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오마이뉴스의 모토는 '모든 시민은 기자다'입니다. 시민 개인의 일상을 소재로 한 '사는 이야기'도 뉴스로 싣고 있습니다. 당신의 살아가는 이야기가 오마이뉴스에 오면 뉴스가 됩니다. 당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워싱턴기념탑을 배경으로 활짝 핀 벚꽃
워싱턴기념탑을 배경으로 활짝 핀 벚꽃 ⓒ 한나영
꽃피는 봄 4월이 되면 미국의 수도인 워싱턴DC는 수십만 명의 인파로 몸살을 앓는다. 바로 벚꽃 때문이다. 워싱턴DC의 호수공원인 타이들 베이슨(Tidal Basin) 주변에 피어 있는 수천 그루의 벚나무는 미국 국내뿐 아니라 국외 관광객들까지 불러 모으는 효자 나무다.

제퍼슨기념관을 둘러싸고 있는 이 벚꽃행렬은 1912년에 일본이 워싱턴에 벚나무 3천 그루를 기증함으로써 조성되었다고 한다. 봄의 전령사인 벚꽃이 여인의 홍조 띤 얼굴마냥 활짝 피어 있는 모습은 청춘이 아니어도 보는 이의 가슴을 설레게 한다.

"만물이 소생하는 아름다운 계절에, 곁에 둔 '봄처녀 벚꽃'을 외면하는 건 죄!"

떼로 몰려다니는 것을 좋아하지 않아 DC 벚꽃이라고 해도 거절하려고 한 내게 도발적인 발언을 건네는 사람이 있었다.

'그래, 한 번 가보자. 꽃구경도 하고 사람구경도 하게.'

올해로 95주년을 맞는다는 워싱턴DC의 '내셔널 벚꽃 축제'는 지난 달 25일에 개막되었다. 하지만 벚꽃이 절정을 이루었던 것은 우리가 갔던 4월의 첫 주말이었다.

올해로 95주년을 맞는 워싱턴DC의 벚꽃축제
올해로 95주년을 맞는 워싱턴DC의 벚꽃축제 ⓒ 한나영
우리나라도 벚꽃과 관련된 축제들이 많다. 여의도 윤중로와 진해 군항제, 그리고 전주와 군산을 잇는 번영로 등지에서 펼쳐지는 갖가지 벚꽃축제들. 사람들은 '꽃바람'이 나서 꽃을 찾아 떠났을 것이다. 이곳 역시 한국과 마찬가지로 수십만의 인파가 벚꽃 때문에 DC로 몰린다고 했다.

"사람들이 워낙 많으니까 대중교통을 이용하는 게 좋아요."

봄이 되면 저절로 고개를 DC로 빼는 사람들. 코끝으로 전해오는 벚꽃의 유혹을 물리칠 수 없어 이들은 바쁜 가운데에도 시간을 내 벚꽃구경을 떠난다. 해마다 반복되는 벚꽃나들이에서 이들이 터득한 진리, '차를 가져가면 꽃구경도 제대로 못하고 고생만 한다.'

우리도 대중교통인 메트로(지하철)를 타고 가기로 했다. 그런데 모든 사람들의 생각이 같은 듯, 주말이면 돈을 받지 않는 종착역인 '비엔나'역 주차장에는 행락객들의 차로 추정되는 차들로 이미 만원이었다.

벚꽃 행렬에 합류하다

몇 바퀴를 돌고 난 뒤에야 겨우 주차하고 메트로에 오른 우리. 차 안에는 이미 봄기운이 가득했다. 내리는 사람도 거의 없이 모두가 DC로, DC로 향하고 있었다.

각양각색의 사람들을 스케치할 수 있었다. 춘흥을 어쩌지 못하는 피끓는 청춘들, 그리고 그들의 시원스러운(?) 옷차림. 유모차를 끌고 온 젊은 부부들과 다정한 봄나들이를 떠나는 나이 지긋한 노부부. 정겨운 이들의 모습에서 벌써 진한 벚꽃향이 풍겨나는 듯했다.

드디어 DC의 벚꽃을 구경할 수 있는 '스미소니언' 역. 이미 예상했듯이 많은 사람들이 그 역에서 내렸다. 우리는 벚꽃과의 한판 전쟁(?)을 벌이기도 전에 먼저 사람들과 전쟁을 치러야 했다.

'으이그, 징한 사람, 사람들.'

밖으로 나오니 사방이 벚꽃 천지였다. 분홍색과 흰색 벚꽃이 아름다운 호수를 배경으로 화려한 자태를 뽐내고 있었다. 사실 우리는 꽃구경을 왔다. 하지만 이렇게 이름난 축제가 늘 그러하듯이 이곳 DC의 벚꽃축제도 결국은 사람 구경을 하는 것이었다. 무심한 인간들이 아름다운 벚꽃을 가리고 있었다.

그래, 남는 건 사진뿐?

