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오마이뉴스의 모토는 '모든 시민은 기자다'입니다. 시민 개인의 일상을 소재로 한 '사는 이야기'도 뉴스로 싣고 있습니다. 당신의 살아가는 이야기가 오마이뉴스에 오면 뉴스가 됩니다. 당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 주경심
안방 한구석을 턱하니 차지하고만 있을 뿐 내 집으로 들어온 지 어언 4년 세월이 흘렀음에도 그 존재성을 한번도 제대로 입증하지 못한 참으로 호사스런 그 물건의 이름은 바로 에어컨입니다.

사 년 전 한창 건설경기가 좋아 하룻밤 사이에도 여기저기서 빌라들이 우후죽순으로 솟아오르던 그때! 제가 살던 지하방과 처마를 나란히 맞대고 있던 앞집에도 건설바람은 불어왔습니다.

어제까지만 해도 세 개층에 스무 개가 넘는 작은 쪽문으로 사람들이 풀방구리에 쥐 드나들 듯하며 삶을 주워 나르던 앞 집이었는데, 말 그대로 하룻밤 사이 사람도 집도 사라지고 내 남편처럼 땀으로 인생을 다지는 각양각색의 사람들이 먼지 풀풀 나는 그곳으로 망치와 못을 들고 모여들어 못 장단, 망치 장단을 두드려대기 시작했습니다.

그렇찮아도 햇빛 한줌 들지 않는 작은 지하방이었는데 공사까지 해대니 작은 집안은 삽시간에 뿌연 먼지가 구석구석 자리를 잡아서는 숨쉬는 것조차 힘들 지경이었습니다. 그러니 하루가 다르게 세련되게 변해 가는 앞 집의 변화가 하루종일 걸레를 들고 종종걸음을 치는 제 눈에는 딱히 좋아 보일 리가 없었습니다.

어서 빨리 집이 완성되어 해뜰 때부터 해질 때까지 쉬지도 않고 뚝딱대는 저 소리가 사라져버렸으면 싶었습니다.

하지만 오뉴월 땡볕 아래서 어깨와 뒷목이 벌겋게 타들어 가는 줄도 모르고 일을 하는 사람들의 얼굴을 보고 있자니 먼지 때문에 겪는 저의 불편함을 감히 꺼낼 수조차 없을 정도로 안쓰러운 맘이 들었습니다. 꼭 내 남편을 보는 듯했으니까요.

남편도 지금 어딘가에서 저렇게 벌겋게 익어 가는 모습으로 누군가의 두 눈을 찌푸리게 하고, 또 가끔은 욕바가지도 얻어 듣겠구나 생각하니 '참아야겠다, 걸레질 한 번 더하고, 빗자루질 한 번 더하고 말자' 싶었습니다.

앞 집이 깨끗해지고 나면 그 전처럼 하루가 멀다하고 아들, 손주, 며느리에 사돈팔촌까지 데리고 이사를 오던 바퀴벌레 가족들을 맞지 않는 것만으로도 행운이라 생각하자 저를 다독여야 했습니다.

그렇게 하루 이틀 느려터진 여름태양 덕에 건물은 금세 터를 닦고, 골조를 올리며 제 모습을 찾아가고 있었습니다.

어느 날은 아주 어린 학생들이 땀을 죽죽 흘리면서 일을 하는가 하면 또 어느 날은 친정엄마 연배의 아줌마가 나와서 그 위험한 현장을 돌아다니며 일꾼들이 미처 챙기지 못한 못들을 줍기도 했습니다. 남편이 일하는 현장에도 자질구레한 일을 해주는 저런 아줌마가 있다는 소리를 들은 적이 있었습니다.

이 더운 날에 얼마나 먹고살기가 박하면 저런 일까지 할까 싶었습니다. 해서 주변머리라곤 약에 쓰려도 없는 제가 동병상련의 마음으로 먼저 말을 붙였습니다.

"저기요, 아줌마! 더운데 제가 냉커피 한잔 드릴까요?"
"나야 좋지요. 그렇찮아도 물도 안 가져 오고 해서 갈증이 났는데. 이왕이면 얼음 좀 많이 띄워서 줄래요?"

기다렸다는 듯이 대답을 하는 아줌마와 학생에게 냉동실의 얼음을 탈탈 털어서 냉커피를 만들어서 드렸고, 그것을 계기로 다음날부터는 시골엄마가 손수 농시지으셔서 보내주신 미숫가루까지 아낌없이 타서 주는 이물 없는 사이가 되었습니다.

내가 이렇게 대접해야만 내 남편도 어디를 가서 물 한잔이라도 눈치 안 받고 얻어마실 수 있을 것 같았기에 아까운 마음이나 귀찮다는 생각같은 건 요만큼도 먹지 않았습니다. 물론, 그 분들이 나만큼이나 사는 것이 녹록찮은 분임에 틀림없다고 내 맘대로 단정 지었기에 대접을 하는 것들이 비록 커피 한 잔, 미숫가루 한 그릇이라도 부족하다거나, 적다거나 하는 부담감도 갖지 않았던 것이 사실입니다.

