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쩌면 이 난국을 가장 원만하게 해결할 수 있는 인물이 모용화궁인지 모른다. 그만큼 적과 미묘한 관계를 가진 인물이 없다. 좌중은 그제 서야 고개를 끄떡였다. 지금까지 모용화궁을 의심만 했지 그를 내세워 해결책을 찾으려는 생각을 하지 못했던 것이다.
“자네는 모용가의 가주네.”
모용화궁은 잠시 눈을 감았다. 섭장천은 교묘하게 자신에게 강요하고 있다. 모용화천이나 모용백린을 모용가의 핏줄로 인정하고 현 가주인 자신의 말을 듣도록 하라는 것이다. 자신이 노력한다고 해서 그들이 검을 거두고 모든 꿈을 포기할까? 그런다고 그들이 들을 것인지 확신도 없다.
“어려운 일이오. 가문에는 지켜야할 법도가 있소. 본 가주로서는……. 그들을 본 가의 식솔로 인정할 수 없는 사정이 있소.”
무림세가에는 반드시 지켜야 할 원칙이 있다. 더구나 이 문제는 자신의 부친과 직접 관련이 있는 일이다. 지금 자신이 궁지에 몰린다 해도 가문의 명예를 실추시킬 수는 없다. 그는 단호하게 말을 이었다.
“섭노선배 뿐 아니라 모든 분들께 죄송하오. 다만 이 후배는 모용화천이나 모용백린과 검을 마주 친다 해도 망설이지 않겠소. 또한….”
모용화궁은 주위를 쭉 둘러보았다. 어쩔 수 없는 결정이다.
“맹에 부탁한 모용수의 목숨에 대한 부탁은 이 순간부터 접겠소. 지금부터 모용수는 내 자식이 아니며 모용가의 식솔이 아니오.”
이제 누구라도 모용수를 죽여도 상관하지 않겠다는 말이다. 가문의 명예를 위해 자식도 포기하겠다는 말에 섭장천은 안타까운 듯 혀를 차며 물었다.
“자네 가문의 명예가 그리도 소중한 것인가?”
허나 모용화궁은 입을 굳게 다문 채 고개만 끄떡였다. 오랜 시일 동안 가문을 유지해 올 수 있었던 것에는 이유가 있다. 갑자기 돈이 많아졌다거나, 갑자기 무공이 강해졌다고 무림세가나 문파로 발돋음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모용화궁의 굳게 다문 입을 더 이상 열릴 기미가 없었다.
“어떨 것 같습니까?”
대화가 끊어지고 한 동안 침묵이 흐르자 담천의가 섭장천을 향해 물었다.
“무엇을 말인가? 그들의 제의를 받아들이는 것? 아니면 자네가 덧붙인 제의를 말하는 것인가?”
“승부 말입니다.”
이미 그들의 제의를 받아들인다는 전제로 말을 하고 있다. 그 말에 섭장천은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 단호하게 말했다.
“노부가 자네라면 지금이라도 방백린의 제의를 거절하겠네. 차라리 이 기관을 뚫고 나가는 것이 그래도 나을 걸세.”
“상대가 그렇게 강합니까?”
“큿…!”
갑자기 섭장천 옆에 앉아있던 장철궁이 괴소를 터트렸다. 그것은 일종의 비웃음 같은 것이어서 좌중의 얼굴에는 노골적인 불쾌감이 떠올랐다. 허나 장철궁은 전혀 개의치 않았다. 비록 몸이 망가졌다해도 아직도 그를 어찌할 자는 이 안에 그리 많지 않았다.
“방백린에 대해서는 아마 노부보다 이 친구가 더 자세히 알고 있을게야.”
섭장천이 거들어주자 장철궁이 다시 입을 열었다.
“자네가 담천의란 사람인 모양이군. 말은 많이 들었네. 나는 장철궁이네.”
“만나서 반갑소. 백결형으로부터 말씀 많이 들었소.”
“이런 모습 보여서 미안하군.”
아마 항인과 종룬의 부축을 받고 있는 자신의 모습에 대한 자격지심일 것이다. 평생 무공에 있어서는 최고라 자부했던 자신이 아니었던가?
“별 말씀을……. 이곳까지 같이 오지는 않았지만 곡 내에는 명의가 있소. 헌데 장곡주를 이렇게 만든 자가 누군지 궁금하구려. 방백린이란 자였소?”
