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몇주 전 동료기자 한 명이 납치됐다는 소식을 들었다. 그로부터 5일 후 그는 취재차량 운전기사와 함께 무사히 풀려났다.

충격 속에 마음을 졸이던 나는 안도감에 한숨을 돌릴 수 있었다. 결코 유쾌하지 않은 사건이었지만 그가 석방되었다는 소식을 들은 후에는 농담을 할 수 있을 정도로 마음이 편해졌다.

젊은 영국인 기자였던 그는 이라크로 떠나기 전 내게 한 가지 부탁을 했다. 만약 자신이 납치되면 신원 보증인으로 내 이름을 제시해도 되겠냐는 것이었다. 나는 이라크에 영향력을 미치고 있는 아랍계 언론 쪽에는 거의 알려지지 않은 사람이다. 그런 내 이름을 댄다고 해서 무슨 도움이 될지 알 수 없었지만 그러라고 동의해 주었다.

만에 하나 그런 최악의 상황이 발생해 납치조직으로부터 전화를 받는다면 우선 아랍어로 그들을 설득해보리라고 얼핏 생각해 본 적은 있다. 그러나 내 동료가 정말 그런 운명에 놓이리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 이라크가 처해 있는 비참한 현실을 생생하게 알리기 위해 이라크 땅을 밟는 언론인들에게 그런 일은 결코 생겨서는 안 될 터였다.

정녕 동료에게 불상사가 발생한다면 팔레스타인 출신이기도 한 내가 팔레스타인의 이름으로 그들에게 호소하리라 생각도 해보았다. 그것도 소용이 없다면 미국 시민권을 갖고 있는 나와 그 친구를 맞바꾸자고 제안할 생각이었다.

그러나 납치범들로부터 전화는 오지 않았다. 피랍 5일 동안 적어도 한 차례 이상 죽을 고비를 넘기며 힘겨운 상황을 가까스로 헤쳐나가야 했던 내 동료는 납치범들에게 끝내 내 이름을 밝히지 않았다. 설사 그랬더라도 상황을 호전시킬 수 있을지 장담할 수 없는 일이었다.

풀려난 직후 그는 내게 왠지 마음 한 구석이 불편했던 농담을 던졌다. 그는 다시 내게 양해를 구하며 다음 번에 납치당할 일이 있으면 정말로 "내 이름을 넌지시 밝히겠다"고 말했다.

납치됐던 동료는 돌아왔지만 앗와르는 결국...

이라크에 주재하고 있는 언론인의 신변 문제는 이토록 심각하다. 언론인들은 이해관계가 맞물린 서로 다른 조직들의 희생양이 되고 있다.

불만에 찬 군부는 사실을 호도하기 위해, 필사적인 무장조직은 몸값을 노리거나 주목을 끌기 위해, 혼란 뒤에 숨은 무법자들은 오직 혼란을 가중시키고 사태를 악화시키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다. 언론인 납치는 그 한 예다.

'국경없는 기자회'에 따르면 2003년 3월 미국이 이라크를 침공한 후 후속 공격을 벌이며 이라크를 접수한 지금까지 기자와 취재원을 포함해 총 82명이 이라크에서 목숨을 잃었다. 올해 참변을 당한 언론인만 7명에 이른다.

그 7명 가운데 한 기자가 <알 아라비야>의 특파원이었던 앗와르 바흐잣(사진)이다. 그는 젊은 이라크 언론인 가운데에서도 투철한 기자정신을 발휘하던 뛰어난 기자였다.

그의 시신은 다른 두 이라크 언론인 카이룰라흐와 칼리드 무흐무드의 시신과 함께 사마라 부근에서 발견되었다. 무참히 총격을 받아 벌집처럼 되어버린 참혹한 모습이었다. 시아파 성소에 가해진 폭탄테러 사건을 보도한 직후 그를 비롯한 세 기자가 납치당했다. 그는 지난 2월 22일 알 아스카리 시아파 성소에 가해진 폭탄테러 사건과 이후의 파장을 취재하고 있었다.

수니파 아버지와 시아파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난 그는 어려움을 이겨내고 언론인으로 입지를 굳히면서 이라크 사람들의 지지와 관심을 받고 있었다. 기자로 활동했던 기간은 그리 길지 않았지만 그는 이라크에 새로운 여성상을 제시하며 아랍여성에 대한 전통적인 인식을 바꾸어 놓고 있었다. 주변 친구와 동료 그리고 일반 시민들에게도 앗와르 바흐잣은 늘 관심의 대상이었다.

새로운 아랍여성의 마지막 취재는 '폭탄테러의 파장'

그와 관련해 잊혀지지 않는 일이 있다. <알 자지라> 방송의 보도국에서 함께 일했던 우리는 의자 하나 때문에 늘 실랑이를 벌여야 했다.

