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5일 KBS-2TV <추적 60분>이 마약운반 혐의로 프랑스의 외딴섬에 1년 6개월간 갇혀 있는 장미정씨의 사연을 소개한 이후, 정부의 재외국민 보호 문제가 또다시 도마 위에 오르고 있다.
장미정씨가 마약운반을 알고 했는가 모르고 했는가는 문제의 핵심이 아니다. 장미정씨의 유무죄 여부는 프랑스 법원에서 최종적으로 판단할 문제다. 중요한 것은, 외교통상부 관계자의 항변에도 불구하고 현지 한국 대사관이 장미정씨 보호를 위해 최선을 다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지난 2004년에 발생한 김선일씨 사건과 이번에 일어난 장미정씨 사건을 지켜보면서, 왜 우리 정부는 번번이 똑같은 우를 범하는 것일까 라는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우리가 미국을 비판하면서도 또 한편으로는 미국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은, 세계 어디든지 간에 자국민이 위기에 처하기만 하면 특공대를 보내서라도 반드시 구출해 내는 나라가 바로 미국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우리 정부는 벌써 여러 번이나 똑같은 경험을 하고 또 그때마다 국민적 비판의 집중포화를 받았으면서도, 아직도 여전히 자국민 보호를 뒷전에 두고 있는 듯한 느낌을 주고 있다. 국민의 세금으로 운영되는 정부가 자국민 보호를 등한시한다는 것은 상식적으로 납득할 수 없는 일이다. 장미정씨 사건을 지켜보는 국민들이 격렬히 분노하는 데에는 그 점도 원인이 되고 있으리라 본다.
끊임없이 터지는 자국민 보호 허점
흥미로운 것은, 자국민 보호를 소홀히 하는 것이 비단 대한민국에만 해당하는 게 아니라는 점이다. 그 점에 관한 한 대한제국도 비판을 면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당시 청나라가 자국민 보호를 위해 극성이다 싶을 정도의 행태를 보인 것과 비교하면, 조선과 그 계승자인 대한제국 정부는 그 점에 있어서는 그저 '점잖은 양반'에 불과할 뿐이었다.
청나라가 자국민 보호에 얼마나 극성이었는가는, 1883년 화교 상인들이 인천에 조계지를 얻을 수 있도록 하기 위하여 500명의 청나라 군인들을 인천에 파견하여 무력시위를 한 것에서도 잘 나타난다.
자국민 보호에 있어서 대한제국과 청나라가 얼마나 대조적이었는가는 1899년 한청통상조약(한중통상조약) 체결 이후의 상황에서도 잘 드러난다.
1899년에 대한제국과 청나라가 한청통상조약이라는 최초의 근대적 조약을 체결했는데, 조약 규정이 청나라에 불리했음에도 불구하고 청나라는 이 조약을 최대한 활용하여 한국 거주 화교 상인들을 보호하는 데에 적극성을 보였다. 그 덕분에 청나라의 1900~1904년 대한(對韓) 무역수지는 1896~1899년 기간에 비해 뚜렷이 나아지게 되었다.
그리고 <청계중외사령연표>라는 중국측 사료에 의하면, 청나라는 한청통상조약 제2관(외교관·영사 파견)을 최대한 활용하여 12개 도시를 관할하는 총 31명의 영사를 대한제국에 파견하였다. 당시 청나라가 영사를 파견한 일차적 목적은 한국에서 활동하는 화교 상인들을 보호하기 위한 것이었다.
청나라는 총 31명의 영사를 대한제국에 파견
그럼, 대한제국 정부는 어떠했을까? 현재 확인할 수 있는 자료에 의하면, 대한제국은 중국에 단 한명의 영사도 파견한 적이 없다. <청계중외사령연표>에 의하면, 1901년 10월에 중국 주재 프랑스 영사가 옌타이 주재 대한제국 영사를 겸임한 적이 있고, 1905년 8월에는 중국 주재 일본 영사인 도리키치 오바타가 역시 옌타이 주재 대한제국 영사를 겸임한 적이 있을 뿐이다. 이처럼 2명의 외국 영사가 대한제국 영사를 겸임한 적이 있을 뿐, 대한제국 영사가 중국에 직접 파견된 적은 한 번도 없었다.
그러므로 <한청통상조약>이 대한제국에 유리하게 규정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대한제국은 그 조약에 근거하여 영사를 파견하지도 않았을 뿐만 아니라 한국 상인 보호에도 별다른 노력을 기울이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이처럼 대한제국 정부가 자국민 혹은 자국 상인 보호를 소홀히 했기 때문에, 위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조약 체결 이후에 한국의 무역수지가 더 악화되는 결과를 초래한 것이다.
당시 대한제국정부는 사상 최초로 중국과 근대적인 조약을 체결했다는 점에 고무되어 있었을 뿐, 그 조약을 활용하여 국익을 증대시키고 자국민을 보호하는 일에는 별다른 관심을 두지 않았다. 조약 규정이 대한제국에 유리했음에도 불구하고 실제로는 청나라가 덕을 본 것은 바로 그러한 이유 때문이다.
대한제국정부는 자국민 보호는 뒷전에
"1900년 전후라면 대한제국의 존망이 위태롭던 시기인데, 그런 시기에 어떻게 자국민 보호에 신경을 쓰고 외국에 영사를 보낼 수 있었겠는가?"라며 이의를 제기할 사람이 있을지 모른다.
그러나 그 시기에 위기를 겪은 것은 대한제국뿐만 아니라 청나라도 마찬가지였다. 청나라도 대한제국 멸망 2년 뒤인 1912년에 멸망하고 말았다. 대한제국과 마찬가지로 국가의 존망이 위태로웠음에도 불구하고, 청나라는 '멸망하는 그 순간까지' 자국민과 자국 상인 보호에 만전을 기했던 것이다.
대한제국에서 가장 가까운 나라가 중국인데 중국에조차 영사를 파견하지 않았다면, 당시 대한제국정부의 자국민 보호가 얼마나 허술했는가를 충분히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그래서 부전자전
이러한 점들을 본다면, 자국민 보호를 소홀히 하는 대한민국정부의 문제점은 비단 오늘날의 문제점만은 아닌 것으로 보인다. 위에서 살펴본 것처럼 과거의 대한제국정부도 똑같은 문제점을 안고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부전자전'이란 표현이 이 경우에도 적용될는지 모르겠다.
그러므로 지금 외교통상부를 질책하는 것은 문제의 본질적 해법이 될 수 없을 듯하다. 이 문제가 이미 과거의 대한제국 시기에도 나타난 것이라면, 이것은 대한민국 외교통상부만의 잘못이라고 볼 수 없기 때문이다.
이것은 국민을 바라보는 한국 관료들의 인식 속에 뭔가 전통적인 문제점이 있음을 보여 주는 것이다. 그 전통적인 문제점을 규명하고 치유하지 않는다면, 김선일씨 사건이나 장미정씨 사건과 유사한 사건들이 앞으로도 계속 외교통상부를 괴롭히게 될 것이다.
덧붙이는 글 | <뉴스 615>에도 동시에 실리는 글임을 밝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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