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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악산에서 바라본 호반의 도시 춘천.
삼악산에서 바라본 호반의 도시 춘천. ⓒ 김선호
'자전거'와 '기차'를 좋아하는 아이들을 즐겁게 하는 일은 간단했다. 기차를 타고 강촌에 가서 자전거를 타면 되는 것이다. 다만 한가지 전제 조건을 달았다. 강촌에 가면 '자전거'만 있는 게 아니라 '삼악산'도 있다고. 그러니 산을 먼저 오르면 자전거는 질리도록 타게 해주겠다고.

일요일의 간이역은 한가했다. 늑장을 부리다 헐레벌떡 역사에 도착해 보니 아쉽게도 간발의 차로 기차가 떠나고 없었다. 반드시 오전에 출발하는 그 기차를 타야 했던 건 그 다음 기차는 오후에나 있을 거였기 때문이다.

오랜만에 기차를 타보는구나 싶었던 아이들의 실망하는 표정은 안쓰러울 정도였다. 할 수 없이 자동차로 강촌을 향했는데, 기차에 대한 아쉬움은 의외의 곳에서 풀렸다.

기차를 놓친게 못내 아쉬운 아이.
기차를 놓친게 못내 아쉬운 아이. ⓒ 김선호
우리가 강촌역에 도착할 즈음 놓친 기차가 따라 들어왔던 것이다. 어른의 눈으로 보면 그럴 수도 있는 일이 아이들 눈엔 '매우 신기한 우연'이었던 모양이다. 두고두고 기차와의 동시 도착을 이야기하며 눈빛을 빛내는걸 보면.

삼악산을 가려면 강촌역 앞 버스정류장에서 삼 십분 간격으로 다니는 버스를 타면 됐다. 매표소가 있는 의암호까지는 버스를 타고 십 여분이면 충분하다.

삼악산은 춘천시 서면에 위치한 해발 654m의 그리 높지 않으나 중턱부터 시작되는 암벽길이 의외로 매우 가파른 만만치 않은 산이다. 등산로 초입부터 가파르게 오르막길로 이어지니 초행자는 단단히 워밍업을 하고 올라야할 산이다.

등반을 시작한지 얼마 되지 않아 오월 들어 부쩍 따가워진 햇살에 땀이 등줄기를 타고 흐른다. 다행히 숲은 녹음이 짙어가면서 나무 그늘도 드리우고 청신한 기운을 내뿜어 오월의 열기를 상쇄시켜 준다.

숲은 빠르게 여름으로 가고 있었다. 다투어 피어나던 봄꽃들은 보이지 않고 짙어 가는 녹음이 무성해지는 오월의 숲에선 비릿한 향기가 느껴진다. 땀도 식히고 한숨을 돌릴 요량으로 등산로를 살짝 벗어나 소나무와 깎아지른 바위가 어울린 쉼터로 들어섰다.

전망 좋은 삼악산. 멀리 의암호와 춘천 시내가 뚜렷하게 보인다.
전망 좋은 삼악산. 멀리 의암호와 춘천 시내가 뚜렷하게 보인다. ⓒ 김선호
의암호와 춘천시내의 전경이 한눈에 들어온다. 시야가 시원하게 트여 주변을 조망하기 그만인 장소였다. 삼악산은 그렇듯 군데군데 근사한 '자연조망대'를 만날 수 있었다.

여느 산처럼 삼악산도 깔딱 고개가 있다. 가파르게 형성된 오르막을 오르다 문득 고개 하나를 넘어서니 아래로부터 시원한 바람이 한줄기 불어오는데, 그곳이 삼악산의 깔딱 고개다. 깔딱 고개를 올랐으니 이제 고비하나는 넘은 셈이다. 사실은 삼악산 등반의 진짜 고비는 거기서부터 시작이다.

산 중턱부터 암벽으로만 이루어진 구간을 올라 정상에 도달하는 난코스가 기다리고 있었다. 아래를 내려다보면 아찔하기 그지없는 깎아지른 암벽은 보기만 해도 오금이 저릴 정도였는데, 걱정했던 아이들은 의외로 신나는 표정으로 암벽을 잘도 오른다.

밧줄을 타고 혹은 오체투지의 자세로 암벽에 박아놓은 쇠 난간을 잡고 조심스럽게 오르는 어른들에 비해 즐기듯 암벽을 타는 아이들이 부러울 지경이다. 어렵사리 한고비를 넘기고 잠시 숨고르기를 하면서 뒤를 돌아보면, 그림같이 펼쳐진 호반의 도시가 한눈에 들어왔다.

삼악산 용화봉에 올라...
삼악산 용화봉에 올라... ⓒ 김선호
마침, 전날 내린 비로 대기는 더없이 맑고 깨끗하여 멀리 지평선까지 손에 잡힐 듯 선명하게 보인다. 아슬아슬한 암벽 구간은 정상부까지 이어져 있었다. 암벽을 오르다 산 아래를 조망하기를 반복하다보니 끝날 것 같지 않던 암벽구간이 문득 사라지고 거기에 '삼악산 용화봉' 정상석이 우뚝 서 있었다.

암벽으로 도배된 삼악산의 등줄기를 무사히 넘었다는 안도감에 정상석이 여느 때보다 더 반갑다.

