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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아프리카에서 전쟁의 총성은 오래전에 멈췄지만 전쟁의 고통은 끝날줄을 모른다. 라이베리아와 시에라리온 등 오랜 내전을 겪은 국가의 국민들은 지독한 가난 속에 여전히 전쟁터의 삶을 사는 중이다. 지난 4월 24일부터 2주간 가나와 시에라리온 두 나라를 둘러보았다. 돈에 팔리는 아이들과 고향에서 쫓겨난 난민들의 삶을 4차례 나눠 싣는다. 이번 취재는 한국언론재단(KPF)의 후원으로 이뤄졌다. <편집자 주> <편집자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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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찍어주세요. 사진!(Pictures! pictures!)"
초등학교 운동장 한 가운데 떼를 지어 놀던 아이들이 낯선 동양인들을 향해 소리를 지르며 좇아왔다. 4~5살밖에 되지 않는 아이들 중에 한 남자 어린이는 얼굴과 온 몸에 흰 가루를 묻힌 채로 숟가락과 밥그릇을 들고 있었다. 제대로 씻지도 못하고, 먹을 것도 부족한 난민촌의 상황을 그대로 보여주는 듯 했다.
3일 낮 시에라리온의 수도 프리타운에서 동쪽으로 1시간 정도 걸리는 키시미 지역 그라프톤 캠프. 전쟁 중에 임시 비행장으로 쓰였다는 활주로를 중심으로 좌우에 라이베리아 난민들의 움막집이 옹기종기 보였다.
집들은 더위를 피하느라 나무 그늘에 지어졌는데, 흙벽돌로만 쌓아졌다. 지붕은 함석이나 비닐로 가렸다. 4~5평도 안 되는 좁은 집에서 대여섯명의 식구들이 기거하고 있다.
그라프톤 캠프에는 고향 라이베리아에서 쫓겨온 수천명의 난민들이 살고 있다. 대부분 난민들은 일정한 직업도 없이 그늘 아래서 낮잠을 자거나 뒹굴거리며 하루를 보낸다.
발등이 썩어가도 제대로 치료 못 받아
서아프리카에 위치한 라이베리아는 지난 15년간 끊임없는 군벌간 내전에 시달려온 나라다. 15년간의 전쟁에서 무려 20만명의 국민이 목숨을 잃었다. 현재 라이베리아 인구가 330만명이니 그동안 전체 국민의 약 7%가 사망한 셈이다.
2005년 라이베리아는 이웃국가들의 개입으로 안정을 되찾았고, 선거가 실시돼 최초의 여성대통령 엘렌 존슨-설리프(67)가 취임했다. 전쟁을 일으킨 독재자 찰스 테일러는 시에라리온 특별전범재판소에 수감돼 재판을 기다리는 중이다.
하지만 라이베리아 국민들은 여전히 주변 나라를 떠도는 신세다. 전쟁이 터지자 이들은 목숨을 걸고 국경을 넘어 시에라리온과 가나 등지로 탈출했다. 그라프톤캠프는 라이베리아 국민들이 난민 지위를 얻은 뒤 정착한 곳이다.
한때 1만3천여명이 모여 살았다는 이 캠프에는 지금은 수천명의 사람들만 남았다. 떠난 사람 중에는 고향으로 돌아간 사람도 있지만 다른 곳으로 간 사람도 있다. 이들이 고향에 돌아가지 않는 이유는 내전이 끝났어도 여전히 조국의 상황이 불안하기 때문이다. 또 캠프에도 남아있지 않으려는 것은 열악한 생활환경을 견디지 못해서다.
공동식수장으로 사용되는 캠프 펌프장 앞에는 수십명의 아이들이 양동이와 플라스틱물통을 줄지어놓고 놀고 있었다. 언제 물이 나올지 모르기 때문에 하루 종일 펌프장을 지키고 있어야 한다. 대부분의 아이들은 흙먼지 속에서 반바지와 샌들만을 신고 있었다.
난민들이 살고있는 마을 깊숙히 들어가자 한 남자가 "집을 보여주겠다"며 손을 잡아 이끌었다. 남자의 안내로 찾아간 집의 문틀은 벽에서 떨어져 너덜거리고 있었다. 전등도 없는 집안에는 한 남자아이가 담요를 깔고 혼자 앉아 있었다. 나무의자 하나 보이지 않는 빈 공간이다.
"내 발등을 보세요. 이런 상황인데, 누구 한 사람 어느 국가에서 약품조차 주려 하지 않습니다."
