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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인복 원장이 수상 직후 수상소감을 발표하는 모습
이인복 원장이 수상 직후 수상소감을 발표하는 모습 ⓒ 충남도청 제공
3월의 마지막 날인 지난달 31일 오후 서울 이화여고 내 유관순기념관에서는 제5회 유관순상(賞) 시상식이 있었다. 충청남도가 주관하고 유관순상위원회가 시상하는 이 상은 수상자 심사는 별도의 심사위원회를 구성하여 진행하였는데 나는 이번 수상자 심사위원회의 심사위원으로 참여하였다. 그런 인연으로 나는 이날 시상식에 초대받아 참석했다.

시상식에는 이현재 전 총리를 비롯해 장하진 여성부장관, 박유철 국가보훈처장관 등 전현직 정부관계자를 비롯해 류근창 류관순열사기념사업회장, 김국주 광복회장 등 독립운동단체 관계자, 그리고 유 열사의 모교인 이화여고의 정창용 교장, 후배 학생 등 각계 인사 1천여 명이 참석해 행사장을 가득 메웠다.

이날 시상식의 압권은 이날 행사의 주인공인 제5회 유관순상 수상자 이인복(68·숙명여대 명예교수) 나자렛성가원 원장의 '수상소감'이었다. 앞서 후보자 현지조사 과정에서 이 원장을 만나본 필자로선 그 분의 사상과 지나온 세월에 대해 대략은 알고 있었으나 당일 이 원장의 수상소감은 예상을 빗나간, 근래 보기 드문 '명연설'이었다.

대개의 시상식에서 접하는 수상자들의 수상소감은 시상 주체와 심사위원들에 대한 '감사 일색'인 것이 보통이다. 그러나 이날 이 원장의 수상소감은 내용면에서 참으로 남달랐다. 대다수의 사람들이 유 열사의 정신을 독립운동사의 한 자락으로만 인식한 채 이를 현대적 감각으로 해석하는 데는 부족함이 없지 않았다고 할 수 있다.

이날 이 원장은 수상소감을 통해 유 열사의 정신을 크게 세 가지로 압축해 해석했다. 즉 유 열사가 외친 '대한독립 만세' 여섯 글자는 첫째 국가의 자주독립, 둘째 개인의 자유와 평등, 셋째 복지사회의 실현 등을 함축하고 있다고 설파했다. 그러나 목하 분단과 양극화의 현실에서 유 열사의 정신은 여전히 숙제로 남아 있다고 이 원장은 평가했다.

어린시절 유 열사를 큰엄마 내지 큰이모 정도로 여기며 강소천 작사, 나운영 작곡의 '유관순 노래'를 부르며 자랐다는 이 원장은 "이제는 제 자식들도, 손자들도 이 노래를 모른다"며 우리사회가 유 열사의 정신을 제대로 계승하지 못하고 있음을 통탄해 했다.

이날 이 원장의 수상소감은 장하진, 박유철 두 현직 장관의 축사에 이어 진행됐다. 내내 차분하면서도 우렁차게 장내를 메운 이 원장의 축사가 진행되는 동안 서너 번의 박수소리가 터져 나왔다. 행사를 마치고 나오는 길에 만난 하태석(유관순상위원회 위원) 대전지방보훈청장은 "근래 드물게 명연설을 듣고 깊은 감동을 받았다"며 "심사위원회에서 참으로 훌륭한 수상자를 선정했다"고 말했다.

다음은 이 원장의 이날 수상소감 전문이다(참고로 청와대 관련 부분은 원문에는 없었으나 당일 이 원장이 즉석에서 추가한 내용으로 확인됐다).

"유관순상은 여자만의 문제가 아닙니다"
이인복 나자렛성가원 원장의 수상 소감

6·25 한국전쟁 때 아버지와 오라비들을 다 잃고 뼈가 저며지는 슬픔을 이기며 살아온 후 56년만에 제5회 유관순상을 받는다는 오늘의 경사는, 지난 반세기의 슬픔을 위로해 주시기 위하여 하느님이 주시는 상이라 생각되어 기뻤습니다. 그러나 그 기쁨도 잠시 오늘의 우리나라를 지켜보고 계실 유관순 열사의 마음을 헤아리면서 기쁨이 두려움으로 바뀌었습니다.

저는 강소천 작사 나운영 작곡의 동요 ‘유관순 노래’를 부르며 자란 세대입니다. 그러나 이제는 제 자식들도, 제 손자들도 이 노래를 모릅니다.

삼월 하늘 가만히 우러러 보며 유관순 누나를 생각 합니다.
옥 속에 갇혀서도 만세 부르다 푸른 하늘 그리며 숨이 졌대요.