걸음을 뗄 때마다 벚꽃을 배경으로 사진을 찍는 사람들 때문에 자주 걸음을 멈춰야 했다. 이들 중에는 외국인들도 적지 않았는데 그들은 전통의상을 입고 벚꽃을 배경 삼아 온갖 포즈를 취하며 사진을 찍고 있었다.

'모델이 뭐, 별 거더냐? 그럴 듯하게 포즈를 취하면 아무나 모델인 거지.'

전통의상을 입은 상춘객이 벚꽃을 캠코더에 담고 있다.
전통의상을 입은 상춘객이 벚꽃을 캠코더에 담고 있다. ⓒ 한나영
벚꽃축제는 제 발로 걸음을 뗄 수 있는 어른들만을 위한 축제는 아니었다. 아직 걸음마도 제대로 못하는 어린 아이들도 부모를 따라 우유병을 문 채 유모차를 타고 나오기도 했다.

'왕년에 나도 워싱턴 벚꽃축제에 다녀왔지롱.'

이다음에 기억도 못할 풍경이지만 사진으로나마 아름다운 추억을 간직할 수 있으니 복 받은 아이들이다. 네 부모에게 감사할지어다.

유모차를 타고 나온 아이들
유모차를 타고 나온 아이들 ⓒ 한나영
고개를 돌려보니 삼삼오오 벚꽃나들이를 나온 어르신들도 적지 않았다. 쉬엄쉬엄 쉬어가면서 꽃구경을 하고 있는 노인분들, 아마 이런 생각을 하고 있지 않을까.

'그러게 옛날 노래 가운데 이런 노래가 있지 않은가. 노세 노세 젊어서 노세. 늙어지면 못 노나니. 화무는 십일홍이요. 달도 차면 기우나니. 인생은 일장춘몽이요. 아니 노지는 못하리라. 얼씨구 절씨구 차차차.'

"아이구, 다리야." 잠시 걸음을 멈춘 할머니들
"아이구, 다리야." 잠시 걸음을 멈춘 할머니들 ⓒ 한나영
관광버스와 유원지에서 목이 터져라 이 노래를 부르던 아줌마, 아저씨들의 흐트러진 모습과 노랫말을 혐오하던 팔팔한 10대 시절이 있었다. 그런데 이제 나이가 들고 보니 이 노랫말도 틀린 게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확실히 늙었다는 증거?

그렇지. 늙어지면 무슨 기운으로 놀 수 있단 말인가. 힘 좋고 기운 넘치고 감정이 폭포수처럼 흘러넘칠 때 놀 수 있는 것이지. 우리 인간은 원래 머리를 쓰는 '호모 사피엔스' 이전에 노는 인간 '호모 루덴스'가 아니었을까. 벚꽃 구경을 하면서 생각이 많은 철학자가 된다.

벚꽃구경을 나온 건 사람만이 아니었다. 주인을 잘 만난 개들도 꽃구경을 나왔다. 흰 개, 검은 개, 누런 개, 잿빛 개, 달마시안 같이 생긴 점박이 개. 주인 곁에 꼭 달라붙어서 눈을 두리번거리고 있는 개들, 이들은 무엇을 구경하고 있는 것일까. 벚꽃일까, 사람일까. 어느 쪽이든 주인 덕에 세상 구경을 잘 했으니 행복한 견공들이다.

주인 잘 만난 개들도 벚꽃구경을 나왔다.
주인 잘 만난 개들도 벚꽃구경을 나왔다. ⓒ 한나영
이곳에 나온 건 사람과 견공들뿐이 아니다. 바퀴 달린 것들도 모두 다 출동을 했다. 유모차, 자전거, 아이들 카트, 인라인 스케이트, 킥보드 등등.

바퀴 달린 것들, 다 모여라.
바퀴 달린 것들, 다 모여라. ⓒ 한나영
피곤한 하루였다. 꽃구경에 취하고 사람구경에 취한 긴 하루였다. 사실 예쁘게 핀 벚꽃을 이렇게 구경하는 것도 처음이었다. 하지만 꽃구경보다 더 좋았던 것은 여러 모양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을 가까이에서 관찰할 수 있다는 점이었다.

집으로 돌아오니 이곳에도 벚꽃이 흐드러지게 피었다. 하긴 벚꽃이 어디 DC에만 피었겠는가. 어머니가 계시는 한국에도 왕창 피었을 테고 내가 사는 이곳 대학의 캠퍼스에도 흐드러지게 피었다.

하늘을 뒤덮은 봄처녀 벚꽃과 눈꽃처럼 흩날리는 아름다운 벚꽃잎들, 춘삼월을 온통 핑크빛으로 물들인 그놈의 벚꽃 때문에 객지에 나와 있는 이 아줌마, 괜히 마음이 싱숭생숭해진다. 나, 지금 봄 타고 있는 거니?

벚꽃이 하늘을  덮고 그 꽃잎이 눈꽃되어 날리는 대학 캠퍼스
벚꽃이 하늘을 덮고 그 꽃잎이 눈꽃되어 날리는 대학 캠퍼스 ⓒ 한나영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독자의견

이전댓글보기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