플라스틱으로 만든 샌들을 신고 있던 그가 발등을 보여줬다. 양쪽 발등 모두 피부가 벗겨진 채로 진물러져 있었다. 붉게 나타난 상처부위는 더위에 썩어가고 있었다.
20대 초반으로 보이는 한 청년이 다시 길을 가로막고 나섰다. 라이베리아에서 대학생이었다는 그는 "공부하고 싶은데 도와달라"고 호소했다. 그라프톤 캠프에 온지 2년째 된다는 그는 실직 상태로 캠프를 떠돌고 있었다.
하루 3만명, 배고픔과 갈증 참으며 잠든다
가나에 있는 라이베리아 난민 캠프는 상황이 더 열악하다. 96년 내전을 피해 가나로 도망친 난민 4만여명이 사는 부두부람 캠프. 가나의 수도 아크라에서 북쪽으로 1시간 정도 거리에 있다. 라이베리아 난민들이 들어오자 가나 정부는 약 140에이커(17만평)의 땅을 무상 불하해 난민들이 모여 살도록 했다. 그러나 상하수도 등 기반시설은 지원되지 않았다.
건설된 지 10년이 되는 부두부람 캠프에는 4만명의 난민을 돌보는 병원이 단 한 곳 뿐이다. 의사 2명이 매일 130~140명에 달하는 환자들을 진료하고 있다. 30대 후반인 이디오피아 출신의 의사 셀랄렘은 "난민들의 생명을 위협하는 것은 말라리아와 같은 풍토병"이라며 "특히 어린아이들이 말라리아에 무방비상태로 노출돼 있다"고 말했다.
병에 걸리면 제대로 된 치료도 받을 수 없는 상황이지만, 위생상태는 엉망이다. 4만여명의 난민들은 모두 12개 지역으로 나뉘어 살고 있는데, 공동 화장실은 지역별로 1개씩 밖에 없다. 상하수도 시설이 없기 때문에 재래식으로 지어진 화장실이다. 이런 화장실을 4만명이 10년간 쓰면서 버텨온 셈이다.
식수와 식량도 형편없이 부족하다. 난민들의 자치기구인 난민복지위원회 임시위원장은 "4만명의 난민들 중 먹을 물을 지급받는 사람은 1만명뿐"이라고 말했다. 하루 3만명의 난민들이 갈증과 배고픔을 참으며 잠이 든다는 얘기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설립이 오래된 만큼 부두부람 캠프가 어느 정도 안정돼 있다는 점이다. 10년간 난민들이 정착하면서 시장도 생기고, 교회·학교도 세워졌다. 캠프 안에는 45개의 초중고등학교가 있어 아이들에 대한 교육이 이뤄지고 있었다.
하지만 열악한 생활여건은 감출 수 없었다. 유엔난민고등판무관실(UNHCR)에서 부두부람 캠프 책임자로 나와 있는 칼 아푸르는 "500여명의 교사와 1만3천여명의 학생들이 학교에 다니지만, 아직도 3천~4천여명의 아이들은 학교에 다니지 못하고 있다"고 털어놨다.
하나의 공동체를 이루고 있는 난민 캠프 내에도 각종 생필품을 사고파는 시장이 형성돼 있다. 더운 날씨지만 냉장고나 냉동시설을 갖춘다는 것은 생각할 수도 없는 형편이라 음식물은 비위생적인 상태로 팔린다. 뒷골목으로 찾아들어간 재래식 시장에서 팔리는 구운 생선에는 파리떼가 까맣게 달려들고 있었다.
"우리를 절대 잊지 마라, 한국에 이 곳을 알려달라"
난민 캠프에서의 삶이 점점 어려워지는데는 국제 사회의 무관심도 한 몫을 하고 있다. 유엔난민고등판무관실이나 국제이주기구(IOM)가 캠프를 관리하고 있지만, 다른 나라의 지원은 점점 줄어들고 있는 중이다.
"당신들이 과연 우리를 도울 수 있는 사람들인지 궁금하다. 이 캠프에 많은 사람들이 다녀갔지만 아무런 변화가 없었다. 우리는 우리가 요구하는 것, 물과 식량·의약품 지원을 요청할 수 있는 대상에게 정확히 이야기하는 것인지 알고 싶다."
난민위원회 사무실에서 만난 한 노인은 방문한 한국인들을 향해 절박한 목소리로 호소했다. 수없이 많은 외국인들이 다녀갔지만, 그 뒤 어떤 지원도 없었다는 얘기였다.
"우리를 절대로 잊지 않았으면 한다. 여기 상황을 반드시 한국에 알려 달라. 한국 정부가 우리를 도울 수 있도록 독려해줬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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