실제로 유관순 열사의 나이는 저의 어머님보다 여섯 살이 위이니까 제게는 큰엄마나 큰이모가 됩니다만, 강소천 선생님의 동요를 부르며 어린 시절을 보낸 저희 세대에게 유 열사는 영원한 열여덟 살 누나요 언니입니다.

1940년대 후반에 초등학교를 다닌 저희 세대는 누구나 부모 벌의 유관순 열사를 누나 아니면 언니라고 생각하였습니다. 언니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열사의 생애가 멀리 있는 남의 이야기가 아니라 우리들 자신의 사건으로 다가올 수 있었습니다.

그 당시의 초등학교 선생님들은 늘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유관순 열사는 정말로 우리 선생님들의 누나요 언니란다. 그렇지만 그분은 너희들에게도 여전히 누나요 언니이다. 유관순 열사는 영원히 죽지 않고 피어있는 꽃다운 열여덟 살 대한의 딸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유관순 열사를 기리는 다섯번째 상을 제가 받게 되었습니다. 저는 동요의 노래말처럼 삼월의 하늘을 우러러보며 유관순 열사가 우리 민족에게 남기신 유산이 무엇이고 그것이 저의 생애와 무슨 관계가 있는가를 생각해 보았습니다. 우선 열일곱살 꽃다운 나이에 독립만세운동을 주도했다는 사실이 우리 민족과 민족의 역사에 어떤 의미가 있는 것일까?

첫째로 그것은 선각자의 용기요 투지입니다. 인류의 역사는 투철한 역사의식을 지닌 선각자들의 선구적 사상이 개척해 나가는 고난의 대장정입니다. 따라서 그 길은 투지와 용기를 필요로 하는 가시밭길입니다.

둘째로 그것은 이상을 성취하겠다는 불굴의 신념입니다. 그 신념 속에는 민족과 인류의 바람직한 미래가 약속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어떠한 희생과 고통이 뒤 따라도 그 고난을 극복할 수 있는 힘을 지니게 됩니다.

셋째로 그것은 공생 공영하는 인권 회복의 날이 반드시 오리라는 열렬한 소망입니다. 일제와 싸워 이기면 결국은 우리 민족이 인권을 누리게 된다는 분명한 희망이 있기 때문에, 개인의 생명을 돌아보지 않게 됩니다.

이러한 용기와 신념과 희망이 유 열사가 추진한 만세 운동의 기본 심성이었습니다. 이러한 기본 심성이 민족의 독립을 성공으로 이끌었습니다.

저는 삼월의 하늘을 다시 우러러봅니다. 유관순 열사가 부르짖은 함성은 ‘대한 독립 만세’ 여섯 글자의 반복이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 여섯 글자가 지닌 구체적인 의미는 무엇이었겠습니까?

첫째로는 민족 국가의 자주 독립입니다. 오천년을 이어 온 독자적인 민족의 자주적 역량과 그 민족 구성원이 주인으로 사는 독립된 나라였습니다.

둘째로는 독립된 국가 안에서 국민 개개인이 누리는 자유와 평등입니다. 개인의 자유가 억압되고 모든 국민이 평등한 권리를 지니지 못한다면 그러한 독립 국가는 있으나 없으나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셋째로는 자유와 평등을 누리는 국민 한 사람 한 사람의 무궁한 발전과 번영입니다. 정치적 자유와 평등은 경제적 발전과 번영을 동반하여 드디어는 복지사회를 실현시켜야 합니다. 이렇게 본다면 유관순 열사의 함성 ‘대한독립만세’ 여섯 글자는 국가의 자주독립, 개인의 자유평등, 사회의 복지실현이라는, 세 가지 차원의 구체적 목적을 달성하자는 외침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이와 같은 유관순 열사의 염원은 지난 20세기 후반기, 정확하게 말하여 6·25 한국전쟁이 발발하고 20세기가 마감된 지난 50년 동안, 역사의 망각 속에 묻히는 듯했습니다. 삼일절을 전후한 어느 날의 신문이나 텔레비전에서도 유관순 노래를 들은 일이 없고, 초등학교나 중학교나 고등학교 교실 어디에서도 유관순 노래를 부르는 일이 없는 세대가 되었습니다.

바른 인간으로 살아야 할 인간의 기본심성을 가르치는 공교육이 힘을 잃고 출세지향으로 팽배한 사교육만 판을 치고 있습니다. 대중매체는 개인의 양심을 숨기고 오직 정당의 정략만을 공허하게 외치는 정당싸움 보도에만 급급하고, 고귀한 민족 유산을 남기고 가신 선각자의 정신을 되새겨주는 일에는 거의 무신경해 보입니다.

