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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의 모토는 '모든 시민은 기자다'입니다. 시민 개인의 일상을 소재로 한 '사는 이야기'도 뉴스로 싣고 있습니다. 당신의 살아가는 이야기가 오마이뉴스에 오면 뉴스가 됩니다. 당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6살 때 중국으로 건너갔다는 문규환 할아버지
6살 때 중국으로 건너갔다는 문규환 할아버지 ⓒ 양중모
집으로 돌아가는 전철 안에서 문 할아버지를 다시 만났습니다. 아까 태도가 무례했던 것도 같고, 길가는 사람한테 물어볼 정도면 얼마나 답답하실까 싶어 다시 말을 걸어보았습니다.

"구하시던 거 구하셨어요?"
"아, 그거요. 못 구했어요. 없대요. 사실 가르쳐주는 선생님이 있으면 더 좋겠는데, 구할 수 없으니… 일단 큰 서점 가면 도본이 있다는데 거기라도 한 번 가봐야죠. 어떻게 구할 수 없겠어요?"

부끄럽지만 학창 시절에 시험 때문에 국악 관련 공부를 조금 했을 뿐인 제가 알 리 없었습니다. 그래도 도와드리고 싶은 마음에 문 할아버지를 따라나서 보려 했지만 선약이 있어 중간에 헤어져야 했습니다.

그렇게 헤어지기는 아쉬움이 남아 명함을 드리고 할아버지의 연락처를 받았습니다. 비록 저 혼자 힘으로 돕지 못하더라도 할아버지 얘기를 글로 쓰면 누군가는 도와줄 수 있지 않을까 싶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드디어 할아버지를 만나러 갔습니다. 할아버지랑 제대로 얘기도 나누어 보지 않고 혹시 이런 부분에 대해 도와주실 수 있나요? 하고 다른 사람에 물어볼 수는 없으니 말입니다.

처음 장구에서 시작한 얘기는 할아버지가 6살 때 중국으로 건너가 황무지를 개척한 얘기며, 어떻게 마을을 이루고 살았는지에 대한 이야기까지 이어졌습니다. 악기에 관련된 부분을 묻고 싶은데 자꾸 이야기가 다른 곳으로 빠지는 것 같아 마음은 초조했지만 할아버지 이야기를 가만히 듣고 있다 보니 가슴 속 한 켠이 아려왔습니다.

"그때는 만주로 가라고 선전을 했지. 땅도 있고 살기가 낫다고 일본군이 그랬다는 거야. 그래서 거기에 갔다는데 그 땅이 어떤 거냐면 전부 황무지였던 거지. 그래도 그걸 갖고 열심히 해서 농토로 만들고 그랬어. 그래서 수확하고 나면 원래 땅주인인 중국인에게 한 20% 정도 주었지. 그것까지는 괜찮았는데, 일본군들이 자꾸 와서 자기네들도 달라는 거야. 천이랑 바꾸어준다고는 했는데 암튼 무지 괴롭혔어."

할아버지는 게이트볼을 좋아해 중국에서 관련 잡지를 가져오기까지 했다. 그러나 지금은 자신이 직접 가서 말해주어야 하기에 노인대학에서 장구를 배우고 있다고 한다.
할아버지는 게이트볼을 좋아해 중국에서 관련 잡지를 가져오기까지 했다. 그러나 지금은 자신이 직접 가서 말해주어야 하기에 노인대학에서 장구를 배우고 있다고 한다. ⓒ 양중모
할아버지가 '중국으로 떠난 건 6살 때였다'고 합니다. 일제시대였던 당시에는 '고향에 살아도 먹고 살기 힘들어 중국으로 가면 나을까 싶어 떠났다'고 합니다. 이미 일제가 우리 땅에서 물러간 지 반세기가 넘었는데 여전히 그 상처를 안고 사는 사람이 있구나 싶어 마음 한 편이 쓸쓸해졌습니다.

"문화교류를 하면 좋겠지만 힘들어"

할아버지가 살아온 얘기를 듣는 동안에도 제 머릿속은 '어떻게 도와드려야 할까?'라는 질문이 계속 맴돌고 있었습니다. 그러다 할아버지가 이런 얘기를 들려주면서, 제 머릿속에 있던 한 가지 방법이 1순위로 떠올랐습니다.

"할아버지 문화 교류를 하면 어떨까요? 여기서 몇 명이 가고 거기서 몇 명이 왔다 갔다 하는…."

제가 다소 힘들 것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이런 생각을 하게 된 건 할아버지가 들려주는 그 땅의 현실 때문이었습니다.

"뭐, 여기도 그렇다고 하지만 우리도 이제 마을에서 젊은 사람을 찾아볼 수가 없어. 다 중국 대도시나 한국, 일본 뭐 이런 데로 돈 벌러 떠났지. 그런데 이 사람들이 돈 벌러 다니면서 자기 자식들을 우리에게 맡기고 가거든. 공부 좀 시켜달라고. 그래서 이제는 또 이 손자들이 작은 마을이 아니라 큰 마을에 있는 학교로 가면 할아버지, 할머니들도 따라가서 뒷바라지하는 거야. 그러다 보니까 원래 살던 마을에서 노인들조차 점점 사라지는 거지.

원래 우리는 한민족이다 하면서 모여 살면서 중국 사람들한테 땅 안주고 그랬는데 젊은이도 없고 노인들도 빠져나가다 보니 이제는 중국인들에게 땅을 주어서 얼마씩 받고 부치라고 하지 뭐."

그 이야기를 들으면서 가끔씩 나오는 '만주땅도 우리 땅이다'라는 말, 심지어 한 때 정치권에서 나왔던 '간도를 회복해야 한다'는 그런 말들이 얼마나 허황된 구호인가를 뼈저리게 느꼈습니다.

