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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차이나타운의 오래된 집
ⓒ 이태호
지하철 1호선 종착역 인천역. 인천역을 나오면 언덕을 따라 붉은 등과 중국집 간판이 언덕을 따라 이어진다. 언덕 맨 꼭대기 중국집 '공화춘'을 지나자 낡은 건물과 한적하다 못해 을씨년스러운 골목길이 나온다. 오정희의 작품 '중국인 거리'의 배경이 된 국내 유일의 차이나 타운 화교촌이다.

상점에는 음력 설이 얼마 안 지나서인지 월병이나 마괘자를 판매한다는 광고 문구가 붙어있었다. 중국집의 자장 볶는 냄새와 가게 곳곳에서 흘러나오는 중국 노래가 이곳이 차이나타운임을 알게 해주었다.

"예전에 비해서 이곳도 많이 죽었습니다. 1960~70년대 7~8만명의 화교들이 거주하던 때가 있었지요. 물론 지금은 한국에 사는 화교수는 1만명 가량밖에 안됩니다. 물론 이곳에 거주하는 화교들은 200여명밖에 안되고요."

차이나 타운 내 한국화교협회 인천지부 회장 임기성(62)씨가 말했다. 1950년 대만에서 한국으로 건너온 그는 한국에서 생활하는 화교 2세대이다. 그의 아들과 손자는 대만으로 다시 돌아갔다고 말했다. 줄어든 화교 숫자를 반영하듯 인천에 거주하는 화교 관련 민원업무를 총괄한다는 이곳 사무실의 근무자는 2명밖에 안되었고, 이마저도 한가해 보였다.

"대부분 화교들은 중국관련 무역업이나 차이나타운 음식점에 종사하는 경우가 많아요."

화교협회 사무실에서 만난 손무정(30)씨. 그는 한국에서 태어나 한국에서 자란 화교 3세대이다. 대만국적을 보유한 그는 국내 한 대기업에 입사, 중국지사에서 근무하다가 퇴사하여 현재는 중국 관련 무역업에 종사하고 있다고 말했다. 그는 화교들은 설사 대기업에 입사해도 본사근무보다는 중국지사로 내보내고 본사로 발령을 잘 안내는 등 화교에 대한 보이지 않는 차별이 있다고 말했다.

▲ 화교학교
ⓒ 이태호
화교협회 바로 위에는 화교중산학교가 있었다. 이곳에서 만난 중학교 교사 손승종(50)씨. 그는 현재 학생수가 유치원부터 고등학교까지 480명밖에 안된다면서, 1970년대에 1200명이나 되었던 학생수가 지금은 많이 줄어 다소 한산한 편이라고 밝혔다.

그는 예전 학생들은 화교끼리만 연애하고 대학교에 진학할 때에도 대만소재 대학을 우선 고려하고 국내 소재 대학들은 차선책으로 택하는 경우가 많았으나, 지금은 한국에 많이 동화되어 우선 국내 소재 대학을 진학 고려대상으로 생각한다고 말했다.

참고로 국내소재 국제인학교와는 다르게 화교 고등학교를 졸업하더라도 국내 일반 고등학교 졸업자와 동등한 자격을 주기 때문에 굳이 검정고시를 볼 필요는 없다고 덧붙였다. 이날 화교학교 운동장에는 여러 학생들이 농구를 하고 있었는데, 이들의 사용언어 또한 중국어가 아닌 한국어였다.

화교들에 대한 제도적인 차별은 예전에 비해서 많이 사라진 상태이다. 1960년 전까지 화교들은 국내부동산을 구매할 수 없었고, 1970년대만 해도 토지를 200평 이하로만 소유해야 했다. 물론 이런 구매 한도 제한요소는 현재 없다.

그렇다 하더라도 차별이 없는 것은 아니다. 대표적인 예가 신용카드 발급 문제이다. 화교들은 법적으로 외국인이다. 인천거주 화교 기준으로 72% 가량이 F5(영주권)자격으로 국내에 거주하고 있다. 이들의 직장은 대부분 부모세대로부터 물려받은 중국음식점이나 중국 관련 무역업이다. 납세 규모가 명확하지 않을 경우 신용카드 발급이 안된다.

앞서 만난 손무정(30)씨도 신용카드를 보유한 화교친구들은 열 손가락에 꼽을 정도라면서 이런 점이 다소 아쉬운 점이라면서, 은행에서도 같은 동양인인데도 화교라고 하면 좀 색안경을 쓰고 바라보는 시선을 아쉬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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