다행스럽게도 만시지탄은 있으나 충청남도와 동아일보, 학교법인 이화학당이 삼위일체가 되어 사그라져 가는 유관순 열사의 민족의식을 일깨우고자 유관순상을 제정하였으니, 아마도 이 상이 지속되는 한 유관순 열사의 정신은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여 우리 민족의 번영과 함께 꽃 피워 갈 것입니다.

그리하여 초등학교 중학교 고등학교 교실에서 아니 대학교 강의실에서도 3·1절 전후에는 다시 '유관순 노래'를 부르는 날이 오면 좋겠고, 그렇게 되면 오늘날의 청소년들도 저희들 6,70 대처럼, 할머니 세대의 유관순 열사를 다시 누나라고 언니라고 부르며 사랑하게 될 것입니다.

유 열사를 누나와 언니로 부른다는 것은 우리 민족이 오늘 추구해야 할 국가의 자주독립, 개인의 자유평등, 사회의 복지실현 이라는 세 가지 당면 과제를 새로운 각오로 풀어나가는 계기가 될 것입니다.

하지만 불행하게도 우리 국가, 민족의 현실을 성찰해보면 지금 이 세가지 분야가 모두 불완전한 상태입니다. 통일을 성취하지 못했으니 완전한 국가의 자주독립을 이루었다고는 말할 수 없습니다. 개인의 자유와 평등 역시 통일 국가를 성취한 이후에나 그 완전성을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사회의 양극화 현상이 심화되는 오늘날 복지사회의 실현은 아직도 갈 길이 아득합니다.

이러한 시점에서 제가 유관순 상을 받기 때문에 저에게는 기쁨보다 두려움이 앞서는 것입니다. 제가 평생토록 해 온 일은 여러 가지 이유로 억압받고 소외되고 버림받은 피해여성들에게 자그마한 위로가 되자고 노력해 온 것뿐입니다. 굳이 명분을 찾는다면 피해 여성들의 인권신장을 위한 복지시설 운영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만, 왼 손이 하는 일을 오른 손이 모르게 하라는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생각한다면, 결코 남 앞에 내세울 일은 아니라고 생각됩니다.

오늘 이 고마운 자리를 빌려서 유 열사를 선배로 모시고 공부하는 복된 이화여고 학생들과 이 나라의 모든 학생들과 참석자들에게 당부할 일이 있습니다.

유 열사가 우리에게 해 준 일에는 '정신대'라는 이름으로 생명과 인권을 유린당한 민족의 딸들을 구출하고 해방시킨 일도 반드시 기억되어야 한다는 것이고, 또 독도가 그들 땅이라고 호시탐탐 부르짖는 간악한 일본인들로부터 반드시 독도를 지켜나가야 한다는 것을 명심하자는 것입니다.

그리고 가까운 미래에 성매매업 1등 국가, 낙태 1등 국가, 자살 1등 국가라는 불명예의 수치스런 명찰을 떼어버리고 개인의 인권과 사회복지가 실현되는 미래사회를 건설하기 위하여 유 열사가 그날에 높이 들었던 자주독립과 민족정화의 횃불을 이제는 여러분들이 두 손 높여 치켜들고 새시대를 주도하는 제2의 유관순이 되겠다는 용기와 신념, 소망을 가슴에 새겨야 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그런 차세대 지도자가 되기를 바라며 저는 기도하다 죽을 것이고, 또 저도 그렇게 살다 죽을 것입니다.

피해여성들의 인권신장을 위하여 평생을 살아온 여성지도자로서, 또 여성이기 때문에 부단히 불이익을 감수하며 살아왔던 과거를 생각하면서, 한 가지 평소에 가슴 깊이 맺혀왔던 섭섭한 말씀을 하나 드리고자 합니다.

지난 3월 10일에 저는 대통령 부인 권양숙 여사 명의의 축하 카드를 받았습니다. 그런데 고맙다는 생각보다 오히려 불쾌한 마음이 앞섰습니다. 거기에 노무현 대통령의 이름은 없고 대통령 부인이라고 쓰여진 것이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았습니다.

저는 생각했습니다. 가령 안중근 의사나 이준 열사를 기념하는 상이 제정되어 그 수상자를 축하한다면 거기에도 대통령 부인 이름만 적힌 카드를 보낼 것인가? 대통령의 이름으로 보낼 것이 아닌가? 그렇다면 안중근 의사나 이준 열사는 우리나라 남성의 독립을 위하여 일했고 유관순 열사는 여성의 자유평등, 여성의 독립만을 위하여 일한 것인가?

대통령은 내외를 엄격히 하여 유관순 열사의 행사에는 명함도 내놓지 못한다는 것인가? 이것은 물론 대통령 내외분의 의지와는 관계없는 청와대 비서진의 일인 것을 모르지 않습니다. 3월 10일 당시에는 대통령 내외분이 아프리카 순방 중이셨습니다.

