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도종환 시인
도종환 시인 ⓒ 안준철
멀쩡하게 잘 살고 있는 사람에게 갑자기 '왜 사느냐'고 묻는 것만큼이나 황당하고 난감한 일도 없을 것이다. 십수 년 동안 시를 써온 사람에게 왜 문학을 하느냐고 다그쳐 묻는 것도 상대를 난감하게 만들기는 마찬가지다.

그래서였을 것이다. 시인이 특유의 느릿하고 조용한 어조로 "여러분은 왜 문학을 하세요?"라고 청중들을 향해 물음을 던졌을 때 내 머릿속이 갑자기 하얗게 바래버린 것은. 나는 이런 기막힌 대답을 한 초심자의 신세가 부러울 따름이었다.

"저는 아직 문학을 하고 있지 않는데요."

문학을 하지 않는다면 그는 왜 여기에 온 것일까? <접시꽃 당신>으로 유명한 도종환 시인의 얼굴을 보러 온 것일까? 하긴 해마다 순천작가회의가 주관하는 <문학아카데미 시창작교실>은 문학을 하는 사람만이 아니라 문학을 해볼까 하는 사람도 오는 곳이긴 하다. 속내를 털어놓자면, 그런 예비 시인들의 '입질'을 유도할 요량으로 그를 먼 남도의 작은 마을까지 어려운 걸음을 하게 했는지도 모를 일이다.

그건 그렇다 치자. 나는 왜 문학을 하는가. 그것은 시를 쓰고 싶어서다.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한 때는 내가 쓴 시가 세상을 아름답게 하는 고운 소리로 울려 퍼지기를 바란 적도 있었지만, 지금은 아니다. 다른 사람들이 알아주건 말건 내 마음에 드는 시. 내가 평생 사랑하고 아낄 수 있는 시. 내 분신 같은 시. 그것이면 족하다. 아니, 족한 것이 아니라 과한 욕심이다.

어쨌거나 나는 한결 마음이 느긋해졌다. 그가 전직 교사답게 수강생들과 대화를 주고받으며 마치 누에가 뽕잎을 갉아먹듯 청중들의 마음을 빼앗아가고 있을 때 나는 귀만 그쪽에 두고 눈은 책상 위에 놓인 강의 원고를 훑어가고 있었다. 갑자기 궁금해진 것이었다. 그에게 문학은 무엇일까? 수강생들과 말을 주고받는 속도로 가늠해보건대 직접 시인의 입을 통해 그 대답을 들으려면 한참을 더 기다려야할 것만 같았다.

'내 문학은 가난과 외로움에서 출발했다. 평화롭던 날들은 열 몇 살 전후해서 끝났다. 아버지가 사업에 실패하여 고향을 뜨면서 우리 가족은 해체되었다. 나는 외가에 맡겨졌고 앞 못 보는 할아버지는 고모네 집에서 고단한 육신을 의탁해야 했으며, 어머니 아버지는 강원도로 떠났다. 그래서 어려서부터 혼자 있다는 생각을 많이 했고, 방학 때가 되면 편지봉투에 쓰여 있는 주소를 들고 어머니 아버지를 찾아다녔다.'

어린 시절, 그는 글재주와는 거리가 먼 그림을 그리는 아이였다. 그가 '길을 잘못 들어' 시인이 된 것은 순전히 가난 때문이었다. 가난하기 때문에 포기했던 대학을 '돈 제일 안 들어가는 대학, 돈 제일 안 드는 학과'를 선택하여 시험이나 한 번 쳐보라는 친척들의 권유로 사범대학 국어교육과에 입학을 하면서 문학과 인연을 맺게 된 것이었다. 하지만 그것은 행복한 만남이 아니었다. 낯선 만남이었고 우울한 만남이었다.

