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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리계에 갓 입문할 즈음인 1936년 15세의 이은주(본명 이윤란) 명창의 앳된 모습.
소리계에 갓 입문할 즈음인 1936년 15세의 이은주(본명 이윤란) 명창의 앳된 모습. ⓒ 이은주
1930년대에 방송에 출연한 사람이 2006년에도 방송에 출연하고 있다면 믿을 수 있을까? 믿기 힘들겠지만 사실이다. 경기민요계의 두 원로인 묵계월(86세) 명창과 이은주(85세) 명창이 그 주인공이다.

묵계월 명창은 1933년·이은주 명창은 1939년, 경성방송국 라디오프로그램에 첫 출연하면서 공식적인 방송데뷔를 했다. 데뷔연수를 따진다면 묵계월 명창은 74년, 이은주 명창은 68년이 되는 셈이다.

그러나 묵계월 명창은 건강이 좋지 않아 2005년 이후로 방송활동을 비롯한 공식활동을 접은 상태다. 반면 이은주 명창은 여전히 TV, 라디오 출연을 비롯해 음반취입, 무대활동을 왕성하게 하고 있어 후학들의 귀감을 사고 있다.

최근 이은주 명창은 자신의 소리입문 70년을 기념하기 위해 4월 27일 국립국악원 예악당에서 열리는 '소리연 85' 공연의 완성도를 높이려 몸소 하루로 거르지 않고 제자들의 연습현장을 지켜보며 분장부터 옷매무새 하나까지 일일이 살펴주고 소리를 다듬어 주는 등 막바지 구슬땀을 흘리고 있다.

공연준비로 분주한 이은주 명창을 만나 근황을 살펴보고 그의 예술세계와 공연에 대해 이야기를 들어보았다.

- 85세의 고령임에도 불구하고 왕성한 활동을 하고 계신데, 건강을 유지하는 특별한 비결이라도 있습니까?
"특별한 비결은 없어요. 주변에서 '85세, 85세' 하니깐 85세라고 생각하지 나이를 잊고 산지 오래예요. 다만 올 겨울 워낙 변덕스런 날씨 때문에 감기로 한달을 넘게 고생했는데 그 이후로 목이 많이 쇠한 느낌은 있어요."

1954년 서울중앙방송국 라디오프로그램 녹음중 성금연, 김옥심등과 함께
1954년 서울중앙방송국 라디오프로그램 녹음중 성금연, 김옥심등과 함께 ⓒ 김칠이
- 경기민요계에는 언제 입문했습니까?
"1936년 15세에 입문해 원경태 선생에게서 잡가와 시조, 가사 등을 사사받았습니다. 어릴 적 축음기에서 흘러나오는 이영산홍이니 김옥엽이니 백모란이니 하는 당대의 명창들의 소리가 너무 좋아 나도 나중에 저런 소리꾼이 되어야겠다는 꿈을 가졌죠. 소리도 제법 잘해 주위로부터 소리꾼이 되라는 권유를 많이 받기도 했구요.

하지만 평범하게 살길 바라던 부친의 완강한 반대에 부딪혀 그 꿈을 접고 있다가 어머니와 상의, 야반도주하듯 고향 양주를 빠져나와 그 길로 원경태 선생님을 찾아가 소리를 배웠습니다."

- 당시 수업방식은 요즘과 많이 달랐습니까?
"다르다 뿐이겠습니까? 요즘이야 시대가 많이 좋아져 녹음기술도 발달되고 해서 매일같이 수업을 받지 않아도 학습할 수 있는 여건이 되지만 그 당시만 하더라도 철저하게 구전심수에 의한 수업이라 하루라도 빼먹으면 수업을 못 따라가고 뒤처져요. 수업방식도 워낙 혹독해 소리를 그만두고 싶을 정도로 맞기도 많이 맞았어요. 채로 맞아가며 배운 덕분에 그만큼 단단하고 좋은 소리를 배울 수 있었죠. 옛날 명창들이 그냥 명창들이 아니에요. 요즘 제자들은 참 편하게 배우는 편이죠."

