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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장을 본다고 다녀온 아내가 바나나 한 송이를 사가지고 왔다. 다른 과일은 가격이 비싸서 가장 저렴한 바나나를 사가지고 왔다는 것이다. 그러고 보니 가격표에 3천원이라는 글자가 선명한 것에 비하여 그 크기는 정말 푸짐하다. 왜 하필 수입 바나나를 사왔냐고 한 마디 했더니 아내는 "싸니까?"라고 항변한다. 싸니까 산다, 단지 가격이 저렴하기 때문에 바나나를 구입해야 하는 것일까? 그래서 나는 아내에게 바나나에는 가격 이외에 고려해야 할 것이 있다는 사실을 알리기 위해 이 글을 쓰게 되었다.
오래 전, 고급 과일이었던 바나나가 지금은 서민들이 먹는 가장 대표적인 과일이 돼버렸다. 그만큼 대표적인 수입 농산물 중 하나가 바로 바나나다.
한때 바나나를 먹어본 경험만으로도 자랑이 되던 시대가 있었다. 나 역시 바나나에 대한 추억이 있는데, 때는 70년대였다. 하와이 건설노동자로 나갔다가 귀국한 삼촌이 바나나를 가져왔던 것이다. 그래서 난생 처음 바나나라는 값비싼 수입 과일을 먹어볼 기회가 나에게도 생겼다.
부드러운 속살에 달콤함, 그리고 은은하게 퍼지는 바나나 향은 시골 촌놈에게 강한 인상을 남겼음은 당연한 일이다. 그 후로 오랜 시간 동안 진짜 바나나를 먹지 못했는데 다행히 슈퍼에는 바나나 맛이 나는 과자가 있어 바나나가 먹고 싶을 때마다 과자로 만족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시간은 흘러 어느새 바나나는 필리핀에서는 너무나 먼 지리산 산골 구례에서도 가장 저렴한 과일이 되었다. 그동안 도대체 무슨 일이 벌어진 것일까? 바나나 가격이 저렴해진 이유 중에 하나를 알 수 있는 것이 고등학교 지리 교과서에 있다.
단작, 외래종, 연작이 합쳐질 때
바로 플랜테이션 농업이다. 지리 선생님은 플랜테이션 농업에 대해 당시 이렇게 설명했다. "플랜테이션 농업은 다국적 기업이 자본과 기술을 제공하고 현지의 값싸고 풍부한 노동력을 이용해서 단일경작(單一耕作)을 하는 기업적인 농업 경영"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아니, 이 말에 무슨 문제가 있는 것일까? 또한 바나나와는 무슨 관련이 있는가?
바나나는 플랜테이션 농업의 대표적인 농산물이다. 우리가 먹는 대부분의 바나나는 필리핀에서 생산된다. 필리핀에서 바나나의 주요 산지는 민다나오 섬인데 이곳은 과거에는 옥수수와 쌀이 생산되었던 곳이다. 즉 식량이 생산되었던 곳이다. 그러나 농산물 다국적 기업에 의하여 일본을 겨냥한 바나나 생산지로 변하였다.
1960년대 후반부터 외국자본과 필리핀 정부, 현지 지주들의 힘으로 광대한 농장이 만들어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플랜테이션의 장점인, 그 지역의 풍부한(?) 노동력을 이용하여 저임금과 열악한 환경에서 농사를 짓도록 강요했다. 식량을 키우던 곳에 바나나를 키우게 함으로써, 돈이 없으면 생존을 할 수 없게 된 사람들은 바나나 농장에서 어쩔 수 없이 일하게 된 것은 자명한 수순이다.
앞서 말한 것처럼 플랜테이션 농업은 단작(單作)을 한다. 단작이라는 것은 단일 작물을 한 곳에서 집중적으로 재배한다는 것인데, 농업에서 단작은 곧 병충해에 취약함을 뜻하기도 한다. 그 이유는 간단하다. 바나나를 좋아하는 바이러스나 벌레가 엄습했다고 가정했을 때 주변에 단일 작물은 그들의 쉬운 공격 대상이 되기 때문이다. 또한 한 작물을 지속적으로 심게 되면 연작장애가 일어나 병충해에 약하게 된다.
또한 필리핀 토종 바나나는 크기가 작은 바나나였다고 한다. 하지만 우리가 먹는 것은 큼지막한 바나나다. 즉 우리가 먹는 바나나는 필리핀 사람들에게는 외래종인 것이다. 외래종 바나나를 심다 보니 토착 기후에 취약하다.
