병든 세상의 집단병실 - '햇빛 찬란한 나날'
각기 다른 작품이 실려 있는 단편집에 대해 하나의 주제로 서평을 쓰기란 난감한 일입니다. 작가론, 작품론은 더욱 어려운 일입니다. 기자가 할 수 있는 작업이란 작품집 전체를 관류하고 있는 소설적 소재나 작가의 의도를 짐작하는 정도이거나 또는 인물들의 공통점을 찾아내어 독자의 소설읽기에 약간의 편의를 제공하는 정도가 전부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평자의 진단처럼 독자들이 '후기자본주의' 같은 골치 아픈 낱말에 주눅이 들 필요는 없습니다. 그저 우리 주변에서 오늘을 함께 살고 있는 사람들과의 만남에 대한 가벼운 기대 정도로 독서를 시작하면 그 뿐입니다. 실려 있는 거의 모든 작품에서 병원이 등장합니다. 어딘가 아픈 사람이 주인공이라는 말입니다.
'메리와 헬렌'의 두 주인공인 메리와 헬렌은 두 몸이 아닌 한 몸으로 태어난 샴쌍둥이입니다. '김분녀의 일생'에서 손녀는 낙태수술을 위해 병원을 찾고 주인공 할머니는 할아버지의 바람기와 시댁의 구박을 피해 집을 나와 한 많은 세파를 헤쳐 온 남성우월주의 사회의 피해자입니다.
'서울의 지붕 밑'의 K는 사고로 거동이 어려운 남편에게 얻어터지면서도 참고 살아가는 파출부이고 '부두키트 세러피'는 말 그대로 세러피(치료, 요법)를 통한 스트레스 해소, 혹은 정신적 심리치료를 소재로 삼고 있습니다. '경리 7년'의 주인공 정희는 숫자(화폐 또는 회계)로 획일화된 산업자본주의시대의 정신 병리를 앓고 있는 상징적 인물이고 '한 때 우리는 신촌에서 만났지'의 옛 연인은 젊은 나이에 돌연사한 인물로 그려집니다.
'에덴의 건너편'에서 뇌종양을 앓는 정연의 딸을 위해 기도해주고 상담을 해주던 심리 상담가(원우 엄마)는 정작 자기 남편의 죽음은 이겨내지 못하여 스스로 목숨을 끊고 '지난여름의 섬'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일상의 탈출을 꿈꾸지만 통화권 이탈로 전화가 불통되자 불안에 전전긍긍하는 소심한 현대인들이며 '백일몽'의 애영은 자궁검사를 낙태수술로 상상하는 노처녀로 등장합니다. '향수'의 등반가는 이혼이 현실이 되어서야 그동안 무심했던 가족 혹은 부부의 사랑을 깨닫는 도피증 환자처럼 보입니다.
건강 찾기 혹은 견디기
조선희의 첫 단편집 <햇빛 찬란한 나날>에서 기자는 그 작품에도 매료되었지만 책의 말미에 해설을 쓴 문학평론가 김형중의 진단에 더욱 깊은 감명과 신뢰를 받았습니다. 그는 조선희를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습니다.
"조선희는 아직도 후기 자본주의 시대 한국의 한복판에서 버림받고 미쳐가는 사람들의 고백을 기꺼이 듣고 기록하기를 마다하지 않는다. 그들의 일상 가까운 곳에서 그들의 고통을 지켜보고, 그들로 하여금 말하게 하고, 그리고 그것을 기록한다. 그에게 소설가란 모름지기 만인의 고백을 들어주고 기록하는 자에 다름 아니다. 그런 의미에서 조선희는 여전히 신이 죽어버린 시대의 사제다"(본문 해설 중에서)
조선희를 진찰한 그의 진단은 날카로우면서 경쾌합니다. 그의 진단이 이미 나와 있는 상태에서 똑같은 진단을 하기에는 기자의 자존심이 허락지 않습니다. 그러나 결국에는 동의하고 맙니다. 그만큼 조선희의 단편집에 실린 11편의 작품들은 우리 사회가 앓고 있는 병증의 한 가운데에서 이러저러한 모습으로 병들어 고통 받는 환자수첩 같기만 합니다.
병력만을 기록한다면 이는 올바른 작가의 역할이 아닙니다. 조선희는 그들 환자들의 삶을 들여다보면서 그들이 병든 세상을 견딜 수 있는 처방을 내어 놓습니다. 김형중의 표현을 빌면 그것은 '작은 대안들'이고 곧 '세러피'입니다. 이는 '부두키트 세러피'에서 보이듯 직장상사에 대한 스트레스를 부두교 인형에 바늘을 무수히 찌름으로 해서 일정부분 심리적 안정을 찾는 경우 등입니다.
여러 단편들 중 가장 덧없이 읽힌 '햇빛 찬란한 나날'이 하필이면 책의 제목이 되었을까? 기자는 궁금하였습니다. 이루지 못한 이상 앞에서 다시 독일로 돌아가야 하는 주인공은 거식증 환자입니다. 그가 서울의 마지막 밤에 버섯요리를 맛나게 먹을 수 있었던 것은 무엇이었을까요? 기자는 그에게서 병든 세상을 견딜 수 있는 희망을 발견합니다.
"사월이 죽은 땅에서 라일락을 키워내듯, 대학문을 나선 뒤부터 내 육신에서 천천히 퇴화해온 이상이라는 기관이 불현듯 활동을 개시했다. 수많은 판단착오와 유치한 다툼들이 얼룩을 남겼지만.... 쉽게 상처 받지만 또 쉽게 지치지도 않는, 그렇게 젊었던 한때의 일이었다." ('햇빛 찬란한 나날' 중에서)
"서쪽 바다로 지기 직전에 진경을 펼쳐 보이는 해처럼 왜 사람은 돌아서서 사라지는 뒷모습에서 비로소 진심을 읽게 허락하는 것인가"('향수' 중에서)
그 깨달음과 결코 포기하지 않는 열망이 이 병든 세상을 견디게 하는 것은 아닐까, 생각하였습니다.
덧붙이는 글 | * 조선희- 전 한겨레 신문 기자, <씨네21> 편집장 엮임
* 햇빛 찬란한 나날/조선희/실천문학사/9800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