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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조브로커 윤상림 사건이 풍긴 악취가 채 가시기도 전에 이번엔 그에 버금가는 '김재록 게이트'가 터졌다. 윤상림 사건과 마찬가지로 이번 게이트 역시 개인적 친분 관계가 공적 의사 결정에 영향을 행사하는 우리 사회의 어두운 단면을 적나라하게 드러냈다. 우리 사회 구석구석에 암세포처럼 퍼져있는 브로커들의 세계를 들여다봤다. <편집자주>
▲ 서울 서초동 서울중앙지검앞 검찰 깃발.
ⓒ 오마이뉴스 권우성
"외부에서 보니 검찰은 로비가 잘 통한다는 느낌이 들었다."

인권 전문가인 박원순 변호사가 지난 15일 한 강연회에서 던진 쓴소리다. 박 변호사는 이날 강연회에서 참여연대 활동 시절에 겪은 최순영 전 신동아그룹 회장 사건을 예로 들며 "최씨 측 브로커가 검찰 고위간부를 장시간 만나고 나오는 장면을 목격했다"면서 "그때 '검찰도 로비가 통하는구나'하는 느낌을 받았다"라고 꼬집었다.

이는 우리 시대 브로커의 존재가 어떠한지를 단적으로 드러내는 예다. 검찰이 이러할진대 다른 곳이야 오죽하랴. 한국 사회 돈과 권력이 모인 곳이라면 빠지지 않고 따라다니는 것이 최규선, 윤상림, 김재록 등과 같은 브로커들이다. 최근에는 법조, 금융, 건설, 세무, 군 등 그 분야도 '전문성'에 맞춰 세분화 하는 추세다.

최근 온 나라를 떠들썩하게 만든 김재록 전 인베스투스글로벌 회장의 정·관계 로비 의혹은 한 브로커를 가운데 두고 기업, 정치권력, 정부 사이의 끈끈한 유착관계를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서초동 법조·여의도 금융·강남 건설브로커 활개

국내에서 브로커들을 가장 쉽게 접할 수 있는 곳은 서울 서초동 법조타운이다. 이곳의 커피숍은 법조브로커와 이들과 상담을 하려는 의뢰인들의 발길로 하루 종일 북적거린다. 27일 오후 <오마이뉴스> 취재진은 브로커들과 직접 대화를 나누기 위해 법조타운의 한 커피숍에 들어가 봤다.

오후 5시가 넘은 늦은 시간이었는데도 빈 테이블이 쉽게 눈에 띄지 않을 정도로 커피숍은 사람들로 가득했다. 삼삼오오 모인 사람들은 대부분 송사(訟事)와 관련된 얘기를 나누고 있었다. 모두가 비슷한 처지다 보니 돈이 오고가는 은밀한 이야기까지 숨기지 않고 큰 목소리로 말했다.

커피숍 주인에게 "사건이 있어서 왔다. 상담할 사람이 있느냐"고 말했더니 5분도 채 지나지 않아 40대 중반으로 보이는 남성이 찾아 왔다. 자신을 컨설팅 전문가라고 소개한 이 남성은 처음에는 취재진을 경계하는 눈빛으로 바라보다 사건 내용을 구체적으로 듣고부터 적극적인 모습을 보였다. 나중에는 "내 인맥으로 안 되는 것이 없다"고 큰소리를 치면서 돈을 요구해 왔다.

이곳의 브로커들은 대부분 송사에 휘말린 의뢰인에게 사건을 잘 처리해주겠다고 하면서 돈을 요구하는 법조브로커들이다. 사건 승소율이 높은 변호사를 소개시켜 주는 경우가 많지만 변호사를 통하지 않고 직접 '해결'을 해주는 이들도 적지 않다. 오죽했으면 '변호사를 구하기 전에 서초동 커피숍부터 들러라'는 말이 나올 정도다. 이들은 윤상림, 김재록과 같은 거물급은 아니지만 돈을 무기로 권력 주변을 맴돌며 기생하는 모습은 김씨 등과 크게 다를 게 없다.