그런데 그 어린 학생과 늙은 아줌마는 제가 생각했던 그런, 저와 너무나 닮아 삶이 녹록찮은 그런 불쌍한 사람들이 아니었습니다. 바로 건물주였던 것입니다. 굳이 묻지 않았고, 그렇다고 아줌마가 거짓말을 한 것이 아닌데도 처음 "내가 주인이에요!"하는 소리를 들었을 때는 배신감마저 들더군요.

잘 살기는커녕 지지리 궁상으로 지하방에서 갓난쟁이를 키우는 못 사는 새댁이 커피를 타다주며 "힘드시죠? 많이 더우시죠?"하면서 애처로운 눈빛을 보낼 때 속으로 얼마나 나를 비웃었을까 싶어 한 동안은 더운 것도 잊은 채 문을 꼭꼭 닫아놓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누가 문을 톡톡 두드려서 나가 보니 아줌마가 무거운 대나무자리를 낑낑대며 들고 서 계시는 겁니다.

"기분 나쁘게 듣지 말아요. 이거 새 건데 우리 집에는 쓰던 게 있어서 갖고 왔어요. 며칠 전에 보니까 애기 목에 땀띠가 났더라고, 이거 깔아주면 시원해서 땀띠도 안 나거든."

언감생심 꿈도 꾸지 못했던 비싼 대나무자리를 건네주시는 겁니다.

텔레비전에 비쳐지는 사모님들은 얼굴도 하얗고, 몸매도 좋고, 햇빛이라면 바닷가가 아니면 기미 생긴다며 서 있지도 않고, 집에서도 명품을 둘둘 감고 있는 모습이기에 이 사모님이 지금까지 나를 놀렸구나 싶어서 다시는 커피건, 미숫가루건 안 타줄려고 했는데. 너무도 소박하고, 또 자격지심으로 저 혼자서 삐진 저에게 괜히 미안해 하시며 저자세로 나오시는데, '내가 진짜 못났구나 하는 걸' 새삼스레 느낄 수가 있었습니다.

마지못해 대나무 자리를 받기는 받았는데 못나디 못난 저는 고맙다는 말도 못하겠더라구요. 그리고 아직도 서운한 맘이 남아 있어서 마음 한편으로는 이것도 다 나를 동정해서 주는구나 싶더라구요.

아줌마는 갑자기 변해버린 제가 마음에 걸리셨는지 "새댁 아니었으면 더워서 이 빌라 짓지도 못 할 뻔했지 뭐야. 커피가 얼마나 맛나던지 애들 아빠가 나오지 말라고 해도 내가 새댁 커피 때문에 나왔다니까!" 몇 번이고 제게 사과 아닌 사과를 하셨습니다.

그것이 인연이 되어 이후 남편이 집에서 쉬게 되었을 때 아줌마네서 일 년간 일을 하게 되었고, 역시나 냉커피를 타주던 그 여름처럼 더운 여름날 아줌마는 "새댁이 타주는 커피만큼 시원할지 모르겠네" 하시며 에어컨을 들여주셨습니다.

그런데 에어컨이 들어오던 날 저는 괜한 걱정으로 밤잠을 설쳐야 했답니다. 전기요금도 전기요금이려니와 한길가에 놓여진 실외기, 그 녀석을 누가 떼어가 버릴까봐 일부러 상처를 내고, 아이의 이름도 크게 써놓고, 소재가 좋아 눈비에도 끄떡없다는 말에도 불구하고 비가 오면 덮어주고, 눈이 오면 쓸어주는 코미디를 했으니까요.

지난 사 년 동안 에어컨이 제 기능을 발휘한 날이 넉넉잡아 이틀이니 짠돌이 새댁이 살고 있는 낡고 좁은 이 빌라에 에어컨은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인 액세서리일 뿐이지요. 그래도 저 에어컨을 보고 있으면 에어컨바람보다 더 시원함, 그 무언가가 제 가슴 속을 시원하게 만들어주는 듯합니다.

지금도 가끔 아줌마에게 안부전화를 드리면 "건이 엄마 커피가 진짜 맛있는데…"하시며 놀러 한번 온다고, 우리 얼굴 보면서 맛있는 저녁도 먹고, 후식으로는 꼭 건이엄마가 타주는 커피 한잔 마셔야 한다고 제 커피에 대해 칭찬이 늘어지십니다.

하여 전 오늘도 커피를 탔습니다. 부잣집 사모님도 인정한 나의 커피타는 솜씨! 이 솜씨를 놀려서는 안될 것같아서요.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독자의견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