그를 '질척한 페시미즘과 우울한 낭만주의 문학'에서 벗어날 수 있게 한 것은 뜻밖에도 80년 광주였다. 그때 그는 군복을 입고 있었다. 사범대학을 졸업하고도 부친의 병환 때문에 몇 년째 군대를 연기하다보니 다 늙어서(?)야 군인이 된 것이었다. 그는 '광주에서 여수 쪽으로 내려오는 무장한 시민군 차량들을 저지하기 위해 십칠 번 국도의 한 고갯마루에 바리케이드를 치고 언덕 양쪽에 호를 파고' 있었다. 그때의 절박하고 숨 막히는 순간을 그는 이렇게 술회하고 있다.

'그렇게 대치한 채 뜬눈으로 새우던 그 오월의 밤에 나는 참으로 많은 고민을 했다. 그리고 M16 소총의 탄창을 몰래 빼서 맨 위의 실탄을 거꾸로 장전해 놓았다. 방아쇠를 당겨도 총알이 나가지 않게 해놓으면서 나는 두려웠으나 이렇게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사람을 향해서 총을 쏠 수는 없었다. 그리고는 군복 윗주머니에 들어 있는 군용수첩에다 시를 썼다. 그때까지 썼던 100여 편에 가까운 시들을 다 버리게 한 시였다.'

사격명령이 떨어지던 날
탄창 속의 M16 A1 신형 탄알처럼
징발된 민간차량에 가지런히 탑승되어
비포장도로를 달려갔다
정갈한 저녁 바람은 예년처럼
보리수염을 쓸어가고
개인호를 파고 들어앉은 우리 앞에
인도지나의 풍문으로 듣던 안개가
호남평야를 기어오고
바리케이드 뒤에서
제 1번 실탄을
거꾸로 장전하는 짧은 순간
가장 깊은 밤의 이슬이
어깨를 밀고 들어왔다
그 밤 터무니없는 죽음의 가도에서
고려 중기의 젊은 농군을 만나고
망이와 망소이를 만나고
정중부의 다듬어진 칼과 보현원의 차디찬
화강암에 이마를 부딪고 쓰러진
그 흔한 죽음의 기록도 없는 한 야사의 문신들을 만났다
17번 국도에서 역사를 우롱하던 바람은
한 찰나도 빼놓지 않고 피 묻은 뻐꾹새 울음을
귓가에 실어오고 부대끼는 밤 구름을
능선 위에 옮겨왔다
안전장치를 풀고 방아쇠를 당겨도
이제 내 개인화기는 발화하지 않을 것이다
참으로 부끄럽지 않은 사람은 누구인가
역사여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는 역사여
구름 그림자에 눌리운 이 깜깜한
오월의 국도 위에서
참으로 부끄럽지 않은 사람은 누군인지
당신도 헤아리고 있는가
-시, <사격명령>


한 마디로 그는 철없는 군인이었다. 하긴 철이 없으니 어른이 되어서도 돈 안 되는 문학에 몸을 담고 있는 것이리라. 지금은 그가 우리나라에서 몇 안 되는 베스트셀러 시인의 반열에 올라 있기는 하지만 <접시꽃 당신>이 대중의 사랑을 받기 전까지만 해도 그는 그다지 잘 나가는 시인이 아니었다. 지금도 가끔 친구들을 만나면 그가 문학으로 이름을 얻은 사실을 뻔히 알면서도 아직도 철이 없이 시나 쓰고 있다고 핀잔을 준다고 한다.

하지만 그는 자신의 철없음을 부끄러워하기는커녕 다행스럽게 생각하고 있었다. 철이 없다는 것은 마음이 어리다는 뜻이요, 어린 마음을 동심이라고도 하니 그런 맑고 순수한 동심이 없이 어찌 시인의 이름을 얻을 수 있었겠는가. 명나라 사람 <이지>도 <분서>라는 책에서 '나이가 먹어가면서까지 동심을 버리지 않는 사람이 시인'이라고 했단다. 그런가 하면 <프로이드>도 그와 비슷한 말을 했다고 한다.

'사람의 마음속에는 누구나 시인이 한 사람 살고 있다. 그 시인을 잘 모시고 사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아예 모른 체 하고 사는 사람도 있다. 그 시인이 사람의 마음 안에서 사라진다면 그에게 남아 있는 최후의 인간이 사라지는 것이다.'