서초동 법조타운에서 변호사 사무실을 운영하고 있는 고승덕 변호사는 "이곳의 브로커들은 의뢰인에게 무조건 사건을 해결해줄 수 있다고 접근한 뒤 의뢰인이 주는 돈의 액수에 따라 로비 대상을 물색한다"며 "형을 낮추거나 의뢰인에게 유리한 판결이 나오도록 하는 등 실제로 로비능력을 발휘하는 경우가 많다"고 말했다. 고 변호사는 "정확한 통계는 아니지만 이곳에서 활동하는 법조브로커만 1000명을 넘어설 것으로 추산된다"고 덧붙였다.

서초동에서 법조브로커들이 눈에 띈다면 여의도와 명동의 호텔 커피숍에선 금융브로커를 쉽게 만날 수 있다. 반면 강남권 호텔 커피숍에선 건설브로커가 주로 활동한다. 금융브로커들은 은행을 상대로 대출청탁을 하거나 굵직한 기업 인수·합병(M&A)에 개입해 정부 당국자를 상대로 로비를 벌인다. 사업자로부터 돈을 받고 은행에 대출청탁을 한 혐의로 구속된 김재록씨가 대표적인 금융브로커 가운데 한 명이다.

또 건설브로커들은 주로 건물 인·허가를 얻어 주거나 토지의 용도를 변경해 주겠다고 접근해 거액을 요구한다. 최근 검찰의 김재록씨 사건 수사과정에서 불거진 현대자동차 양재동 사옥 인·허가 과정이 여기에 해당한다. 서울시와 건설교통부는 로비와는 무관하다고 하지만 여러 정황으로 미뤄봤을 때 석연치 않은 구석이 한둘이 아니다.

처음 만난 사람도 금세 '형, 아우'

▲ 지난 24일 서울 서초동 대검찰청에서 인베스투스 글로벌 전 대표인 김재록씨가 김대중 정부 시절 부실기업 인수 및 대출 로비의혹과 관련, 특정범죄 가중처벌법상 알선수재 등의 혐의로 구속되고 있다.
ⓒ 연합뉴스 김상희
이들 브로커들은 법조, 금융, 건설 등 전문분야에 따라 나뉘긴 하지만 이들의 '업무형태'는 똑 같다. 일단 사람을 소개 받으면 특유의 친화력을 발휘해 짧은 시간 안에 금세 형, 아우 하며 지낸다. 또 "내가 누구누구와 친한데…"하면서 권력층이나 정부 고위 인사들과의 친분을 지나치게 과시한다. '친화력'과 '마당발'은 브로커가 꼭 갖춰야 할 필수 조건이다.

평소 김재록씨를 알고 지낸 사람들은 하나 같이 김씨가 이 두 가지 점에서 탁월한 능력을 지녔다고 지적한다. 2004년 말까지 재경부 고위 관료를 지낸 한 인사는 "김씨는 한 번 사람을 만나 관계를 맺으면 금세 호형호제하며 지냈을 정도로 친화력이 뛰어났으며 또 한 번 알게 된 사람은 사후관리를 통해 철저하게 챙겼다"고 말했다.

언제든지 윗사람을 설득할 수 있는 능력도 브로커가 갖춰야할 필수 요소다. 아무리 '거미줄 인맥'으로 이곳저곳을 휘젓고 다닌다 하더라도 윗사람을 설득해 자신의 요구를 관철시키지 못할 경우 그 '실력'을 인정받지 못한다. 그런 점에서 김재록 씨는 역대 최고 수준의 가장 이상적인 브로커로 손꼽힌다.

김씨와 평소 친분관계가 있는 금융계 고위관계자는 "모 정부 고위인사가 지자체장 선거에 나간다고 했을 때 주변에선 모두 이를 만류했지만 유독 김씨만이 당시의 정세를 설득력 있게 설명해 결국 그 고위인사로부터 출마결심을 이끌어 냈다"고 말했다.

