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한강변을 따라 6번 국도를 타면 양평 들머리에서 청평으로 가는 이정표와 만나게 된다. 신양평대교를 지나 다시 363번 지방도를 타고 10km 남짓 가다보면 이태리풍의 하얀색 라이브 카페가 나온다. 주말 오후 서울에서 자동차로 1시간 거리.
"당신과 나는 사랑을 했지요/ 서로 좋아 사랑했죠/ 당신과 있으면 행복해서/ 이 세상 모두가 아름답게 보이죠/ 모진 바람 불어와도/ 이젠 다시 울지 않겠어요/ 당신이 있으니까."
13일 저녁 8시. 경기도 가평군 청평 북한강가에 자리한 라이브 카페 '문주란 뮤즈클럽'. 저녁나절부터 내린 비로 궂은 날씨였지만 85평 넓이의 홀 안은 40∼50대 중년들로 꽉 찼다. 132개 좌석이 만원이다.
잠시 뒤. '빠앙∼ 빠∼ 빠'하며 반주가 나오자 진주빛이 도는 흰 구슬로 엮은 목걸이와 검정색 드레스를 곱게 차려입은 문주란씨가 노래를 부르며 객석 사이로 걸어 무대에 오른다. 요란한 박수가 터졌다. 귀에 익은 선율, '누가 이사람을 모르시나요'다.
"반갑슴니더. 비도 오는데 찾아주셔서 정말 고맙심니더. 힘이 절로 나네예. 저는 팬들의 사랑의 힘으로 노래하는기라예. 산길이라 비나 눈이 내리면 오시다가 혹시 사고라도 날까봐 너무 불안함니더. 젊은 시절부터 제 노래와 추억을 함께했지예? 남은 인생도 여러분들과 함께하고 싶슴니더."
'초우', '타인들'. 특유의 저음인 알토와 소프라노를 넘나드는 그의 가창력에 객석이 한껏 달아올랐다. 함성과 찬사가 쏟아진다. 좋아서 어쩔 줄 모르겠다는 듯 여기저기서 소리를 질러댄다. 70년대 극장 리사이틀이 아마 이랬겠지.
문씨가 "이제부터 신청곡을 불러보겠심니더"라고 하자, 기다렸다는 듯 쪽지가 밀려든다. '당신이 있으니까', '공항의 이별', '낙조', '별이 빛나는 밤에 부르스', '동숙의 노래', '남자는 여자를 귀찮게 해', '태양과 나'……. 영화 주제가 '스잔나', 배호씨가 부른 '당신', 최진희씨의 '미련 때문에' 등도 신청곡으로 올라왔다.
쪽지를 받아 든 그가 "잉가이(어지간히) 올라오네. 이걸 다 부르라고예? 오늘 문주란 죽었심니더"라고 농을 하자 한바탕 웃음이 쏟아진다. 역시 '동숙의 노래'와 '공항의 이별'이 신청곡 일순위.
잠시 뒤 '빠… 빠빠빠'하는 트럼펫 반주가 흘러나오고 문씨가 무대에서 내려와 객석을 돌며 '동숙의 노래'를 열창한다. 터질 듯한 분위기가 절정으로 치달았다.
"사랑도 해보고 미워도 해봤슴니더. 공인이라서 그런지 사랑이 참 힘들더라고예. 진실하고 숙명 같은 사랑을 하고 싶었는데, 진실하지 못한 사람을 만나 실망도 했지예. 이제 살아 온 날보다 살아 갈 날이 덜 남았잖아예. 진실하고 솔직하게 살고 싶슴니더."
다시 길게 박수가 이어진다. 이렇듯 얘기하고 노래하며 1시간30분 동안 펼쳐진 '문주란 쇼'는 불빛에 반짝이는 북한강을 배경으로 빗줄기가 창을 타고 흐르며 운치를 더했다.
가수 문주란씨. 1965년 '동숙의 노래'를 불러 공전의 히트를 쳤다. 이후 '타인들', '돌지 않는 풍차', '공항의 이별' 등을 잇따라 히트시키면서 1960∼70년대 가요계를 풍미했다. 절절한 가사와 귀에 감겨드는 멜로디가 매혹적인 그의 히트곡 대부분은 박춘석씨 작품이다.
데뷔곡 '동숙의 노래'는 1966년 남궁원·태현실이 주연한 전쟁영화 <최후 전선 180리>의 주제가로도 불렸다. 크게 히트한 만큼 노래 속의 주인공 '동숙'에 얽힌 사연과 뒷얘기도 많았다.