이 말대로라면 굳이 시를 쓰지 않아도 시인이요, 시를 써도 시인이 아닐 수도 있겠다. 수백 편의 시를 쓰고 수십 권의 시집을 낸들 그의 마음에 시인이 없으면 말짱 헛일이 아니겠는가. 이쯤해서 좋은 시를 쓰기 위해서는 좋은 삶을 살아야한다는 그의 말이 설득력을 얻는다. 그는 "내 삶을 올바른 방향으로 가게 하기 위해 문학을 한다"고 까지 말한다. 물론 문학은 상상력의 표현이지만 삶에서 우러나는 것, 삶을 붙잡고 늘어진 것들이 그에게는 좋은 시가 되었다.

베트남 소녀와 함께 -시인은 이번 새 시집의 인세 수익을 베트남 어린이를 위한 평화학교 짓는데 보태기로 했다.
베트남 소녀와 함께 -시인은 이번 새 시집의 인세 수익을 베트남 어린이를 위한 평화학교 짓는데 보태기로 했다. ⓒ 안준철
그는 "문학은 내게 길이 되어 주었다"고 서슴없이 말한다. 전교조를 만드는 일에 참여했다가 어미 없는 자식들을 두고 감옥에 들어갔을 때, 아버지가 부자지간의 의를 끊겠다고 하셨을 때, 아직 학교도 못 들어간 어린 아이들이 보낸 편지를 받고 감옥의 벽에 십자가를 그어놓고 울면서 기도 할 때도 그는 시가 있어서 다시 일어 날 수 있었다. 해직교사 생활을 시작하면서 막막해 할 때도 시가 길이 되어 주었단다.

저것은 벽
어쩔 수 없는 벽이라고 우리가 느낄 때
그때
담쟁이는 말없이 그 벽을 오른다
물 한 방울 없고 씨앗 한 톨 살아남을 수 없는
저것은 절망의 벽이라고 말할 때
담쟁이는 서두르지 않고 앞으로 나아간다
한 뼘이라도 꼭 여럿이 함께 손을 잡고 올라간다
푸르게 절망을 다 덮을 때까지
바로 그 절망을 잡고 놓지 않는다
저것은 넘을 수 없는 벽이라고 고개를 떨구고 있을 때
담쟁이 잎 하나는 담쟁이 잎 수천 개를 이끌고
결국 그 벽을 넘는다.
- 시, <담쟁이>


여기서 담쟁이는 도종환이라는 한 실존의 객관적 상관물이리라. 아니, 아직은 머뭇거리는 그의 실존이 희구하는 하나의 이상향일 수도 있다. 그는 시를 쓰고 나면 담쟁이가 되어야 한다. 담쟁이처럼 살아야만 한다. 이렇게 시가 그를 밀어주고 그가 시를 끌어가며 어느덧 '담쟁이 잎 하나는 담쟁이 잎 수천 개를 이끌고/ 결국 그 벽을 넘'고야 마는 것이다.

그러니 '이른 봄에 내 곁에 와서 핀 봄꽃만이 축복은 아니다'라고 노래할 만도 하다. 그럼 그에게 또 무엇이 축복일까?

"모든 것이 다 축복이죠. 고통도 축복이고요. 왜 그렇죠? 그것은 우리가 문학을 하기 때문이지요. 문학은 고통을 창조적으로 승화시키는 힘이 있으니까요. 그러니 문학을 하는 사람에게는 고통도 축복이지요. 그럼 고통이 없는 사람은 시를 쓸 수 없을까요? 그렇지 않아요. 진미진선, 즉 아름다운 것과 선한 것을 추구하면서 시를 쓰면 됩니다."

