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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하오/74*142cm/종이에 수묵 담채/2005, 개를 앞세우고 연료로 쓸 쇠똥을 지고가는 유목민의 발길이 마치 화가의 고단한 대지 여행을 보는 것 같다
어느 하오/74*142cm/종이에 수묵 담채/2005, 개를 앞세우고 연료로 쓸 쇠똥을 지고가는 유목민의 발길이 마치 화가의 고단한 대지 여행을 보는 것 같다 ⓒ 김호석/문학동네
화가의 집요한 작가정신에 경이를 표하고도 부족하다. 이성의 죽음, 예술의 위기를 경고하는 죽은 활자들이 흉흉한 소문을 만들어 내는 때에 화가는 원시의 대지, 태고의 자연과 당당히 맞선다. 그것은 삶에 대한 불타는 의지, 죽어가는 혹은 정체되어 있는 자신의 예술혼에 생명을 다시 담아내려는 처절한 희생이 없으면 불가능한 일이다. 하찮은 일상에 허덕이고 작은 욕심에 연연하며 시간의 노예로 살아가는 내게 그의 수묵화는 짙은 먹빛만큼이나 깊은 충격으로 다가온다.

그것은 부끄러움이고 졸렬한 핑계와 변명을 단칼에 베는 날카로운 비수다. 책을 읽고 영화를 보고 미술관과 공연장에 가는 또 다른 이유는 전망의 혼돈에서 벗어나 새로운 삶의 에너지를 흡수하기 위함이다. 그렇다. 나는 그의 그림을 보면서 내게는 잊혀졌던 의지의 푯대를 다시 세우기도 하고 지지부진한 일상의 찌꺼기들을 치워버릴 수 있는 용기를 얻는다. 그의 대지에서, 그 광야를 휘돌아 오르는 돌개바람에서, 자연의 재앙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살아가는 인간의 겸손함 속에서 나는 내 존재의 가벼움을 느끼고 실감한다.

많은 그림들이 있다. 화첩의 말미에 게재된 시인 김형수의 관전기나 미술사학자 이태호의 평론은 그림을 이해하는데 유용한 관점을 제공해준다. 그러나 그들의 눈길을 따라 그림을 보고 싶은 마음은 없다. 나는 내 삶과 그 안에 중첩되어 있다 내 시선을 따라 나오는 내 경험의 눈길로 그림을 볼 뿐이다. 독자들 역시 마찬가지다. 그림이며 모든 예술작품들이 그 안에서 수많은 이야기들을 속닥거리지만 구태여 그것을 들으려 애쓸 필요는 없는 것이다. 오직 나와 그림과 교우할 뿐이고 그것을 창조한 작가의 정신과 고민을 가끔씩 훔쳐보는 것으로 족하다.

늑대가 오는 밤/103*141cm/종이에 수묵/2003, 늑대 울음소리에 잠 못 드는 유목민 노파의 사실적인 표정이 그들이 사는 대지의 일상을 보여주는 듯하다.
늑대가 오는 밤/103*141cm/종이에 수묵/2003, 늑대 울음소리에 잠 못 드는 유목민 노파의 사실적인 표정이 그들이 사는 대지의 일상을 보여주는 듯하다. ⓒ 김호석/문학동네
끊임없는 광음(光陰)을
부지런한 계절이 피어선 지고
큰 강물이 비로소 길을 열었다.

.......

다시 천고(千古)의 뒤에
백마(白馬) 타고 오는 초인(超人)이 있어
이 광야(曠野)에서 목 놓아 부르게 하리라


그림을 보면서 문득 이육사의 시 <광야>를 떠올렸다. 내게는 원시의 대지를 수묵으로 담아낸 김호석의 붓이 마치 초인의 붓처럼 느껴졌다. 초인이 별건가. 이 시대 이 땅의 죽어가는 정신의 그림자에, 삶이란 반드시 참고 살아내야 하는 숙연한 소명인 것을 우리에게 일깨우면, 그것이면 초인으로 충분한 것 아닌가. 그 초인의 수묵화에는 죽음이 있고 그 죽음을 딛고 다시 살아나는 장엄한 생명이 있다. 그 초인의 붓에서는 대지의 바람이 일고 재앙 속에서도 담담히 자신의 숙명을 일구는 사람들의 표정이 살아난다.

