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정규직문제나 미국의 북한 핵 압박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시대의 화두인 생명과 평화의 으뜸 아닐까? 부동산문제와 집값 안정은? 비정상적인 사교육비 개혁은? 이런 문제 해결이 사회변혁의 주요 과제가 아닐까 싶은데 <녹색평론>의 이번 3-4월호를 보면 사뭇 다른 주장을 만나게 된다. 농업문제다.
<녹색평론> 이번 호가 나오자마자 언론이나 논자들 사이에서 쟁점이 되었던 것은 박승옥씨가 쓴 기존방식의 농민운동을 비판하고 새로운 대안 운동을 제창한 부분이었다. 인터넷 언론 <프레시안>에서는 이 글을 전부 옮겨 싣기도 했고 <한겨레>는 이 글을 한 페이지 통째로 소개했다. 반론도 실었다. 그러나 정작 <녹색평론>이 이번 호 전체를 거의 농민과 농업의 문제에 할애하면서 제기한 문제의식은 제대로 읽지 않은 것 같다.
박승옥씨의 글에서도 언급하지만 <녹색평론>은 농업문제를 특정 산업의 문제로 접근하지 않는다. 삶의 근본을 이루는 인간존재의 근원으로 농업을 바라보고 농민을 대한다. 그렇기 때문에 농업과 농민을 포기하고 오로지 ‘농촌’만 주목하는 정부의 정책과 큰 차이가 있다. 바로 이 지점에서 시각이 조정되지 않으면 우리 농업은 영원히 살길이 없고 우리 민족과 나아가 나라의 장래는 암담해진다.
기업도시니 팜 스테이니 하면서 농업을 한낱 돈벌이 수단으로 바라보는 이상 농업 본래의 가치는 사라지고 그 재앙을 언젠가 나라의 인민 모두가 떠안을 수밖에 없을 것이다. 돈벌이로서의 농업은 끝장난 지가 이미 오래기 때문이다. 작년 우리나라의 농업생산량은 창궐한 성 산업에도 못 미칠 3% 남짓이었다.
새만금사업으로 그 역할을 다 했다고 여겼는지 새만금간척의 주동기관이었던 ‘농업기반공사’가 ‘한국농촌공사’로 이름을 바꾸었다. 농업과 농민이 사라지고 ‘농촌’만 남았다. 농촌을 개발의 대상으로 보는 정부의 방침이 잘 드러나 있다. 농민이 사라지고 농사가 사라진 농촌은 아슬아슬한 자연풍경에 불과할 것이다. 뿌리 없는 나무라고나 할까. 도시의 삶을 그대로 옮겨놓는 도시인의 발자국이 찍히는 순간 그 농촌마저 파괴될 것이다.
하루종일 나 홀로 자동차를 타고 다니며 공기를 탁하게 만들어 놓고 집에 와서는 공기청정기를 돌리는 ‘생각할수록 이상한 동물’이 현대 도시인이다.
<녹색평론>은 정부가 추구하는 대규모 기업농은 기본적으로 잘못이라고 비판한다. 소규모 가족농이 얼마나 소중한지를 이번 <녹색평론>을 통해 접하게 될 것이다. 자세한 논거는 여기서 다 말할 수 없다. 단지 우리가 얼마나 경제논리, 돈벌이 논리에 물들어 제대로 된 깊이 있는 생각 한번 못하고 허겁지겁 살고 있는지를 보게 될 것이다.
이 책 첫머리에 실린 좌담의 핵심 문제의식이 이런 것이다. 생협활동가와 농민회 간부, 그리고 전교조 교사 등이 참여한 이 좌담회는 농업을 바라보는 생태적 시각들이 잘 나와 있다.
잘 준비된 논문이라고 할 수 있는 박승옥씨의 글도 농업의 문제를 사회통합적 안목으로 접근하는데 도움을 준다. 우리나라의 농업이 얼마나 지독한 고 투입 농법으로 지속가능성이 희박한지를 박씨는 <현재의 햇볕농업>이라는 새 말을 만들어 설명한다. 농사일이 기계화되어 석유와 화학비료가 투입되는 고 투입 농업은 과거와 미래의 자산을 강탈해 현재의 농산물을 생산하는 것임을 지적하고 있다.
에너지 해외 의존도가 97%로 세계 최대인 한국의 1년 석유 소비량은 드럼통을 일렬로 늘어 놓았을 때 서울과 부산을 648회 왕복할 분량이라고 한다. 에너지 위기와 식량 위기에 한국은 어떤 완충지대도 없이 직격탄을 맞을 수밖에 없는 의존적 경제체제다. 반미를 외치기 전에 식량과 에너지 자립을 도모하지 않고서는 어떤 급진적 운동도 헛수고라 아니 할 수 없다.
농업이 살지 않고서는, 다시 말해 순환과 생명이라는 농업의 기본가치가 우리 삶 속에서 살아나지 않고서는 파멸을 향해 질주하는 지금의 토목건설공화국 한국은 머지않아 큰 응보를 치를 것으로 보인다.
사실 농업문제가 빠진 환경운동이나 생태운동은 허구라고 본다. 농업문제에 대한 새로운 시각과 인식 없이 벌이는 환경운동이란 대증요법이나 다름없다. 삶의 틀을 바꾸고자 하는 것이 새로운 시대의 농업운동이다. 따라서 지금 전국농민연합이 주도하는 농민운동은 박승옥씨의 주장처럼 규탄하고 요구하는 운동이지 스스로 개혁하는 운동은 아니다. 시대문명 자체가 바뀌고 있는 때에 스스로 대안적 삶으로 바뀌지 않고서는 안 된다는 게 박씨의 주장이다.
중국에서 벌어지고 있는 향촌건설운동의 중심인물인 원 티에췬(溫鐵軍)의 대담도 주목할 만하고 100년 전 이 땅의 농민들이 어떻게 주장하고 싸웠는지를 생생하게 복원한 서평 <다시 듣는 100년 전 농민의 외침>도 좋은 읽을거리다. 무엇보다 책의 뒷부분에 여러 쪽에 걸쳐 실리는 지역별 <녹색평론> 독자모임 안내는 풀빛세상살이에 참여하고자 하는 독자에게 좋은 기회가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