그래서 단작, 외래종, 연작까지 겹치니 다량의 농약 사용이 불가피하다. 또한 수출을 위하여 미끈하게 벌레자국 하나 없이 키워야 하므로 많은 농약을 사용하는 것은 불가피하다. 바나나 경작지는 비행기로 엄청난 양의 농약을 살포하여 재배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결국 필리핀 농부들은 농산물 다국적 기업에 종속되어 비행기로 뿌려지는 다량의 농약을 뒤집어쓰고 농사를 짓게 되는 것이다.
필리핀 노동자의 열악한 노동조건
또한 값싼 바나나의 이면에는 필리핀 노동자의 열악한 노동조건이 있다. 이들의 하루 일당은 1.1달러 수준이라고 한다. 그 돈으로 그들은 농약으로 오염된 몸을 치료한다. 가족의 생계를 이어가기에 턱없이 부족한 돈이다. 그들의 저임금이 있었기에 3천원만 주면 푸짐한 바나나가 우리 식탁에 올라오는 것이다.
더구나 자연상태에서 바나나는 사과나 배보다 쉽게 상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어찌된 영문인지 시장에서 판매하는 바나나는 국내산 과일보다 더욱 싱싱하다. 자연에서 이런 일은 불가능하다. 결국은 많은 방부제와 살충, 살균을 위한 농약이 살포되었음을 알 수 있다.
알려진 농약으로는 '데민'이라는 농약이 있는데, 이것은 골프장에도 뿌려지는 농약이다. 바나나가 우리 손에 껍질이 벗겨지기까지 이러한 역사와 과정이 있었던 것이다.
우리 나라에서 바나나가 갑자기 저렴해지기 시작한 것은 1991년이다. 수입개방에 의하여 바나나가 대량 수입되었기 때문인데 이로 인해 바나나는 저렴한 수입 과일의 대명사가 되었다.
'페어트레이드'가 필요하다
그럼 필리핀 농민들은 바나나가 많이 팔리길 원할까? 그들은 결코 그런 바나나 생산에 종사하기를 원하지 않는다. 가까운 일본에서는 필리핀 농민과 연대하여 이른바 '공정한 무역(Fair Trade)'를 통해 정당한 가격을 지불하고 구입하는 시민단체와 매장이 있다.
한 필리핀 농민이 일본에 보낸 한 통의 편지가 계기가 됐다고 한다. 즉, 당신들이 바나나를 구입하기 때문에 우리가 농약과 저임금에 시달리고 있다는 폭로가 있었던 것이다. 그 후 일본에서는 바나나에 대한 인식이 전환되었고, 정당한 가격을 주고 구입하는 '공정한 무역'의 시발점이 되었다.
우리가 먹는 수입산 과일 대부분은 이런 방식으로 재배되는 것들이다. 요즘 많은 양이 수입되고 있는 오렌지의 경우, 주 생산지는 미국의 캘리포니아다. 캘리포니아는 미국에서 가장 많은 농약을 사용하는 곳으로 유명하다. 프랜시스 라페가 쓴 <굶주리는 세계>(창비)에 따르면, 미국은 전세계 농약 사용량 180만 톤 중에서 90만 톤의 농약을 사용하는데, 이중 25%가 캘리포니아에서 사용된다고 한다. 캘리포니아 오렌지를 좋아하는 분들은 꼭 이 사실은 알아두기 바란다.
바나나의 신선함과 싼 값에는 이유가 있다. 그 이유에는 엄청난 농약과 노동력 착취가 있음은 당연한 일이다. 여러분은 단지 바나나를 가격이 싸다는 이유로, 또는 아이들이 좋아한다는 이유로 구매하지만, 당신의 구매가 필리핀 농민 착취의 기반에서 이루어지며, 알게 모르게 다국적 농업 기업들이 그들을 지속적으로 착취하는 데 도움을 준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당신의 구매가 세상을 바꿀 수 있다.
덧붙이는 글 | '페어트레이드'란 발전도상국의 유기·무농약농산물이나 수공예품을 공정한 가격으로 거래하며, 일을 만드는 것부터 기술원조까지 하는 종래의 무역과 대극을 이루는 무역으로, 세계의 NGO들이 중심이 되어 벌이고 있는 풀뿌리 국제경제활동이다. 공정한 가격으로 구매해주기를 원하는 개발도상국 생산자들의 요구를 부응하여 만들어낸 것으로 고용과 경제적 자립과 빈곤 문제를 해결하고자 하는 무역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