정착문명인 농경문화와 달리 고단한 이동 또는 유랑의 숙명을 안고 살아가는 목축문명 속의 대지는 원시의 모습으로 여전히 남아 있다. 그것을 담아낸 화폭은 그래서 크고 넓어질 수밖에 없다. 몇 번의 붓질로 그려낸 대상의 윤곽보다 그래서 김호석의 수묵화에는 남은 여백이 더 많은 이야기와 삶을 우리에게 들려준다.

조드(‘강’이라 불리는 여름의 가뭄 뒤에 찾아오는 겨울의 극심한 가뭄과 혹한의 재앙)를 이기기 위해 먹을 풀을 찾아 눈밭을 헤치다 그대로 얼어 죽은 소 그림(하늘에서 땅으로)에서는 처연한 생의 의지가 엿보이고 몰살된 가축더미(목축민의 전재산이다) 곁에서도 담담한 표정으로 숙명적 삶을 받아들이는 노파의 표정(조드, 사는 것과 죽는 것, 대지의 수줍은 주인들 등)은 쉽게 포기하고 너무 쉽게 지치는 우리네 삶에 대한 조소다. 하늘마저 말라 갈라진 대지, 죽은 소의 썩어가는 시신 사이에서 패랭이꽃은 피고(소갈비 사이에 핀 패랭이) 나비는 삶의 윤회를 상징하듯 날아오른다(죽음과 나비).

말이 매어 있어야할 자리에 죽은 말가죽만이 그려진 죽음의 대지(소멸)를 독수리는 알을 깨듯 땅거죽을 찍으며 태어난다(생성). 동물들은 죽어서도 인간과 대지를 위해 자신의 몸을 바치고(하늘의 애도, 죽은 염소, 양은 가죽을 남기고 등) 그 고귀한 희생 위에서 대지는 새로운 생명을 잉태한다(아르가르의 향기). 무참한 재앙이 몰고 올 대지의 죽음(대자연에게 살해되다, 대지의 마지막 풍경, 쓰러진 야크 등) 앞에서도 그들의 삶은 초연하고(형제, 천국의 아이들, 거인의 잠, 나담의 뒤켠) 대자연의 공포 앞에서도 천연덕스럽게 똥을 누는 아이들의 순수한 동심(초여름)과 자연에 순종하고 그 자연을 숭상하는 신앙(셔먼)은 곧 대지의 야생이 문명에게 보내는 준엄한 경고다.

대지를 사는 사람들(소녀, 보이르 호수, 경계 등)은 소박하다. 이방인의 침입에 놀란 그들의 시선은 인간에 대한 경계라기보다는 오히려 자신들의 불안을 드러낸다. 말 타기 경주에서 낙담하여 집으로 돌아가는 젊은이의 뒷모습에서는 진한 연민(그리움)이 솟고 하늘 위에서 벌어진 말타기 경주(해 뜨는 곳에서 해 지는 곳까지)에서는 이성을 자랑하며 야만을 비웃던 서양의 자존심을 무참히 짓밟았던 저 먼 옛날의 웅자가 배어 있다. 그들 또한 초인(草人)이다. 초원을 삶의 터전으로 삼아 욕심 없이 살아가는 그들 앞에서 우리는 더 없이 작은 존재일 뿐이다. 적어도 내게 김호석은 그렇게 일깨우고 있는 듯이 보인다.

여전히 비는 내리고 바람은 창밖에서 이신들이 꿈틀대는 밤의 여윔과 죽어감을 슬프게 호곡하고 있다. 보고 또 보고 서양그림에 익숙해진 일천한 내 심미안에, 진정한 의미에서 처음으로 다가온 수묵화는 이 밤을 행복하게 견디도록 해준다. 불혹의 나이를 넘어서야 내게 다가온 그림들은 어쩌면 버리고 잊으며 산 아름다운 기억의 순정(純晶) 같은 것이다. 독자 여러분과 그 아름다운 경험을 나누고 싶어 플래시로 만들었다. 독자 여러분도 저 위대한 대지의 적멸을 함께 느끼며 어제와 다른 내일의 삶을 발견하기 바란다. 밤은 빗속에서도 부지런히 제 갈 길을 간다.


ⓒ 김호석/문학동네

* 아래 사각형 버튼에 마우스를 대시면 해당 그림으로 이동합니다.
* 그림 중 몇 점은 플래시 제작을 위해 중심 이미지만을 잘라 게시하거나 가로 세로 균형비를 맞추기 위해 약간의 왜곡이 있을 수 있습니다.

덧붙이는 글 | * 문명에 활을 겨누다/김호석/문학동네/2만2000원


문명에 활을 겨누다

김호석 지음, 문학동네(2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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