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 제 5부는 고향 이야기다. 시인은 '이승의 남은 세월 데리고 살 고향 하나 키우고 싶다'고 말한다. 하지만 '살구꽃 날리는 집 하나 짓고 내가 그런 고향이고 싶'은 것도 욕심이지 않을까 자꾸만 마음이 쓰인다. 참 욕심도 없는 사람이다. 그의 고향이야기도 별 것도 아닌, 그저 그런 소소한 이야기들이다.

어쩌면 그는 그런 작고 보잘것없는 것들이 주인노릇을 하는 그런 세상을 꿈꾸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 주인공 중의 하나인 '옥님이 누나는 빠마머리하는 기술이 있어서 나중에 신작로가에 뽕나무 미장원이라는 간판을 달았고', '순단이는 우리가 순사 도둑놈 잡기를 하며 노는 밤에도 갓난아이를 업고 혼자서 밤하늘의 별을 잘도 헤었다.' 시인도 가끔 도시에서 별을 헤아려보지만 순단이의 별에는 이르지 못한다.

고향을 떠나 내가 헤아린 별은
아직도 순단이의 별에 이르지 못했다.
도시의 그늘을 찾아 몸을 숨긴 순단이
스스로 나무되어 그늘이라도 얻었을까.
순단이가 없는 고향, 지금쯤 뻐국새 안 울겠네.
탱자나무 하얀 꽃잎들 바람에 안 날리겠네.

쓰다보니 글이 좀 길어진 것 같다. 하지만 아직도 소개하지 못한 글이 있어서 못내 섭섭하기만 하다. 이것도 하나의 욕심일 터. 박 시인의 진솔한 속내와 사람의 깊이가 느껴지는 다음 글을 소개하는 것으로 부족한 글을 마감할까 한다. 그도 이 한 편의 글로 지리산과 고향 이야기를 마감하고 있다.

지금껏, 아이들 가르치는 일도
전교조 연가투쟁으로 여의도에서 노숙하는 것도
고향 찾아가는 길이라고 생각했다.
여순사건 진혼시를 쓰는 것도
사회단체에서 이런저런 일 하는 것도
복사꽃 날리는 고향 언덕을 넘는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다른 생각하면
그저 먹고 사는 일에 불과했다. 그렇게
세상 일이 한순간에 먹고사는 일에 불과해질 때
나는 내 안에 처참하게 죽어 있는
고향의 주검을 다시 한 번 뒤집어 본다.
자살인지 타살인지 확인해보고 싶은 것이다.
어질어질한 아침 출근길이
고향 가는 길인지,
그저 먹고사는 일에 불과한 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