딱딱한 바위 오름을 넘은 후, 부드러운 흙 길로 시작되는 하산 길에 접어든다. 산길 양편엔 꽃분홍 산복숭아나무가 화사한 꽃을 피웠고, 산능선을 따라 연분홍 산철쭉도 한창이다. 활개를 펴듯 자라난 가지마다 새로 난 잎새들이 하늘을 가릴 듯 빽빽하다. 한결 짙어진 숲의 향기를 맡으며 부드러운 흙 길을 걷는 맛이 참 좋다.

박태기나무꽃이 핀 산 속의 암자
박태기나무꽃이 핀 산 속의 암자 ⓒ 김선호
그 길 끝에서 힘찬 물줄기를 쏟아내는 계곡을 만났다. 반가운 마음에 덥석 물 속에 손을 넣으니 아직 계곡 물은 얼음장처럼 차다. 계곡 위쪽에 흥국사라는 작은 암자에는 박태기나무꽃이 예쁘게 피어서 나그네를 부른다.

그냥 지나치려다 박태기꽃을 보러 암자에 들렀다. 이름이 자못 거칠게 느껴지는 이 꽃은 분홍색이 섞인 보라색으로 피는 아름다운 꽃으로 길게 뻗은 맨살의 가지에 다닥다닥 꽃송이를 피워 올린 솜씨가 감탄을 자아내게 하는 꽃이다.

절 앞마당을 지나 계곡으로 향한 작은 오솔길을 따라가니 숲 속에 작은 주점이 보인다. 비닐하우스를 개조한 허름한 주점은 등산객들에게 간단한 먹거리와 동동주를 팔고 있었다. 거칠게 자른 통나무 의자에 아이들과 동그랗게 앉아 도토리묵과 잔치국수로 점심을 먹는 동안 열려진 비닐 문틈으로 귀룽나무 하얀 꽃잎이 폴폴 날린다.

날아온 꽃잎이 비닐하우스 안을 떠돌다 식탁에도 앉고 잠자는 개의 코끝에도 앉아서 쉬었다. 솔향기 나는 동동주에 앉은 귀룽꽃을 후루룩 같이 마셔도 좋았으니 이만하면 신선놀음이 따로 없다. 절 집을 지킨다는 송아지만한 개 흰둥이와 검둥이는 등산객들이 던져주는 먹이를 먹다가 얌전히 절 집으로 사라졌다.

등선폭포의 장엄한 물줄기.
등선폭포의 장엄한 물줄기. ⓒ 김선호
그곳에서부터 하산하는 길은 계곡과 함께 가는 길이다. 길이 따로 나있지 않고 계곡을 지그재그 건너 가야한다. 징검돌을 건너다 물에 빠지면 어떠랴, 춤추듯 징검돌을 건너 계곡을 건넌다. 거칠게 흐르는 물소리는 옆 사람의 말소리도 삼켜버릴 정도로 힘차다.

굳이 말이 필요 없는 길이다. 계곡가엔 꽃들이 무수히 피어있다. 초록 융단을 깔아놓은 듯한 초목사이로 노랑 피나물꽃이 보라색 벌깨덩굴이 한창이다.

이 물길 아래 삼악산이 빚어 놓은 '등선폭포'가 있다. 기암괴석이 이루어 놓은 협곡 사이로 쏟아질 듯 흘러내리는 폭포는 장엄미의 극치를 보여주었다. 물줄기가 품어내는 서늘함 때문이었을까? 자연이 빚어놓은 기이함 때문이었을까? 등선폭포를 마주한 순간 문득 소름이 돋았다.

기암괴석이 빚어놓은 협곡은 웅장함으로 압도하고...
기암괴석이 빚어놓은 협곡은 웅장함으로 압도하고... ⓒ 김선호
'산이 다 그렇고 그렇지'라는 고정관념은 삼악산이 보기 좋게 깨버렸다. 암벽구간이 있는가 하면 갖가지 꽃들을 피운 풍요로운 흙 길이 이어졌고, 물길을 따라 걷다 만난 곳에 문득 눈앞을 가로막던 협곡의 기암괴석까지 골고루 갖춘 삼악산은 일찍이 보았던 산과는 매우 다른 모습이었다. 삼악산은 등선폭포의 웅장함까지 전해주면서 색다른 산행의 묘미를 가르쳐 준 산으로 오래 기억되는 것 같다.

되돌아온 강촌은 오후의 열기로 뜨겁게 달아오르고 있었다. 숲에서 느껴지던 열기와는 분명히 다른 아스팔트가 품어내는 인공의 열기는 자꾸만 강변 쪽으로 사람들을 내몰았다.

드디어 자전거 안장에 올라 강변을 따라 달리는 아이들 얼굴에 희색이 만연하다. 지친 기색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저 아이들이 과연 네 시간 가까이 삼악산을 등반한 아이들이 맞나 싶다.

두 해 전 우연히 강촌에 가서 자전거를 타본 이후, 봄마다 아이들은 "강촌 가서 자전거 타자"고 졸랐다. 올해는 자전거 타기에 얹혀서 삼악산 등반을 시도해 보았다. "암벽등반 구간이 신났고 등선폭포가 신기했다"는 아이들에게 삼악산 등반은 아주 특별한 강촌의 추억으로 남을 것이라 생각해 본다.

'강촌'하면 이젠 '자전거'와 함께 '삼악산'도 기억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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