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미관계가 더 시급
첫째, 지금 북한은 세계 최강 미국의 압박정책에 맞서는 한편 미국의 견제를 뚫고 경제성장을 추진해야 할 중대한 과제를 안고 있다. 이처럼 사실상 거의 모든 '신경망'이 대미관계에 집중되어 있는 상황에서, 서울 답방으로 '예의'를 갖추기는 힘들 것이다.
둘째, 한국이 경제·외교적 측면에서 강한 대미(對美) 의존적 자세를 보이고 있는 상황에서, 북측이 남측과의 담판에서 어떤 수확을 기대하기는 어렵다.
김 위원장의 서울 답방은 북한 국민에게 큰 희망을 주는 사건이 될 것이다. 경우에 따라서는 지금 당장에라도 통일이 이루어질 것 같은 기대감이 조성될 수도 있다. 그런 상황에서 김 위원장이 아무런 소득 없이 평양으로 돌아간다면, 이는 김 위원장의 리더십에도 적지 않은 영향을 주게 될 것이다.
한국이 한반도 문제에 관하여 자주적 결정권이 있다면 모르지만, 미국이 거의 모든 것을 좌지우지하고 있는 상황에서 미국을 배제한 채 남과 북이 단둘이 만나는 것은 별다른 의미가 없는 것이다.
담판하려면 미국과 하는 게 더 효율적
이는 '인질 협상'의 경우와도 같은 것이다. '인질범'에게 억류되어 있는 '형제'를 빼내려면, 일단 인질범을 만나는 게 순리일 것이다. 억류 중인 '형제'를 만난다는 것도 힘들겠지만, 설사 만난다고 하더라도 그저 "몸조심하라"는 안부 인사만 전해줄 수 있을 따름이다.
물론 일부 국민은 이 문제를 '인질 협상'에 비유하는 것을 못마땅하게 생각할지 모르지만, 중요한 것은 북측에서 그런 인식을 갖고 있다는 점이다. 그러한 인식이 있기 때문에 북측으로서는 서울 답방에 소극적이 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셋째, 한국전쟁이 기술적(技術的)으로는 아직도 '진행 중'인 데다가 주한미군사령관이 국군의 전시작전통제권을 갖고 있는 상황에서 김 위원장이 휴전선을 넘는 것은 신변상으로 볼 때에도 대단한 '모험'이 아닐 수 없다.
평시에도 사실상 주한미군이 통제권 행사 가능
형식상으로는 주한미군사령관이 전시작전통제권만 갖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질적으로 볼 때에는 평시작전통제권도 주한미군사령관이 갖고 있다고 보는 게 타당할 것이다. 필자가 <전시작전통제권 회수가 시급하다>(2004년 9월 2일자)라는 기사에서 강조한 바와 같이, 1994년 12월 1일부터 한국군 합참의장이 평시작통권을, 주한미군사령관이 전시작통권을, UN군 사령관이 평화유지 및 휴전협정 업무권을 행사하고 있다.
주한미군사령관이 UN군 사령관을 겸임하고 있으므로, 주한미군사령관의 권한은 전시작통권뿐만 아니라 평화유지 및 휴전협정 업무권에까지 미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주한미군사령관의 평화유지 및 휴전협정 업무권이 한국군 합참의장의 평시작통권을 사실상 침해할 소지가 있다는 것이다. 전시가 아니더라도 주한미군사령관이 평화유지를 위해 필요하다고 판단하면 한국군 합참의장의 평시작통권을 침해할 가능성이 있음을 배제할 수 없다.
이처럼 주한미군이 전시작통권뿐만 아니라 사실상 평시작통권까지 행사할 수 있는 상황에서, 김정일 위원장이 서울을 방문하는 것은 '적지'에 들어가는 것과 마찬가지다. 게다가 위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지금 북한과 미국은 엄밀한 의미의 전쟁상태에 있다.
미국은 무슨 짓이든지 할 수 있는 나라
노리에가 전 파나마 대통령을 마약 혐의로 체포한 데에서도 드러나는 바와 같이, 미국은 주권국가 대통령을 '잡범' 혐의를 씌워 미국의 감옥에 집어넣을 수 있는 나라다. 그런 미국의 군대가 장악하고 있는 휴전선 이남에 김정일 위원장이 발을 들여놓는다면, 북-미 간에 '불미스러운 사태'가 생기지 말란 보장도 없을 것이다.
필요하다고 판단되면, 미국은 전시 개념을 활용하여 전시작통권을 발동할 수도 있고 혹은 전시 개념을 활용하지 않더라도 평화 유지권을 발동해서라도 '소기의 목적'을 달성할 수 있을 것이다.
북한이 미국의 불순한 의도를 특히 경계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은, 북한 정치체제에 대한 미국의 판단착오 때문이다. 김일성 주석이 없음에도 지난 12년간 잘 유지되었듯이, 설령 김정일 위원장이 없더라도 북한은 얼마든지 돌아갈 수 있는 나라다.
그런데 미국은 김 위원장만 없으면 북한이 단 하루도 못 버틸 것처럼 인식하는 경향이 있다. 그렇기 때문에 미국은 김 위원장의 '몸값'을 지나치게 과대평가하고 있을 가능성이 있다. 그런 인식을 갖고 있기 때문에 그들은 서울을 방문한 김 위원장에게 '불순한 행동'을 할 수도 있는 것이다.
주한미군이 두려운 것은 아니겠지만, 지금 같은 위기 상황에서 국가 지도자가 굳이 불미스러운 일을 자초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만약 미국 측이 김 위원장의 신변을 보장한다면 모르겠지만, 한국정부만 믿고 서울 답방에 나섰다가는 '종잡을 수 없는 상황'이 전개될지도 모르는 것이다.
김대중 전 대통령이 방문한 북한은 김정일 국방위원장과 조선인민군이 책임을 지고 관할하는 지역이지만, 김정일 위원장이 방문하게 될 한국은 그렇지 못하다. 한국 대통령과 국군이 100% 책임을 질 수 있는 곳이 아니다.
어찌 보면, 김 위원장과 북한 지도부 입장에서는 서울을 방문하는 것보다 워싱턴을 방문하는 것이 차라리 더 나을 수도 있다. 워싱턴을 방문한다는 것은 미국이 직접 신변보장을 한다는 것이고 또 워싱턴에 가야만 한반도 문제의 책임자를 만날 수 있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살펴본 바와 같이, 북측 입장에서는 서울 답방에 나서는 것이 '예의'에 맞는 일이지만, ▲미국과의 대결에 국운을 걸고 있는 현실 ▲한국이 한반도문제에 대한 발언권이 약하다는 점 ▲휴전선 이남 지역의 군사권이 사실상 주한미군 수중에 있다는 점 등 때문에 지금 당장으로서는 서울 답방에 나서기 힘든 상태에 놓여 있다.
북측이 서울 답방에 소극적인 태도를 보이는 것을 두고 남측의 저자세 탓으로 돌릴 수는 없다. 이는 우리 민족이 아직도 외세의 지배를 온전히 극복하지 못했기 때문에 겪고 있는 불행의 소산일 뿐이다.
덧붙이는 글 | <뉴스 615>에도 동시에 실리는 글임을 밝힙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