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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도의 복사꽃
청도의 복사꽃 ⓒ 강제윤
여전히 나는 기차를 타고 있다. 30년 전의 그 선로 위에 있다. 부산과 마산의 갈림길, 나는 방금 전 삼랑진 역을 지나왔다. 분분히 꽃들이 진다. 지는 꽃이 있으니 피는 꽃도 있다. 산 언덕마다 복사꽃, 자두꽃, 배꽃, 싸리꽃, 꽃사태가 일어날 조짐이다.

나는 여전히 삶에서 한 발짝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지금의 나는 누구인가. 30년 전 처음 가출을 했던 길이 이 경부선 열차 길이었다. 어린 날의 구도행, 열차를 타고 집 떠났던 30년 전의 내가 지금의 나는 아니다. 내 마음을 빌려 살다간 숱한 몸들. 내 몸을 거처간 숱한 마음들.

삶의 초월 따위는 없다. 춥다. 방수가 되는 등산복을 입었으나 비를 피할 수는 없었다. 빗방울은 옷을 뚫고 몸 속으로 스며들지 못하지만 오한은 방수복쯤 가볍게 투과한다. 열차는 자주 연착된다. 고속 열차를 먼저 보내기 위해 자주 숨죽이고 몸을 웅크린다. 나는 불평할 수 없다. 저속 열차를 탄 것은 나의 선택이 아니었는가. 느림을 찬양하거나 빠름을 비난하는 것이야 자유지만 느림이나 빠름 그 자체는 선도 악도 아니다. 나 또한 광속으로 날아 이 지구를 벗어나고픈 때가 어디 한두 번이었던가. 빛의 속도까지는 아직 멀다. 그러나 빛이 가는 길이라면 사람인들 어찌 못가겠는가.

청도의 자두꽃밭
청도의 자두꽃밭 ⓒ 강제윤
돌이켜 보면 삶이 내 소망대로 이루어진 적은 없었다. 하지만 나는 내 삶이 실패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애초부터 삶에는 실패나 성공 따위란 없는 것이다. 성공한 삶도 없고 실패한 삶도 없다. 서로 다른 삶이 있을 뿐. 삶은 비교 대상이 아니다. 누구도 삶을 벗어날 수 없는 것. 누가 감히 삶의 판관일 수 있겠는가. 어제는 어제의 삶을 살았고 오늘은 오늘의 삶을 사는 것뿐이다. 너는 너의 삶을 살고 나는 나의 삶을 살아갈 뿐이다. 그것이 전부다. 우리는 늘 삶에 대해 서툴다. 그렇다고 삶이 실수투성이인 것을 책망하거나 탓할 이유는 없다. 누구나 처음 살아보는 삶이 아닌가.

때때로 마음은 전능하다. 마음은 시간의 유일한 주재자다. 수십 년 세월을 순간으로 만드는 것도 마음이다. 나를 여기까지 데려온 것은 30년이 아니다. 순간이다. 사라져 버린 모든 시간은 순간이다. 끝내 열차는 나를 청도역에 부려 놓고 멀어져 간다.

청도에서의 두 달. 청도 한옥학교에 적을 두고 살아온 시간이다. 애초부터 목수가 되고자 했던 것은 아니었다. 부랑자가 되어 떠돌면서도 나는 여전히 남의 살을 뜯으며 살았다. 손 기술 하나쯤 배워 두면 남에게 해를 덜 끼치며 살 수 있겠지 싶었다.

그러나 생각처럼 공부가 쉽지는 않다. 머리보다 몸 쓰는 일을 하고 싶었다. 웬걸, 몸만 쓰면 되는 줄 알았던 집 짓는 일에 머리 쓰는 일이 더 많다. 세상에 쉬운 일이 어디 있겠는가. 머리가 못 따르면 몸이라도 부지런해야겠지. 근로 장학생. 나는 한옥 학교의 화장실 청소 등을 하는 청소부로 일하며 학비를 면제 받고 있다.

같은 한국 땅에 살면서도 청도에 대해 아는 사람은 많지 않다. 내가 처음 청도에 간다고 했을 때 사람들의 반응은 대부분 '거기가 어디지?'였다. 그도 아니면 중국의 칭따오냐고 묻기 일쑤였다. 청도는 그렇듯 낯선 곳이다. 그 낯선 곳에서 매일 잠들고 일어난다. 운문사나 청도 소 싸움 때문에 간신히 청도를 기억하는 사람도 있겠지만 청도는 이영도(1916~1976) 시인의 고향이기도 하다. 물론 이영도 시인을 아는 사람은 더욱 드물겠지. 나는 이영도 시인을 진달래란 시로 기억한다. 정확히는 진달래라는 노래다.