“방백린은 이 중원에서 장사형의 유일한 상대라 할 만하지. 그 뿐 아니라 세 명이 기습을 했다네. 그 중에는 절대구마의 후인 중 대군과 이마가 끼어 있었지.”
담천의의 조심스런 질문에 궁금증은 옆에 있던 백결이 풀어주었다. 좌중은 그 말을 들으며 가슴 속에 천 근 바위를 얹은 듯 한 느낌이 들었다. 절대구마의 후인……. 그 중 대군과 이마의 합공을, 거기다가 이제 상대로 나올 방백린의 협공까지 받을 정도라면 장철궁의 무위는 어느 정도인가?
“문제는 그들에게 받은 상처가 아니었네. 장사형에게 그런 정도는 기껏해야 이틀 정도면, 길어도 사나흘 정도면 거의 회복할 수 있지.”
“............?”
“요서보검…! 본교의 성물인 요서보검이 절반 정도 옆구리를 파고들었네. 믿기지 않겠지만 요서보검은 본파의 염원과 원혼이 깃든 검이네. 절대구마의 시검사도 정도는 요서보검에 비할 바 안 되지. 그것에 스치기만 해도 독에 중독된 듯 하고 기괴한 기운이 정상적인 혈행을 마비시킨다네. 혈맥이 굳는 고통과 함께 서서히 죽어가는 것이지. 보통 고수라면 단 하루를 버티기 힘들다네.”
요서보검은 무서운 검이었다. 백련교의 율법을 집행하는 검이 된 가장 결정적인 이유였다. 한 번 찔리면 지독한 고통 속에서 죽음을 맞이해야 하는 검. 다른 이들이 보기엔 사악한 검이 틀림없었다.
“사제. 그만 하게.”
장철궁이 백결의 무릎을 툭툭 두드리며 백결의 말을 끊었다. 아마 백련교의 일이 좌중에 밝혀지는 것이 싫은 듯 했다. 또한 그런 검에 찔린 자신이 아직 살아 있다는 것이 자신의 얼굴에 금칠을 하는 것 같은 부담감도 느껴졌다.
“방백린에 대해 얼마나 알고 있는가?”
장철궁은 백결이 더 입을 하기 전에 담천의에게 말을 던졌다.
“만나본 적이 없소.”
담천의가 고개를 젓자 장철궁 역시 고개를 저었다.
“아니야. 자네는 그를 만난 적이 있네. 그는 자네를 죽이려 했지.”
“.............?”
담천의는 도저히 모르겠다는 표정을 지었다. 중원에 나와 많은 이들을 만나보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방백린이란 인물과 만난 적이 없는 것 같았다.
“기억해 보게. 자네는 그의 모습을 보지 못했겠지만 자네가 정주로 향하고 있을 때 산중에서 염화심력이라는 기괴한 기운으로 자네를 공격했던 적이 있네.”
“아......!”
이제야 생각이 났다. 송하령과 함께 산중에 숨어 있다가 내려올 때 느껴지던 무형의 염력. 바로 그것이었다. 대항할 수 없을 정도의 기괴한 기운. 그 때 구양휘와 팽악이 나타나 그들을 공격하지 않았다면 낭패를 당했을 터였다. 더구나 얼마 전 비슷한 기운을 유항이라는 여인에게서 느껴보지 않았던가?
“그는 백련교의 비기 두 가지를 완전히 연성했네. 또한 염화심력이라는 무서운 무공도 대성했지. 과거 자네가 겪었던 정도와는 아예 비교가 되지 않는다네.”
“그것이 염화심력이란 무공이었소?”
“그건 무공이라고 말할 수 없네. 노부가 설명해 주지.”
옆에 있던 섭장천이 끼어들었다. 아마 이곳에서 염화심력에 대해 그보다 더 잘 알고 있는 인물은 없을 것이다. 그가 이곳에서 수개월을 보내면서 얻은 모든 정보가 그의 입을 통해 나오는 순간이었다.
(제 98장 完)
덧붙이는 글 | 5월 말경이면 단장기 연재를 마치게 될 듯 합니다. 감사의 뜻으로 그동안 성원해주신 독자분과 조촐한 모임을 가지려고 합니다. 자세한 내용은 단장기 게시판을 참고해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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