최근 그는 새 시집 <해인으로 가는 길>(문학동네)을 펴냈다. 해인(海印)은 불교 용어로 '바다에 풍랑이 쉬면 삼라만상 모든 것이 도장 찍히듯 그대로 바닷물에 비쳐 보인다'는 뜻을 담고 있다. 시인은 '언젠가 해인의 고요한 암자 곁을 흘러/ 화엄의 바다에 드는 날이 있으리라//그날을 생각하며 천천히 천천히 해인으로 가고' 싶어 한다. 그런 그의 심정이 고스란히 담겨 있는 시를 한 편 읽어보자.

하루 종일 아무 말도 안 했다
산도 똑같이 아무 말을 안 했다
말없이 산 옆에 있는 게 싫지 않았다
산도 내가 있는 걸 싫어하지 않았다
하늘은 하루 종일 티 없이 맑았다
가끔 구름이 떠오고 새 날아왔지만
잠시 머물다 곧 지나가버렸다
내게 온 꽃잎과 바람도 잠시 머물다 갔다
골짜기 물에 호미를 씻는 동안
손에 묻은 흙은 저절로 씻겨 내려갔다
앞산 뒷산에 큰 도움은 못 되었지만
하늘 아래 허물없이 하루가 갔다
- 시, <산경>


도종환 시인
도종환 시인 ⓒ 안준철
강의가 끝나고 뒤풀이 자리에서 그는 사인을 하느라 여념이 없었다. 나는 그의 옆모습을 찬찬히 들여다보고 있었다. 영락없이 착하고 너그럽고 다정한 선생님의 모습이었다. 나는 한때 그의 명성을 부러워한 적이 있었다. 지금은 그의 삶을 닮아가고 싶은 마음뿐이다.

그는 해직 10년 만에 밟은 교단을 지병으로 다시 떠나야하는 아픔을 겪었지만 지금은 웬만큼 건강을 회복한 듯하다. 웃음이 선하고 환하다. 순천 역까지 배웅을 해준 나에게 그는 시집을 보내주겠노라고 했다. 집으로 돌아와 컴퓨터를 켜고 그의 홈페이지에 접속하여 몇 장의 사진과 함께 다음과 같은 글을 읽었다.

꽃도 나뭇잎도 모두 제 빛깔로 아름다운 사월입니다.
이번에 새 시집을 내며 여러분을 초대합니다.
병을 핑계로 산에 들어가서 지낸 세 해 동안 쓴 시들입니다.
산과 하늘과 나무들이 말하는 것을 받아 적은 시들입니다.
그동안 이 시들을 한 편 한 편씩 <아름다운 가게>에 기증해왔습니다.
그 시들을 모은 시집도 <아름다운 가게>에 기증합니다.
시집에서 생긴 수익은 베트남 어린이를 위한 평화학교를 짓는데 보태기로 하였습니다.
오셔서 반가움과 기쁨을 나누고,
가진 것을 나누고, 먹을 것을 나누는 자리로 만들어 주시면 고맙겠습니다.


그날 나는 코끝이 찡한 채 잠이 들었다. 아름다운 사람을 만나고 돌아온 뒤끝이 행복하면서도 고적했다. 모르면 몰라도 나의 잠과 꿈 사이는 해인으로 가는 길목 어디쯤이었을 것이다.

덧붙이는 글 | 민족문학작가회의 순천지부(지부장 박두규)는 지난 4월 28일부터 6월 2일까지 매주 금요일 밤 7시`9시 30분까지 순천 중앙서점 3층 세미나실에서 <문학아카데미 시창작교실>을 운영하고 있습니다. 도종환 시인은 두 번째 강사로 오셔서 강의해 주셨습니다.   

도종환 시인의 사진은 시인의 홈페이지에서 얻었습니다. 양해 바랍니다.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ㄹ교사이자 시인으로 제자들의 생일때마다 써준 시들을 모아 첫 시집 '너의 이름을 부르는 것 만으로'를 출간하면서 작품활동 시작. 이후 '다시 졸고 있는 아이들에게' '세상 조촐한 것들이' '별에 쏘이다'를 펴냈고 교육에세이 '넌 아름다워, 누가 뭐라 말하든', '오늘 교단을 밟을 당신에게' '아들과 함께 하는 인생' 등을 펴냄.




독자의견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