이영도 시인 생가
이영도 시인 생가 ⓒ 강제윤
4·19가 다가오면 생각 나는 노래. 진달래 꽃만 보면 웅얼거리는 그 처연한 노래. 진달래. 이영도 시인은 시조 시인 이호우의 여동생이기도 하다. 청도의 끝자락, 밀양과 경계 지점, 유천 내호리에 이영도 시인의 생가가 있다. 이승과 저승, 어느 길목으로 다들 떠나고 시인의 옛 집에는 재종 올케, 육촌 동생의 아내 혼자 살고 있다.

시인의 생가 가는 길에 검문을 받았다. 복사꽃 환한 유천 검문소. 기소 중지자를 잡기 위한 검문이었지만 다행이 나는 잡히지 않았다. 나는 죽음의 기소 중지자인 동시에 삶의 수배자다. 남매 시인의 시비 아래로 비파강이 흐른다. 비파라는 단어는 언제나 신비롭다. 지금쯤 내 고향집의 비파 열매들도 익어 가고 있을 것이다. 날이 흐리다. 해가 지려는가. 꽃시절인데, 꽃 피는 것이 왜 이다지도 서러운 것일까. 목이 메인다. 비라도 한바탕 쏟아졌으면 좋겠다.

눈이 부시네 저기/ 난만히 멧등마다,
그 날 스러져 간/ 젊음 같은 꽃사태가,
맺혔던 한이 터지듯/ 여울여울 붉었네.
그렇듯 너희는 지고/ 욕처럼 남은 목숨,
지친 가슴 위엔/하늘이 무거운데,
연연히 꿈도 설워라./ 물이 드는 이 산하.
(이영도, 진달래)


요즈음 청도는 온통 환하다. 진달래만이 아니다. 여기저기 꽃등이 켜져 있다. 이 산 언덕에도 복사꽃등, 저 산 비탈에도 복사꽃등, 드문드문 살구꽃등, 배꽃등, 싸리꽃등. 어둠을 밝히는 것이 등이라면 생명을 밝히는 것은 꽃이다. 우리 누추한 삶의 한 때를 환히 밝혀주는 꽃. 그중에서도 단연 압권은 복사꽃이다. 논과 밭, 산 등성이까지 청도에서 복숭아 나무가 심어지지 않은 땅이란 없다. 곡식보다 과일. 예전에는 생각지도 못한 일이다. 곡식이 귀하던 시절, 그 때는 그늘이 곡물에 해롭다 하여 밭가의 나무들이 좀 커진다 싶으면 모조리 베어냈었다. 과일나무도 예외는 아니었다.

산에 유실수를 심은 것은 아무래도 잘한 일이다. 경사가 급한 언덕이나 산비탈 땅에도 예외 없이 과일 나무가 심어져 있다. 어제의 가난이 송곳 꽂을 틈도 없더니 오늘은 송곳 꽂을 자리만 있어도 유실수를 심었다. 복숭아, 자두, 배, 감나무들. 지금은 밑둥이 굵고 튼실하다. 십수 년은 족히 됐겠지. 키우고 가꾸느라 평지보다 몇 배는 품이 들었을 것이다. 거기서 탐스럽고 단 과실이 거두어진다.

청도 어느 곳이나 무릉 도원이다
청도 어느 곳이나 무릉 도원이다 ⓒ 강제윤
사람 살이가 비탈 밭에 과일나무를 심는 일쯤만 된다 해도 얼마나 좋겠는가. 아무래도 사람살이는 매정하다. 비탈 밭에 심고 가꾸어도 꽃 피고 열매 맺지 못하는 삶이 대다수다. 삶이 지옥일수록 꽃밭은 무릉도원이다. 4·19나 5·18, 세상의 모든 혁명은 무릉도원을 향한 도정이 아니었겠는가. 무릉도원, 이상향, 용화 세계, 유토피아. 유토피아란 세상에는 없는 곳을 뜻한다. 세상엔 없는 곳을 지향하는 것은 고통이다. 하여 우리는 꽃들의 세상에 와서도 결코 꽃에 이를 수는 없다.

꽃이 피고 지는 날들. 생사란 무엇인가. 진실로 삶도 없고, 죽음도 없는 것인가. 삶이란, 죽음이란 순간 순간 이어지는 어떤 국면들에 지나지 않는 것일까. 일생 동안 나는, 죽음과 부활을 반복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삶을 붙들고 떠 있으나 끝내는 삶이 아닌 것들, 저 꽃들, 구름들, 햇빛들. 앞에 있으나 앞에 있지 않은 것들, 먼 것들…. 끝끝내 이를 수 없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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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이자 섬 활동가입니다. 사단법인 섬연구소 소장을 맡고 있으며,<당신에게 섬><섬을 걷다><전라도 섬맛기행><바다의 황금시대 파시>저자입니다. 섬연구소 홈페이지. https://cafe.naver.com/island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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