앗와르는 <알 아라비야> 방송국으로 옮기기 전까지 <알 자지라>에서 일했다. 처음에는 이라크 국내에서 기자로 뛰다가 이후 카타르의 수도 도하에 있는 <알 자지라> 본부 보도국에서 활동했다. 친미 성향의 이라크 정부가 이라크에 소재한 <알 자지라> 방송국을 폐쇄했기 때문이었다.

강압에 따른 이런 변화를 그가 달가워할 리 없었다. 그는 소외되어 있던 평범한 이라크 사람들의 생각을 전달하는 데 온 힘을 기울이고 있었다. 영안실, 거리, 어디든 가리지 않고 그는 달려갔다. 동포들의 고통에서 멀어지게 되자 그의 마음은 편치 않았다.

나는 2005년 7월 <알 자지라>를 떠나기 직전까지 몇 달 동안 보도국에서 일했다. 그것이 앗와르와 내가 만나게 된 계기였다. 방송국 안에서 거의 찾아보기 힘든 여성이 머리에 스카프를 쓰고 앉아 있었다.

앗와르의 존재는 별다를 것 없이 늘 반복되는 보도국의 일상에 활력을 주었다. 그는 지칠 줄 모르고 독점 인터뷰를 따냈다. 구수한 이라크 사투리가 섞인 그의 큰 목소리가 쉴 새 없이 보도국에 울려 퍼졌다. "맞아요" "저런" "이럴 수가" "현장에서 떠나지 말고 잠깐만 있어요" "도울 일은 없나요?" 그가 늘 입에 달고 다니던 말들이었다. 그는 누구보다 인정많은 사람이었다.

각자 맡은 일은 달랐지만 나는 그에게 여러 보도자료를 전달해 주었고 더불어 미국내 반전 운동가들과 지식인들의 이름 및 연락처를 알려 주었다. <알 자지라>가 진보적인 활동가와 지식인들의 목소리를 더 담아내야 한다는 나의 바람 때문이었다.

우리는 손발이 잘 맞았다. 낡은 보도국에 놓여 있던 의자 하나 때문에 문제가 불거지기 전까지는 말이다. 의자 때문에 거의 매일 실랑이를 벌이고 나면 조금은 기분이 언짢아졌다. 다리에 붙은 바퀴 3개 가운데 하나가 빠진 그 낡은 의자를 그는 늘 자기 것이라고 주장했고 그럴 때면 나는 양보해 주었다.

카타르를 떠나기 며칠 전 마지막으로 그를 보았다. 도하에서는 드물게 비가 내리던 오후였다. 내가 방송국을 막 나서고 있을 때 그는 <알 자지라> 방송국 주차장 앞에서 택시를 기다리며 서 있었다. 그는 자동차 안으로 얼굴을 들이밀고 내 아이들에게 애정어린 인사를 건냈다. 아이들은 색감이 예쁘게 들어간 앗와르의 옷을 좋아했다.

"이라크 사람들은 모두 나라를 위해 힘을 모아야 합니다"

부질없는 짓임을 알면서도 요즘도 나는 노력한다. 총탄 공격으로 무참히 죽어간 그의 끔찍한 모습을 그날 그가 보여주었던 밝은 모습으로 바꾸어 보려고.

"당신이 수니파 신도건 시아파 신도건 또는 아랍인이건 쿠르드이건, 이라크 사람이라면 서로를 구분해서는 안 됩니다. 모두가 경건한 마음으로 나라를 위해 힘을 모아야 합니다."

그가 살해되기 몇 시간 전에 남긴 마지막 말이다. 공포감을 지속시키고 국가통합을 저해하려는 자들에게 그의 목소리는 분명 침묵시켜야 할 바른 언론의 목소리였다.

급기야 그들은 자신들의 저의를 관철시키고 말았다. 그의 죽음은 어리석은 전쟁이 남긴 또다른 야만의 기록이다. 그 외에 어떤 다른 교훈이 있는지 나는 알 수 없다.

인류가 내세울 공동의 윤리적 잣대가 만들어지기 전까지 얼마나 많은 고귀한 목숨이 이렇게 사라져가야 하는가. 미국과 영국을 비롯한 세계의 정치지도자들이여, 더 이상의 희생이 필요한가? (*번역: 이완기)

덧붙이는 글 | *람지 바루드 기자는 커틴 공과대학교에서 언론학을 강의하고 있다. 그는 곧 출간될 <팔레스타인의 두 번째 봉기: 민중투쟁사>의 저자다. 그의 책은 <아마존>에서 구입할 수 있다. 그는 PalestineChronicle.com의 편집자이기도 하다.


댓글
이 기사의 좋은기사 원고료 10,000
응원글보기 원고료로 응원하기

독자의견

이전댓글보기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