동숙은 1960년대 어려운 시절을 살던 우리네 누이들의 자화상이다. 당시 한 음악평론가가 "남인수 이후 가창력이 가장 뛰어난 가수는 문주란과 정훈희"라고 말할 정도로 개성 있는 그의 가창력이 가요계의 주목을 받았다. 그러나 문씨는 워낙 불심이 깊은데다 번잡한 것을 싫어 해 2000년 청평에 정착한 뒤 되도록 세상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그래서 팬들의 궁금증을 더했다.
이런 그가 오는 7월 신곡을 낼 예정이다. 1997년 '굿바이 홍콩' 이후 9년만이다. 크게 히트 쳤던 '남자는 여자를 귀찮게 해'(92년) 또한 당시 9년만의 신곡이었으니, 이번에도 예감이 좋다.
청평 그의 집에서 문씨를 만났다. 한가로이 전원생활을 하고 싶어서 2000년 지금의 이층집을 마련했단다. 아래층에는 라이브 카페 '문주란 뮤즈클럽'을 열었다. 그러자 전국에서 열성 팬들이 찾아와 공연 모습을 보여달라며 떼를 썼다. 해서 매주 토요일 저녁 8시 팬들과 '만남의 무대'를 갖기로 결심하게 된 것.
"우연히 이곳을 지나다 보니 산이 있고 물이 있고 공기가 참 맑고 좋더라고예. 전원생활도 하고 싶고 해서 여기로 왔죠. 라이브를 할 생각은 안했어예. 문주란 이름을 걸어놓으니까 오다가다 들리는 사람들이 많았슴니더. 그런데 문주란 이름만 있고 사람이 안보이니까 제발 모습만이라도 볼 수 있게 해달라고 하더라고예."
청평에 온지 6년. 이제 전원생활에 꽤 익숙해졌다. 특별한 일이 없는 날이면 하루 종일 청평에 머물면서 '꼬돌이, 뽀순이'(강아지 이름, 청평 문씨의 집에는 애견 8마리가 있다)의 재롱을 보며 전원생활을 즐긴다. 이곳 생활에 만족하느냐고 물으니 "여기 있으면 너무 좋아서 밖에 나가기 싫어져예"라는 즉답이 돌아온다.
"아침에 문을 열면 나무가 숨을 쉬는 것을 느낄 수가 있슴니더. 새벽 공기를 마시면 너무 상쾌하고 기분이 좋아지지예. 여기 있다 보면 도심으로 나가기 싫어져예. 시간 날 때마다 강아지들 데리고 숲 속에서 삼림욕하면서 지내는 게 좋슴니더. 이제는 정말 쉬는 시간을 많이 갖고 싶어예."
문씨는 어려서부터 노래를 곧잘 했다. 노래를 하도 잘해 중1 때 주위에 떠밀려 나간 부산문화방송 노래자랑에서 7주 연속 일등을 했다. 그러자 소문이 서울에까지 돌면서 문주란은 음반업체의 도움으로 서울로 올라온다. 이 무렵 인기 작곡가 백영호씨로부터 곡을 받아 취입한 것이 바로 '동숙의 노래'였다.
"우연찮게 모 방송국의 가요 콩쿠르에 누가 나가보라고 해서 나갔지예. 예선을 보는데, 제가 너무 어려 본선에 올릴지 말지 방송국에서 많이 망설였다고 하대예. 그런데 노래를 너무 잘하니까 본선에 올라가 제가 7주 일등을 했지예. 이렇게 되자 '부산가면 조그만 애가 목소리 굵고 노래를 억수로 잘한다'는 소문이 서울까지 퍼져 가수를 하게 된 거지예."
노래 인생 40년. 어찌 회한이 없겠는가. 어린 나이에 스타로 떠오르다 보니 온갖 헛소문이 그를 괴롭혔다. 당시 최고의 인기를 누리고 있던 남진씨 등 남자 연예인과의 스캔들도 늘 따라다녔다. 이 때문에 1969년 수면제를 마시고 자살을 기도해 큰 충격을 주기도 했다.
"남진씨와는 아무 상관이 없어예. 사실이 아닌데도 '문주란이는 누구랑 어떻고 누구랑 어떻고'라는 헛소문이 자꾸만 나니까 철없던 나이에 감당을 못하고 자제력을 잃었던 거지예. 당시에는 꽉 짜인 스케줄대로 움직이다 보니 시간이 없었고, 거기서 오는 환멸 같은 것도 있었슴니더. 여러 가지가 복합적으로 얽히니까 노래고 뭐고 다 싫어지대예."
