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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기봉 할아버지. 연세에 비해 정정하시다.
한기봉 할아버지. 연세에 비해 정정하시다. ⓒ 박철
우리집 식구가 강화도 교동에서 살 때, 그 동네에서 연세가 제일 많으신 한기봉 할아버지(87)와 강한옥 할머니(82)가 사셨습니다. 고향이 연백 신기였는데, 6·25전쟁 이후 식솔을 이끌고 피난 차 오신 것이 바다 건너 고향 땅이 빤히 바라보이는 교동에 눌러 앉게 되셨습니다. 우리 내외는 이 두 분 신세를 참 많이 졌습니다.

두 내외분이 얼마나 다정하셨는지 한 번도 집안에서 큰 소리가 나는 법이 없으셨고, 할아버지는 할머니께 늘 존대를 하셨습니다. 살림살이는 변변치 않았습니다. 초가에 슬레이트 지붕을 얹은 남루한 집이었지만, 집안 구석구석 할아버지의 손때가 묻어 있었고 군데군데 재활용품이 눈에 띄었습니다. 그럼에도 조금도 초라해 보이지 않았고 정겹고 친밀했습니다.

두 어르신네는 하루 종일 텃밭에서 지내셨는데, 그 흔한 제초제 한 번 안 치고, 직접 두엄을 만들어 밭에 뿌리고 온갖 정성을 쏟았습니다. 그 밭에서 나오는 결실은 마늘이고 고추며 푸성귀하며 언제나 최고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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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내외가 교동에서 8년을 살았는데 밥을 제일 많이 얻어먹었던 집이었습니다. 후일담이지만 내가 2년 전 이 두 분의 이야기를 <오마이뉴스>에 기고한 적이 있었는데, 방송사에서 그걸 보고 연락이 와 작년 봄 두 분이 다정하게 지내시는 모습이 SBS-TV <신인간시대>에 나오기도 했습니다.

한기봉 할아버지와 강한옥 할머니. 인정많기로 소문이 나신 분들이다.
한기봉 할아버지와 강한옥 할머니. 인정많기로 소문이 나신 분들이다. ⓒ 박철
그런데 이야기는 지금부터입니다. 며칠 전 한기봉 할아버지가 갑자기 행방불명이 되셨다는 것입니다. 할아버지가 어딜 나가면 나가신다고 말씀을 하셨는데, 이 날은 아무 말씀도 없이 집을 나가셨습니다.

점심시간이 훌쩍 지났는데도 할아버지가 나타나지 않으셨습니다. 온 동네가 발칵 뒤집혀질 수밖에요. 동네 사람들이 동원이 되어 산이고 들이고 할아버지를 찾아 나섰는데, 할아버지를 보았다는 사람이 없었다고 합니다. 강한옥 할머니는 애간장이 탈 수밖에요.

그런데 저녁나절 한기봉 할아버지가 우리 어머니 집에 나타나셔서 자전거에서 무언가를 한 자루 마당에 내려놓으면서 이렇게 말씀하셨다고 합니다.

"이거 목사님이 좋아하시는 건데, 부산에 사는 아들 목사님께 보내드리기요."

그날 아침, 한기봉 할아버지가 불현듯 내 생각이 나셨던 모양입니다. 내가 평소에 고들배기 김치를 좋아했는데 그걸 생각하시곤 이른 아침, 집을 나와 온 들로 다니시며 고들배기를 캐셨던 것이었습니다. 그것도 모르고 사람들은 할아버지가 행방불명이 되었다고 걱정을 했던 것이었습니다. 하루 종일 점심도 거르신 채 고들배기를 캐셨을 할아버지를 생각하면 몸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할아버지가 캔 고들배기로 담근 사랑표 고들배기 김치.
할아버지가 캔 고들배기로 담근 사랑표 고들배기 김치. ⓒ 박철
한기봉 할아버지와 강한옥 할머니는 "우리 두 늙은이가 죽으면 박 목사가 땅에 묻어주시기요"하곤 입버릇처럼 말씀하시곤 하셨는데, 그 약속을 지키지 못하고 교동을 떠나왔습니다. 그것이 체한 듯 늘 마음에 걸렸는데, 두 어르신은 이 못난 사람을 잊지 않고 자식같이 살갑게 마음에 담아 두고 계셨던 것이었습니다.

오늘 오후 택배가 집에 도착했습니다. 한기봉 할아버지가 들에서 캔 고들배기로 김치를 담가서 어머니가 택배로 보내주셨습니다. 어머니는 고들배기 김치뿐만 아니라 오이소박이, 각종 양념, 잡곡까지 한 양동이를 보내주셨습니다.

마침 점심때라 따순 밥에 고들배기 김치와 어머니가 보내주신 찬으로 식탁이 풍성했습니다. 식탁 앞에서 아내는 연신 눈물을 훔쳤습니다.

어제만 해도 황사와 바람이 심했는데, 오늘은 날씨가 유리알처럼 말끔해졌습니다. 내가 어디서 몸을 붙이고 살든지 누군가로부터 이토록 절실한 느낌을 받고 있다는 것만큼 애틋함이 또 어디 있겠습니까?

나의 스승 예수께서 "너희가 대접을 받고 싶거든 먼저 남을 대접하라"고 하셨는데, 그 말씀은 제대로 실천하지 못하고 거꾸로 늘 대접을 받기만 하니 부끄러울 따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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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철 기자는 부산 샘터교회 원로목사. 부산 예수살기 대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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