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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의 한 고등학교 학생과 학부모들이 학교 주변을 청소하며 봉사활동 시간을 채우고 있다. 고교생은 20시간 가운데 학교 교육과정에 포함된 10시간을 학교 대청소, 학교 주변 청소 등을 하고 봉사활동 점수를 받는다.
서울의 한 고등학교 학생과 학부모들이 학교 주변을 청소하며 봉사활동 시간을 채우고 있다. 고교생은 20시간 가운데 학교 교육과정에 포함된 10시간을 학교 대청소, 학교 주변 청소 등을 하고 봉사활동 점수를 받는다. ⓒ 우먼타임스
[이재은 기자] 중·고교생들의 봉사활동이 학생부 점수를 채우는 생색용으로 전락해 학생과 학부모 모두에게 불만을 사고 있다. 본래 취지는 봉사의 중요성을 깨닫고, 나누는 삶의 자세를 배우는 것이지만 입시에 눌린 학생들에게는 ‘빛 좋은 개살구’일 뿐이다.

일부 학생들은 봉사활동 확인 서류를 위조하는가 하면, 쉽게 확인증을 받을 수 있는 기관만을 공략하기도 한다. 교사들도 이 같은 상황을 알고 있지만, 대충 넘어가고 있는 실정이다.

나누는 삶 배운다는 취지 무색... 시간 채우기만 급급

“빨리 확인증 만들어 주세요. 할 만큼 했잖아요.”
“4시간짜리 확인증 받으려면 아직 1시간 남았으니까 행사장 주변 정리정돈하고 다시 오세요.”
“에이, XX, 학원가야 하는데... 뭐야! 진짜 짜증나.”

지난 4월 말, 서울시내 한 공원에서 열린 걷기대회에 참가한 자원봉사 학생들. 오후 2시부터 행사장 진행 안내, 주변 정리, 길 안내 등을 돕던 이들은 2시간이 지난 무렵부터 행사 본부에 확인증을 요청하기 시작했다.

봉사활동 담당자가 4시간을 채워야 확인증을 나눠줄 수 있다고 타일렀지만, 일부 학생들은 욕설을 하며 불만을 터트리기도 했다. 할 만큼 했으니 빨리 봉사활동 확인 서류에 도장을 찍어 달라는 것이다. 나머지 학생들도 담당자의 설명을 외면하며 본부석 주변에서 아무 활동도 하지 않은 채 시간을 때웠다.

한편 자녀와 함께 걷기행사에 참여한 학부모들은 당당하게 봉사활동 확인증만 요구했다. 행사 담당자가 “봉사활동을 하지 않으면 확인증을 줄 수 없다”고 설명했지만 막무가내였다.

한 학부모는 “확인증을 주지 않으면 이 황금 같은 시간에 딸을 왜 데리고 오겠느냐”며 “공부할 시간도 없는 딸을 토요일에 데리고 올 때는 봉사 확인증이 필요하기 때문”이라고 덧붙였다. 담당자는 학부모와 실랑이를 벌이다 결국 봉사활동 확인증에 도장을 찍어줬다.

학교 차원에서 단체로 봉사활동을 나온 학생들은 그나마 양심적이다. 일부 학생들은 봉사활동은 하지도 않은 채 친구가 받아온 확인증이나 자신이 과거에 받았던 확인 서류를 위조해 교사에게 제출한다.

서울의 ㅅ고등학교의 김지나(18·가명)양은 “매년 10시간 정도 봉사활동을 해야 하는데, 부담이 너무 크다”며 “동사무소, 우체국 등 시간을 많이 주는 곳에 한 번 봉사활동을 다녀온 뒤 확인증을 스캔해서 새 날짜를 입력한 스티커를 붙이고 다시 프린트하면 감쪽같다”고 말했다.

김양은 “솔직히 잔심부름이나 청소 따위를 하는 봉사활동에 아무런 보람도 느끼지 못하기 때문에 서류를 조작하는 것에 양심의 가책을 느끼지 않는다”고 덧붙였다.

경기도 부천의 ㅇ실업고교에 다니는 박이슬(17·가명)양은 “친구들끼리는 시간 많이 끊어주는 곳에 대한 정보를 공유하고 있다”며 “기관에 가서 2시간 일하고 시간 많이 줄 것 같은 남자 직원을 공략해 아양(?)을 부리면 6시간은 거뜬히 받을 수 있다”고 말했다. 눈치껏 요령을 피우면 시간 조작도 어렵지 않다는 얘기다.

학생들 이름·날짜·시간 위조 일삼아... 교사들 알고도 쉬쉬

경기 수원시립 노인전문 요양원에서 봉사활동을 하고 있는 중고생들. 노인요양원과 장애인복지시설 등은 중고생들이 기피하는 시설이지만, 일부 청소년들은 ‘진정한 봉사’를 경험하기 위해 일부러 ‘힘든 기관’을 방문하기도 한다.
경기 수원시립 노인전문 요양원에서 봉사활동을 하고 있는 중고생들. 노인요양원과 장애인복지시설 등은 중고생들이 기피하는 시설이지만, 일부 청소년들은 ‘진정한 봉사’를 경험하기 위해 일부러 ‘힘든 기관’을 방문하기도 한다. ⓒ 우먼타임스
학생들이 이처럼 편하고 쉬운 곳을 찾다 보니 진짜 일손이 필요한 노인시설, 지체장애인 요양소 등은 청소년 자원봉사자들의 덕을 보지 못하고 있다. 각 시도의 자원봉사센터에 등록된 시설 단체들은 1백여 곳 되지만 정작 학생들이 몰리는 곳은 청소, 쓰레기 줍기 등의 단순 일거리가 대부분인 관공서, 사업소 등이다.