그는 부산의 부유한 집안에서 태어났다. 어머니가 일찍 돌아가시는 바람에 어린 시절이 불우했다. 아버지는 부산에서 한량으로 통할 정도로 노래와 춤 솜씨가 일품이었다. 아버지의 넘치는 끼를 물려받은 것.
"저희 집안은 꽤 잘 살았슴니더. 옛날에 호별세(지금의 재산세)라고 있는데 아버지가 동네에서 1, 2위로 많이 냈다고 하더라고예. 아버지는 한량 중에 한량이었지예. 노래도 잘하시고 춤도 잘 추시고 장구도 잘 치셨음니더. 바람도 많이 피우시고 돈도 잘 쓰시고 그랬지예. 그런 아버지가 상처하신 뒤로 집안이 기울기 시작한 거지예."
신곡이 궁금해서 물었다. 문씨는 "인생의 참다운 맛이 담긴 노래를 찾다 보니까 조금 늦어지고 있다"고 했다. 누구의 곡을 고르고 있는지도 궁금했다. "가사도 중요하고, 인생에 대해 깊이 음미해볼 수 있는 맛깔스러운 곡을 준비해야 하는데…"라며 문씨는 말을 흐렸다. 그러면서 "김희갑 선생님 곡을 좋아한다"고 덧붙였다.
한 시대를 풍미했던 선배가수로서, 립싱크로 무대에 서는 일부 후배 가수들에 대한 아쉬움도 털어놓았다.
"립싱크 가수들을 보면 대부분 춤이 곁들여지니까 그럴 수도 있겠다 싶어예. 춤을 막 추면서 노래를 정갈하게 하기는 힘들지 않겠슴니꺼. 그렇지만 편히 노래할 수 있는 슬로우 곡까지 립싱크한다면 용서가 안될 것 같애예. 요즘은 솔로보다 그룹으로 많이 나오니까 가수 이름인지 노래 제목인지도 구별이 잘 안돼예."
자신이 부른 노래 가운데 가장 아끼는 곡은 '동숙의 노래', '백치 아다다', '파란 이별의 글씨', '주홍글씨' 등 대부분 쓸쓸하고 서정적인 노래를 꼽았다. '주홍글씨'는 꼭 다시 한번 불러보고 싶단다. 10년째 병마와 싸우고 있는 작곡가 박춘석씨 얘기를 꺼내자 만감이 교차하는지 한동안 말을 잇지 못했다.
"박춘석 선생님이 안 계셨으면 문주란도 없었겠지예. 5월 5일이 선생님 생신이었지만 병석에 계실 때는 생신을 안 한다고 해서 찾아 뵙지도 못했는데…. 조만간 남진씨 하고 같이 박 선생님 찾아뵐 겁니더."
문씨는 이날 박춘석씨가 평소 좋아한다는 '파란 이별의 글씨'를 참 구성지게 불렀다. 청평에 살며 언론과의 접촉을 자제해 온 그가 올해는 신곡 발표와 함께 40주년 공연도 계획하고 있다. 가을께 세종문화회관에서 펼쳐질 그의 40주년 공연이 기대된다.
| | 60~70년대 톱가수 문주란은? | | | | 문주란은 부산 서면에서 태어났다. 본명 문필연. 육남매 가운데 다섯째로 남동생과 위로 언니 넷이 있다. 어릴 때 꿈은 시인이었다. 세상을 아름답게 찬미하고 싶어서다. 1965년 '동숙의 노래'로 가수 데뷔.
중학교 1학년 때 부산문화방송 노래자랑에 나가 7주 연속 우승했다. 이를 계기로 서울에 올라와 작곡가 백영호를 만나게 된다. 문주란의 독특한 저음에 반한 백영호는 '맞춤식' 노래를 작곡한다. 이렇게 해서 탄생한 것이 불멸의 히트곡 '동숙의 노래'다.
대표곡으로는 타인들(66년), 돌지 않는 풍차(67년), 내몫까지 살아주(67년), 카사비앙카(68년), 파란 이별의 글씨(68년), 꼭 필요합니다(70년대), 백치 아다다(70년대), 별이 빛나는 밤에 부르스(71년), 공항의 이별(72), 공항대합실(73년), 생각하지 말아요(74년), 낮과 밤(70년대), 남자는 여자를 귀찮게 해(92년), 굿바이 홍콩(97년) 등이 있다. / 석희열 | |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