한민족들이 모여 살던 곳이 급격히 해체되고 있는 데다가 예전처럼 농민으로서 살지 않고 기술을 배워 중국 각지, 세계 각지로 퍼져 나가고 있는데 과연 그런 일이 실현 가능할지조차 의문스러웠습니다.

그렇게 퍼져 나가 살다 보면 자연스레 저절로 융화될 것이고 특히 중국에 사는 한민족의 경우 더 쉽게 섞일 텐데 '옛날에 간도가 우리 땅이고 어쩌니' 하는 소리를 해봐야 무슨 소용이 있을까 싶었습니다.

그렇게 이목을 끄는 이벤트성 발언보다 점점 우리 것을 잃어가고 있는, 중국에 살고 있는 우리 동포들에게 우리 문화를 잊지 않게 전해주는 문화 교류 등을 더 활성화시킬 방안을 모색해야 하지 않을까 싶었습니다. 그러나 문 할아버지와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당장은 이것이 불가능할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일단 여기까지 올 만한 경제력들이 별로 없어요. 여기 구청이나 시청에서 초청 형식으로 해서 잠자리나 먹을 거 어떻게 해결해주면 모를까."

지금 우리 경제도 안 좋다고 난리인데 하긴 우리 쪽에서 다 부담해야 하는 문화 교류라면 꽤 힘들겠구나 싶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게다가 성사된다 하더라도 준비 기간이 짧지는 않을 테니 그리 쉽게 생각할 일이 아니었습니다. 그렇다면 두 명 정도만이라도 왕래하는 길을 터놓으면 어떨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것이 할아버지를 돕기 위한 두 번째 방안이었습니다.

"악기를 가르쳐줄 자원봉사자가 있었으면..."

"글쎄, 그러려면 오시는 분이 자원봉사하는 마음으로 오셔야 할 텐데. 우리는 먹고 자는 건 다 책임질 수 있어요. 그런데 비행기 값까지는 못해 주거든."

장구 대신 빈 손이나 휴지 상자로 가끔 연습한다고 한다.
장구 대신 빈 손이나 휴지 상자로 가끔 연습한다고 한다. ⓒ 양중모
국악기를 다룰 줄 아는 사람이 그곳에 가 한 2주만이라도 가르쳐주고 오면 큰 도움이 될 것 같았기에 그런 제안을 해보았습니다. 할아버지도 괜찮은 생각이라며 동의했지만 돈도 아닌, 사람이 직접 가야 하는 일이기에 이 역시 그리 수월해 보이지 않았습니다.

게다가 비행기 삯을 자비로 부담해야 하고 중국에 가서도 숙박 시설이 아닌, 거기 사시는 분 중 한 명의 집에서 숙식을 해결해야 하는 것이니 문 할아버지 말처럼 자원봉사 하겠다는 마음가짐이 아니면 어지간해서는 해내지 못할 듯했습니다.

"부채춤 출 만큼 부채라도 생겼으면..."

"이도 저도 다 힘들면 악기만이라도 어떻게 좀 구할 수 있게 도와주었으면 좋겠는데."

할아버지가 있는 '노인회관에는 총 130명 정도의 어르신들이 있다'고 합니다. 얼마 전 우연히 알게 된 한 독지가의 도움으로 장구, 북, 꽹과리 등 몇몇 악기를 하나씩 사서 보내긴 했지만 130명이나 되는 어르신들 수에 비해서는 턱없이 부족한 숫자라고 합니다.

"이 정도 가지고는 무대에 설 수가 없거든(명절 때 마을별로 대결 형식으로 벌어지는 것을 가리키는 것이라고 합니다. 중국인들은 중국 악기를 가지고 한민족은 우리 악기를 가지고 나와 대결한다고 합니다) 하물며 부채춤만 해도 최소 10명이 있어야 하지.

그러면 부채가 적어도 10개가 필요하다는 거잖아. 근데 내가 나가서 살펴보니까 싼 게 1만2000원 정도고 좋은 거 4, 5만원씩 하더라구. 싸게 사도 10개면 10만 원인데 여기서는 크지 않을지 몰라도 우린 적지 않은 돈이거든. 게다가 다른 국악기도 사야 하니."

도와드릴 방법이 없을까요?

여기까지 오자 저도 할아버지도 더는 할 말이 없어졌습니다. 저로서도 어떻게 도울 방법이 마땅히 떠오르지 않았고 돈 문제는 민감한 부분인 데다가 다른 사람에게 쉽게 꺼낼 수 있는 부분도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 하더라도 적어도 한 가지만은 확실히 하기로 굳게 마음을 먹었습니다. 제 능력이 안된다면 이 글을 읽는 누군가 중에는 보다 나은 방법으로 도와주실 분이 있을 것이라 믿고 글이라도 열심히 쓰기로 말입니다. 그래서 이 글을 보시는 독자분들께 시민기자들 분께 부탁드리고 싶습니다. 보다 괜찮으면서도 실질적으로 도움을 줄 수 있는 방법이 없을까요?

덧붙이는 글 | 대학교 시절 농활을 가듯 여유가 된다면 대학교 풍물패 동아리에서 이곳으로 가는 건 어떨까 하는 생각도 해보았습니다. 상모 돌리는 법이나 다른 국악기 다루는 법도 가르쳐줄 분이 없다고 하시니 대학교 풍물패라면 사회 경험 삼아 가도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한 달 정도 있다가 중국으로 돌아가신다고 하네요. 혹시 그전에 도움을 주실 분 있다면 제게 쪽지 보내주시면 할아버지의 연락처를 알려드리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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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을 넓게 보고 싶어 시민기자 활동 하고 있습니다. 영화와 여행 책 등에 많은 관심을 갖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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