이은주 명창은 1948년 고려레코드와 킹스타레코드에 첫 음반 취입한 이래 무려 400여장의 음반을 녹음했다. 사진은 1954년 고려유니버셜레코드사의 유성기음반 <태평가>.
이은주 명창은 1948년 고려레코드와 킹스타레코드에 첫 음반 취입한 이래 무려 400여장의 음반을 녹음했다. 사진은 1954년 고려유니버셜레코드사의 유성기음반 <태평가>. ⓒ 김칠이
- 처음 방송 출연한 게 1939년이라고 들었습니다. 어떤 계기로 출연하게 되었으며, 또 당시에는 어떤 방식으로 녹음이 이루어졌는지 궁금합니다.
"1939년 인천 홍명극장 명창대회가 있었어요. 원경태 선생님이 대회에 한번 나가보라고 권유하셔서 나갔죠. 저는 경기소리꾼이지만 당시 서도소리도 배웠죠. 원래 경기소리꾼들은 무대에서 서도소리를 쉽게 하지 못해요. 평안도 특유의 억양으로 부르는 맛을 제대로 살리지 못하거든요. 그런데도 서도소리의 대표적인 소리인 <수심가>를 고집했어요. 1등을 했죠. 당시 채점은 심사위원이 아니라 관중들의 호응을 보고 하는 방식이었어요. 이후 '이윤란'이라는 이름이 널리 알려졌고 스승은 목소리가 구슬같이 이쁘다 해서 '이은주'라는 예명을 주셨어요.

이런 소문이 방송국으로도 들어간 거죠. 며칠 후 방송국에서 방송출연 제의가 들어왔어요. 첫 방송출연 때 얼마나 긴장되던지 아직도 그 때가 눈에 선합니다. 당시는 녹음방송이란 게 없고 모두 생방송이었어요. 좁은 녹음실 안은 무척 더웠어요. 어디서 구해다놨는지 큰 그릇에 얼음이 가득 담겨있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처음 방송출연한 소리꾼들이 더위에 긴장에 가사를 잊어버리는 경우가 허다해서 임시방편으로 갖춘 거였는데 반응이 좋아 계속 놓아두었다고 하더군요. 그날 악사반주에 맞춰 <경기12잡가> <소춘향가>며 민요를 불렀습니다."

- 최근에 음반취입을 했다고 들었습니다. 어떤 곡들로 구성되어 있습니까?
"이번에 발매한 음반은 편집음반이에요. 그런데 여느 편집음반과는 좀 다르죠. 제가 처음 음반취입한 게 1948년 쯤인데 그 때 이후로 나온 음반들 가운데 <이별가> <태평가> <긴아리랑> <정선아리랑> 등 제가 무대에서 잘 부르는 민요 위주로 선곡했어요. 그리고 지난 3월 녹음한 <이별가>와 <할렐루야 상사디야> 두곡을 포함시켰죠. 민요외에 회심곡과 12잡가 중 <형장가>와 <집장가>를 선곡했는데 <형장가> 음원은 이번에 처음 공개된 거예요."

묵계월 명창과 이은주 명창은 70년간 경기민요를 전승보급시켜온 살아있는 민요계의 전설이며 오랜 지우이기도 하다.
묵계월 명창과 이은주 명창은 70년간 경기민요를 전승보급시켜온 살아있는 민요계의 전설이며 오랜 지우이기도 하다. ⓒ 김칠이
- <할렐루야 상사디야>는 어떤 곡인가요?
"일종의 국악찬양곡이에요. 서도소리꾼인 이문주씨가 작사·작곡한 곡이죠. 남도 소리꾼들이 즐겨부르는 단가 <백발가>류의 노래지만 신앙에 귀의하자는 면에서는 조금은 경건한 노래라고 이해하면 될 듯해요. 저는 이 곡을 <인생가>라고 부르죠. 대중적으로 잘 알려진 '바이날로그'라는 그룹에서 피아노를 담당하고 있는 양승환군이 반주를 맡아줘 정말 편안하게 노래불렀습니다."

- 처음 공개되는 12잡가 <형장가>는 어떤 곡인가요?
"사실 이 음반이 나오기 전까지 저는 이 노래를 녹음했는지조차 기억하지 못했어요. 무대공연에서 12잡가를 부르는 일이 흔하지 않은데다 12잡가 음반 취입을 본격적으로 한 게 70년대 후반부터니깐요. 1975년으로 기억됩니다. 명고수 이정업씨가 작고하기 전에 녹음실에서 김옥심씨하고 저한테 다짜고짜 12잡가 한곡씩을 불러보라 해서 목푸는 정도로 불렀죠. 김옥심씨는 <평양가>를, 저는 <형장가>를 불렀는데 다행히 음원이 남아있다니 저도 놀랬어요. 형장가는 춘향이가 형장에서 매를 맞고 옥고를 치르는 장면을 도드리장단으로 부르는 곡이에요."

- 각별한 애정을 갖고 있는 민요는 어떤 곡인가요?
"이은주 하면 대부분의 사람들이 <태평가>와 <이별가> 그리고 <긴아리랑>을 떠올립니다.