그러나 바로 이러한 일이 우리나라 남녀평등 의식의 수준임을 생각하면 우리가 가야 할 길이 아직도 멀고멀다 아니할 수 없습니다. 유관순상은 여자만의 문제가 아닙니다. 여권 신장 여성 복지는 여자만의 일이 아닙니다. 민족 전체의 인권 신장이고 가정행복의 문제입니다.

수상소감을 말씀드리는 자리에서 마음속에 오랜 동안 품어 온 남녀 불평등의 문제를 제기하고 싶어서 말씀드립니다. 앞으로는 남녀가 내외하며 시상식에 남녀를 구별하여 축하 카드 보내는 것이 당연시되는, 그렇게도 남녀유별 부부유별이 극심한 세상은, 이 땅에서 없어져야 할 것입니다.

끝으로 이 자리를 빌어 유관순상을 주최하신 세 기관 어른들과 심사위원님들에게 감사드립니다. 충청남도와 동아일보와 이화학당에 감사합니다. 민족의 자주독립과 개인의 자유평등과 사회의 복지실현을 위하여 애쓰시는 과거 현재 미래의 대한민국 순국열사들과 민주투사들에게 끝없는 존경과 감사를 드립니다. 그리고 배전의 노력으로 더 열심히 제가 해 오던 민족 전체의 인권신장과 여성복지의 일을 위해, 생명이 다하는 날까지 진력할 것을 약속드립니다. 감사합니다.

2006년 3월13일 새벽에 이인복 씁니다.

이인복 원장은 누구?

▲ 시상식 후 유관순 트로피를 들고 웃고 있는 이인복 원장.
ⓒ충남도청 제공
제5회 ‘유관순상’을 수상한 이인복(李仁福·나자렛성가원 원장·68세)씨는 한국전쟁 때 부친과 오라비들을 잃었다. 병든 모친과 다섯 명의 동생들을 보살피며 불우한 어린시절을 보낸 이 원장은 한 때 여러 차례 자살을 생각하기도 했다. 이런 연유로 그는 죽음의 문제를 문학과 연계시켜 깊이 천착하기도 했다.

어려웠던 시절 그를 지탱한 것은 칼릴 지브란의 <예언자>에 나오는 “기쁨의 껍질을 벗기면 그 안에 슬픔이 들어 있고, 슬픔의 껍질을 벗기면 그 안에 기쁨이 들어 있다”는 한 귀절이었다. 고아원 시절 가톨릭에 입교한 그는 수상집 <슬픔이 있는 곳에 기쁨을>에서 “나를 키우고 살린 힘은 9할이 아니라 10할이 기도에 연유했었다”고 밝힌 바 있다.

고아원 생활을 거쳐 숙명여대 국어국문학과를 고학으로 졸업한 그는 이후 숙명여대에서 교수로 재직하면서 세상의 불우한 여성들에게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다. 1978년 사재를 털어 나자렛성가원을 설립한 이래 그는 사회의 사각지대에 놓인 미혼모와 성폭력·가정폭력·성매매피해 여성들을 묵묵히 보살펴 왔다.

서울 평창동에 위치한 나자렛성가원은 자신과 남편(심재기 서울대 명예교수)의 퇴직금 전액을 쏟아부어 설립한 것으로, 심지어 그는 네 딸들의 혼수비용조차 이곳에 투입한 것으로 알려졌다. 네 딸 가운데 둘째(심미영)는 현재 모친의 사업을 돕고 있다.

특히 그는 시설을 통해 불우여성들을 돌보는 이외에도 대중 강연을 통해 성매매 피해 여성들을 위한 ‘성매매 피해여성 해방의 날’ 제정을 위한 노력으로 ‘성매매방지법’의 제정에도 크게 기여하였다. "(불우한) 딸들을 구하는 것이 내 운명"이라는 좌우명 아래 30년 가까이 사회복지사업을 해온 그는 "불행한 여성이 있는 한 화장하지 않겠다"며 시상식 당일에도 맨얼굴이었다. 그는 3년전 은퇴 후 여생을 사회복지사업에 진력하기 위해 동갑내기 남편과 함께 모 대학의 사회복지학과에 진학, 졸업했다.

그간 이같은 공로로 그는 한국여성단체연합이 제정한 ‘오늘의 여성상’(1990), 서울시가 제정한 ‘서울사랑 시민상 여성부문’(2005) 등을, 또 동포문학상(1987), 대한민국 문학상(1989), 한국문학비평가협회상(2002) 등을 수상하기도 했다. / 정운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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