브로커들이 가장 경계하는 것은 자신의 주변에 적을 두지 않는 것이다. 극도의 보안이 생명과도 같은 이상 단 1명의 적에 의해서도 모든 것이 수포로 돌아갈 수 있기 때문이다. 김재록씨도 결국 스스로 만든 적에 의해 꼬리가 잡혔을 것이라는 게 이쪽 '업계'의 일반적인 관측이다.

취재과정에 만난 한 브로커는 "김씨가 기업 M&A 과정을 통해 너무 많은 적을 만들었다. 또 김씨가 지사장으로 있던 아더앤더슨이 정부수주를 거의 독식하면서 김씨 때문에 억울한 기업과 컨설팅회사들이 많이 생겼다"며 "결국 이번 사건도 김씨 반대파의 집중적인 제보에 의해 터졌을 가능성이 크다"고 말했다.

연줄에 기대는 그릇된 사회구조부터 바꿔야

우리 사회에서 여전히 브로커가 통하는 것은 돈과 권력, 연줄에 기대려 하는 그릇된 심리가 사회저변에 깔려 있기 때문이다. 여기에 온정주의와 연고주의가 만연한 한국사회의 특성상 브로커들이 활개를 칠 수 있는 조건도 충분히 갖춰져 있는 셈이다.

김호기 연세대학교 교수(사회학과)는 "누구든 정상적인 절차를 밟아 이를 처리하려 하기보다는 '아는 사람을 통해서 어떻게든 해보려는 심리'가 개개인의 마음 한 구석에 깔려 있다"며 "이 같은 건전하지 못한 사회구조가 변하지 않는 이상 브로커 또한 쉽게 근절되기는 어려울 것"이라고 말했다.

그렇다면 우리 사회에서 브로커가 사라지는 것은 요원하기만 한 일일까. 김호기 교수는 브로커 근절 방법으로 두 가지를 제시했다. 먼저 투명하지 못한 의사결정 구조를 바꾸는 것이 중요하다. 김 교수는 "투명정치가 이뤄지지 않는 한 음성적인 브로커 활동은 근절되기 쉽지 않다"며 "무엇보다 정치의 투명성을 높이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했다.

두 번째론 미국처럼 로비를 양성화하는 방법이다. 김 교수는 "합법적으로 로비를 할 수 없는 상황에선 불법적인 브로커가 더 판을 치게 마련"이라며 "로비과정을 투명화 하는 법적 장치를 마련할 경우 음성적인 불법 브로커들도 사라질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실제 '로비스트 합법화' 문제는 최근 공론화 수준을 넘어 입법화가 탄력을 받고 있다. 국가청렴위원회가 로비활동 양성화 문제에 대해 긍정적인 시각을 지닌데다 일부 국회의원 중심으로 로비스트 합법화 방안이 논의되고 있다. 하지만 로비활동이 합법적으로 보장된 미국에서도 불법 로비활동이 끊이지 않는다는 점을 감안하면 반대의 시각도 만만치 않다.

아직까지 전국에서 활동하고 있는 브로커의 수를 정확하게 확인하기는 어렵다. 법조, 금융, 세무, 군 브로커 등으로 나뉘어 있는데다 이들이 각지에 음성적으로 퍼져있기 때문이다. 다만 취재과정에 만난 한 브로커는 "윤상림, 김재록처럼 거물급은 극소수지만 여러 가지 이익 사업 건으로 기업의 자본을 주머니에 넣고 국내 정관계에 뿌리는 사람이 서울에만 3000여명 정도는 될 것"이라고 말했다.

이들은 매일 같이 돈을 품안에 쥐고 권력주변을 맴돌며 하이에나처럼 먹잇감을 찾아 나선다. 이들이 존재하는 한 한국내 뿌리처럼 박혀 있어 사회발전을 가로막고 있는 '연줄에 의한 일처리'도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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