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마디 말이 내 일생을 바꾸어 놓을 수 있습니다. 한마디 말이 절망에 빠진 나를 구원해 줄 수 있습니다. 한마디 말로 빙벽처럼 굳었던 마음이 풀릴 수 있습니다. 한마디 말로 지옥과 천국을 경험할 수 있고, 절망과 희망 사이를 오갈 수 있습니다. 한마디 말이 비수가 되어 내 가슴을 찌를 수 있고, 한 마디 말이 갓 퍼담은 한 그릇 쌀밥이 되어 감사의 눈물을 펑펑 쏟게 할 수가 있습니다."
이는 정호승 시인이 쓴 <내 인생에 힘이 되어 준 한마디>(비채, 2006)에 나오는 머리글 한 토막이다. 그만큼 이 책은 자신의 인생살이 속에서 자양분이 돼 준 말 한마디와 그 사색을 담고 있다.
그는 초등학교 저학년 때, 미군 지프차에 교통사고를 당할 뻔 했는데 눈썹 하나 다치지 않는 행운을 맛봤다고 한다. 어릴 때는 냇가로 미역을 감으러 갔다가 장난치는 형 때문에 죽을 뻔 했는데 겨우 살아났다고 한다. 고등학교 때는 친구들과 함께 경주 토함산으로 무전여행을 갔는데 휘발유통에 불이 붙어 온몸이 불타버릴 뻔 했지만 별다른 사고 없이 불을 끌 수 있었다는 이야기도 전해 준다.
인생의 어려운 고비들을 잘 넘긴 그. 성장기를 거친 사람이라면 으레 있을 법한 삶의 이야기들이다. 그러나 그런 성장기 이상의 무거운 짐들을 지고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어떤 것이 힘이 될 수 있을까?
먹을 게 없는 사람들에게는 세 기 끼니가 힘이 될 수 있다. 돈이 없는 사람에게는 로또복권이라도 당첨이 되어 억만금을 만져 보는 게 힘이 될 수 있다. 사업체가 폭삭 눌러 앉아버린 사람에게는 멋진 사업체 하나를 차리는 게 힘이 될 수 있다. 교통사고를 당해 차가 폐차 됐다면 그 사람에게는 새로운 차를 사는 게 힘이 될 수 있다.
그러나 따지고 보면 이런 것들은 물질적인 것에서 비롯되는 힘이다. 그것들을 채운다 한들 또 다른 채울 것들이 줄줄이 서 있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다함없는 만족만이 자꾸자꾸 그의 마음에 갈증을 불러일으키기 때문이다.
그런 까닭에 정호승 시인은 인생살이 속에서 얻는 참된 힘은 물질적인데 있는 게 아니라 자신에게 들려 준 말 한마디를 통해 얻는 '정신적인 자족'에 달려 있음을 고백한 것이다. 그것은 이 험악한 세상을 사랑하며 살아가게 하는 참된 이유가 되게 하는 것이다.
그 말 한 마디가 때로는 참된 위로와 격려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 말 한 마디가 누군가에게 살아갈 소망을 안겨줄 수 있기 때문이다. 그 말 한마디가 타는 목마름으로 쓰러진 누군가를 일으켜 세워주는 생수 한 모금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 말 한마디가 절망의 늪 속에 빠져 있는 한 영혼을 건져 올려주는 참 생명의 밧줄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등에 무거운 짐을 짊어지지 않고 살아가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너무 무거워 벗어놓고 싶어도 그 짐은 살아 있는 동안에는 벗어 놓을 수 없는 짐입니다. 그러나 그 짐은 산을 오를 때 등에 진 배낭의 무게가 몸의 중심을 잡아 주는 것처럼 소중합니다."(36쪽)
"풀잎에도 상처가 있습니다. 꽃잎에도 상처가 있습니다. 비 오는 날에는 빗방울에도 상처가 있습니다. 눈 오는 날에는 눈송이에도 상처가 있습니다. 눈비 그치면 햇살에도 상처가 있습니다. 상처 맞은 햇살이 더 맑고, 상처 많은 꽃잎이 더 향기롭습니다. 소나무가 송진의 향을 내 품으려면 몸에 상처가 나야 합니다."(105쪽)
"세상에 일정하게 정해진 삶의 표준이나 기준은 없습니다. 행복과 불행의 고정된 유형도 없습니다. 없는데도 있는 것처럼 우리가 착각할 뿐입니다. 혹시 내게 불행한 일이 있다 하더라도 그 불행은 남과 비교할 수 없는 나만의 삶의 한 형태입니다. 그것을 받아들이고 인정할 줄 알아야 내가 내 삶을 살아갈 수 있습니다."(317쪽)
산을 향해 오르거나 내려올 때 자신이 짊어진 짐은 그만큼 무게 중심을 잡아 주는 중심 추와 같다. 그 짐을 벗어버리면 비바람과 매서운 눈바람 앞에 쉽게 쓰러지고 말 것이다. 풀잎과 꽃잎과 빗방울 속에 담긴 상처들 역시 그것들로 인해 그 풀과 꽃과 빗방울이 더 영롱해지고 아름다워지는 법이다. 삶 속에 매일 닥쳐오는 삶의 상처와 흉터들도 그 삶을 더욱 정금과 같게 만드는 풀무불과 같은 것들이다.
그런데 때로는 그 무거운 짐들과 상처 그리고 흉터들이 자신에게만 너무 크게 다가온다며, 항변할 때가 있다. 다른 사람이 겪는 어려움과 내가 겪는 어려움을 비교하는 일이 그것이다. 다른 사람에게 닥쳐 온 불행은 지극히 작은 것 같은데, 자신에게 닥쳐 온 불행은 너무 커 보인다는 것들이 그것이다. 그 때문에 자신이 믿는 신을 향해 항의하거나 곧잘 말없는 분노를 터뜨리기도 한다.
하여, 정호승 시인은 남과 비교할 수 없는 자신의 것을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게 그 무엇보다도 중요한 일임을 일깨워 준다. 너나 할 것 없이 상대적인 것에 목을 매달며 살아가는 세상에서 잠시 떨어져, 자신만이 누릴 수 있는 절대적인 만족을 쫓아 살다보면 비로소 거기에 참된 행복을 찾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남과 비교하여 더 가지고 누릴 것만을 좇기보다는 비록 적은 것이라도 만족하며 사는 자족의 비결을 배우며 사는 게 가장 큰 행복임을 알게 해 준다.
그렇듯 그의 말 한 마디 한 마디, 그의 사색 하나 하나를 따라가다 보면 어느새 세상을 살아갈 힘을 얻게 된다. 축 쳐진 어깨도 올라가고, 힘없이 고개 숙인 중년들도 다시금 하늘을 향해 고개를 들게 된다. 미래가 불투명하다며 볼멘소리를 해 대는 젊은이들도 그래서 다시금 큰 꿈을 그리게 된다. 그가 건네주는 말 한 마디 한 마디에 그래서 살아갈 이유를 찾게 되는 것이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