수원시 종합자원봉사센터의 한 관계자는 “많은 중고생들이 힘든 시설은 원하지 않고, 봉사활동을 가서도 성실하게 일하지 않아 노인시설, 요양원, 장애시설들은 아예 청소년 자원봉사자들을 받지 않고 있는 추세”라며 “목욕 봉사, 말벗 봉사 등과 같이 정신적인 봉사활동을 필요로 하는 시설에 자발적으로 신청하는 학생들도 있는데 이들은 정말 봉사가 좋아서 하는 학생들”이라고 설명했다. 정작 봉사정신을 배울 수 있는 곳은 불성실한 청소년 봉사자들로 인해 아예 봉사를 할 수 있는 기회 자체가 차단되고 있는 셈이다.

이처럼 본래 취지와는 다르게 돌아가고 있는 봉사활동 실태에 대한 교사, 학부모들의 반응은 썰렁하다.

서울 창문여고의 한 교사는 “고교생의 경우 봉사활동 기록이 학생부 비교과 영역에 기재되기 때문에 봉사활동 점수를 따려고 하는 것”이라며 “일부 학생들은 본래 취지에 맞게 자신만의 봉사 영역을 찾지만, 상당수의 학생들은 시간에 쫓겨 방학 기간에 몰아서 점수를 채우고 있다”고 말했다.

그는 “교사들도 이 사실을 알지만 내신, 수학능력시험, 논술고사, 면접 등에 대비하며 시간을 쪼개야 하는 학생들에게 제대로 봉사활동을 하라고 요구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다”라고 덧붙였다.

한편 금용한 교육인적자원부 초중등교육정책과 연구관은 “지난해 시·도 교육청별 봉사활동 개선방안을 권고했지만 여전히 부족한 점이 있다”며 “봉사활동을 통해 사회와 공동체에 베풀 수 있는 인재를 만드는 것이 봉사교육의 목표인 만큼 개선과 보완을 통해 본래 취지를 살릴 수 있도록 노력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봉사활동 '역할모델' 발굴 시급... 스스로 보람 느끼도록 해야

전국중고생자원봉사대회를 비롯한 청소년 단체들이 봉사활동에 실질적인 도움을 주기 위해 구체적인 봉사 사례와 봉사 가이드라인을 담은 자원봉사 교육자료를 제작해 눈길을 끌고 있다.

이 자료집은 전국중고생자원봉사대회에서 상을 수상한 학생들의 사례를 중심으로 중고생 자원봉사활동의 중요성, 중고생들이 자원봉사를 어렵게 느끼는 이유와 해결 방안 그리고 자원봉사활동의 3단계 방안 등에 대해 소개하고 있다. 지난 7년간 축적된 다양한 중고생 자원봉사자들의 사례를 통해 왜 봉사활동을 적극적으로 해야 하는지 동기를 부여할 수 있도록 한 것.

청소년 전문가들은 "청소년들에게 모범이 될 수 있는 봉사활동 롤모델 발굴이야말로 현재의 비자발적인 봉사활동을 개선할 수 있는 방법이 될 수 있을 것"이라며 기대하고 있다. 자료는 온라인 홈페이지(www.soc.or.kr)에서 다운로드할 수 있다.

학생들이 진정한 봉사가 무엇인지 몸으로 체험할 수 있는 기관에 대한 정보 공개도 현재의 문제점을 해결할 수 있는 대안으로 제기되고 있다. 상당수의 학생들이 어떤 기관에서 봉사활동을 해야 할지 몰라 또래 친구들의 소개로 손쉽게 확인증을 받을 수 있는 기관, 단체로 몰려들고 있기 때문.

전국 16개 시도교육청과 지방자치단체는 인터넷 홈페이지를 통해 봉사활동 기관과 정보를 제공하고 있지만 학생들이 일일이 들어가 확인해 보기는 번거롭다. 이 같은 문제점을 해결하기 위해 서울시가 설립한 청소년자원봉사센터(www.sy0404.or.kr)도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있지만, 홍보가 부족해 제대로 활용되지 못하고 있다. 청소년자원봉사센터는 청소년들이 홈페이지 회원 가입 후 활동 검색을 하면 봉사활동 일시, 장소, 활동 내용, 활동 대상 등 안내된 내용을 모두 확인할 수 있다.

청소년들의 봉사활동을 성적에 반영하기보다 동아리활동, 특기적성교육, 방과 후 활동 등을 권장하는 방안도 검토해봐야 한다는 의견이 나오고 있다. 현재 중고생의 의무 봉사활동 시간은 연 18∼20시간이다. 학교 교육과정에 10시간이 포함돼 있기 때문에 학생 개인이 주말이나 방학을 이용해 따로 봉사활동을 해야 하는 실제 시간은 8∼10시간. 학교 교육과정 10시간을 포함해 18시간 이상이면 8점, 15∼17시간 7점, 15시간 미만은 6점을 받게 된다.

고교생은 20시간 가운데 학교 교육과정에 포함된 시간이 10시간으로 나머지 10시간을 따로 봉사활동을 해야 한다. 고교생은 중학생처럼 봉사활동이 점수로 기록되지는 않지만 봉사활동 기록이 학생부 비교과 영역에 기재된다.

대학 입시 전형에서 비교과 영역을 반영하는 대학들이 상당수여서 수능시험이 끝나면 고교생들이 봉사활동 시간을 채우느라 이리저리 찾아다니는 진풍경이 벌어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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