<태평가>는 한국전쟁 중 대구피난 시절에 가사를 지어 불렀는데 노래가 흥겨웠던지 대중들로부터 엄청난 인기를 얻었어요. 음반취입도 많이 했구요. <이별가>와 <긴아리랑>은 스승들이 제 목에 가장 맞는 노래라 해서 무대공연에는 무조건 이 노래만 부르게 했어요. 그래서 어떤 이들은 <이별가>와 <긴아리랑>을 제가 지어 부른 노래인줄 알아요.

그렇지만 저는 개인적으로 <정선아리랑>을 참 좋아해요. 특히 사랑하는 아들을 가슴에 묻은 뒤 이 노래는 제 혈육과도 같은 노래가 되어 버렸어요. 구구절절이 애절하고 한이 서린 노래인데 가끔 무대에서 부르다 보면 내가 내 감정을 이기지 못해 눈물을 흘린 적도 참 많았어요. 80년대 이후에는 이 <정선아리랑> 만큼 많이 부른 노래도 없을 겁니다."

지난 3월 '할렐루야 상사디야''이별가'등이 담긴 음반을 취입하는 이은주 명창. 그녀의 소리는 이제 갓 60을 넘긴 소리꾼의 그것처럼 매우 힘있고 맑고 화사했다.
지난 3월 '할렐루야 상사디야''이별가'등이 담긴 음반을 취입하는 이은주 명창. 그녀의 소리는 이제 갓 60을 넘긴 소리꾼의 그것처럼 매우 힘있고 맑고 화사했다. ⓒ 김칠이
- 사람이 70세를 살기가 쉽지 않아 '인생칠십고래희'라는 말이 나온 걸로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도 선생님은 소리를 벗삼은 지 70년이 되셨는데요. 70년의 국악인생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일은 무엇입니까?
"언젠가 한 방송사 인터뷰에서 비슷한 질문이 나왔어요. 살아온 동안 가장 행복했던 때가 언제였냐는 질문이었는데 전 '결혼이 가장 행복했다'고 대답했습니다.

소리꾼 이전에 한 가정을 책임지는 어머니로서 딸로서 아내로서 그 역할을 얼마나 제대로 했나 하고 생각하면 늘 주변 사람들 특히 가족에게 미안한 맘뿐이죠. 아마 소위 예술을 하는 사람들은 누구나가 다 공통적으로 느끼는 감정일 겁니다. 아버지를 일찍 여읜 때문에 집안의 생계를 책임져야만 했던 '소녀가장 이은주'에게 결혼은 어쩌면 일종의 '휴식처'와 같은 곳이기도 했어요.

물론 1975년 인간문화재라는 타이틀을 받았을 때, 그리고 91년 KBS 국악대상 공로상을 받았을 때도 기억에 감격스럽고 행복한 순간이었지요."

- 4월 27일 국립국악원 예악당에서 이은주 선생님의 '소리연 85공연'이 있다고 들었습니다. 이 공연이 갖는 의미는 무엇이며, 또 어떤 내용으로 꾸며지는 지 소개해 주십시오.
"소리인생 70년을 기념하고 정리하는 무대라고 보시면 됩니다. 저는 75년 인간문화재가 된 후 이은주경기창연구원을 개원하여 지금까지 수제자인 김금숙을 비롯, 김장순·한진자·이선영·노경미 등 100명이 훨씬 넘는 제자를 길렀습니다. 그들 제자들은 대부분이 우리 민요계의 중추적인 역할을 하고 있는 소중한 보배들에요.

제가 스승으로부터 받았던 소리를 이들이 열심히 배워 다시 그들의 제자를 키워내고 있으니 정말 대견스럽고, 또 그러한 제자를 둔 자신이 자랑스럽기도 합니다. 이날 공연은 이들 제자와 또 그 제자들이 한데 어우러져 경기민요의 진수를 보여주는 그런 무대가 될 겁니다."

- 마지막으로 민요에 관심이 적은 젊은 세대에게 한 말씀 해주세요.
"민요가 배우기 어렵고 또 귀에 잘 안 들어온다는 말을 참 많이 하는데요. 국악 또는 민요를 천시하던 시절에 만들어진 일종의 고정관념이라고 생각해요. 요즘 우리 것에 대한 자부심이 얼마나 대단합니까? 자부심을 가지는 것도 중요하지만, 진정으로 그것을 즐길 줄 알고 노래부르고 춤출 줄 아는 사람이야 말로 진정한 애국자라는 생각이 들어요. 요즘 젊은 사람들은 똑똑하기 때문에 그만큼 민요가 그들에게 선택받을 가능성도 많다고 생각해요. 그것만으로도 민요를 팔자로 알고 부른 사람 입장에선 감사할 따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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