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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시도 포구 '깊은금'
신시도 포구 '깊은금' ⓒ 김준

새만금 방조제와 연결된 오솔길에서 본 신시도 포구
새만금 방조제와 연결된 오솔길에서 본 신시도 포구 ⓒ 김준
아름다운 포구 깊은금

신시도는 선유도의 군산 동쪽에 위치한 섬으로 고군산군도의 24개 가운데 가장 큰 섬이다. 이곳에 사람이 살기 시작한 것은 신라 초기로 섬 주변 바다에 많은 청어를 잡기 위해 김씨 일가가 처음 들어와 살았다고 전한다. 신라시대 때는 문창현(文昌縣)의 심리(深里)·신치(新峙)라 불렀으며, 일제강점기부터 신시도라 했다. 이곳은 신라의 대학자 고운 최치원 선생과 한일합방 시기 유학자 간제 전우 선생이 머무르면서 후학을 양성하기도 했던 곳이다.

선유도 망주봉이 마주보이는 선착장 던져놓듯 일행을 내려놓은 여객선은 뭐가 급한지 바쁘게 선유도로 내뺀다. 선착장에서 신시도로 들어가는 길은 10여분 거리, 길가에 두 채의 멸막(멸치를 삶고 건조하는 작업장)이 철을 기다리고 있다. 선유도도 그렇지만 신시도에도 낭장망을 이용해 멸치와 까나리를 잡는 어민이 두어 집 있다. 낭장망은 조류를 이용해 고기를 잡는 꽤 오래된 어법이다. 이러한 방법으로 멸치를 잡기 위해서는 조류의 흐름이 좋아야 함은 물론 갓고기들이 많아야 한다. 30여 년 전에는 육지의 어촌마을에서도 많이 이용하던 어법이지만 지금은 이렇게 섬에 들어오거나 사람의 손이 덜 탄 어촌에 가야 볼 수 있는 풍경들이다.

작은 고개를 넘자 아늑한 선유도 포구와 집들이 한 눈에 들어온다. 배를 타고 들어올 때와 사뭇 다른 분위기이다. 한눈에 아름다운 어촌이라는 느낌이다. 신시도 선착장은 '깊은 금' 안에 들어 있는 자연포구다. 산을 양쪽에 안고 깊게 만입된 곳에 아늑하게 마을이 자리하고 있다. 선착장 밑에는 신시도 이장 박병근(49)씨 부부가 흘린그물(자망)을 이용해 잡아온 생선들을 따고 있다. 숭어, 도다리, 서대, 게, 바다가재 등 지금 나오는 고기들을 전시하듯 주렁주렁 달려있다.

이들이 부부의 연을 맺기까지 특별한 사연이 있다. 10여 년 전 교회 봉사차 필리핀에 갔다 그 마을 시의원 집안의 일곱째 딸 아르세니아(36)에게 마음을 송두리째 빼앗기고 말았다. 그 후 박씨의 열정적인 구애는 신부가족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아르세니아를 신시도로 데리고 오는데 성공했다. 신시도로 시집온 아르세니아는 민박, 고기잡이, 남편의 이장일 등 생활에 적응을 넘어, 초등학교 학생들의 영어선생님으로 변신하면서 주목을 받았다. 이러한 일들이 모 방송국 <인간극장>에 소개되면서 한동안 이곳저곳의 인터뷰와 출연요청에 유명세를 톡톡히 치렀던 이장 부부의 손놀림이 바쁘다.

막 건져온 그물에서 숭어들이 펄떡거린다.
막 건져온 그물에서 숭어들이 펄떡거린다. ⓒ 김준

멸치를 삶는 '멸막'에 통발들이 가득하다.
멸치를 삶는 '멸막'에 통발들이 가득하다. ⓒ 김준

새만금사업 이전에 김양식은 고군산군도는 중요한 생업이었다.
새만금사업 이전에 김양식은 고군산군도는 중요한 생업이었다. ⓒ 김준
갓고기가 돌아오는 봄철 주민들도 섬으로 온다

대각산과 선치산 사이에 넓은 간석지를 막아 염전과 농경지를 만들었지만 지금은 소금농사를 짓지 않고 1700여 평 농지를 두 명의 주민이 경작을 하고 있다. 새만금사업이 시작되기 전 농업과 어업이 활발한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쌀·보리·고구마·채소·고추·콩 등이 자급할 정도로 생산되었다. 그리고 연근해에서는 새우·멸치·갈치·고등어 등이 잡히며, 대규모의 김 양식이 이루어졌다.

신시도는 남쪽 평지 지풍금마을에 집중 분포하고 있다. 지풍금은 '깊은 금' 즉 깊은 바다를 뜻한다. 지풍금 마을은 한때 100여 호가 거주했지만 지금은 80여 호가 남아있다. 새만금사업이 추진되기 전에는 성치산 자락에도 몇 가구의 주민들이 산을 일궈 생활했지만, 지금은 대부분 이주한 형편이다. 보통 농어촌에 비하면 가구 감소율은 거의 없는 편이며, 인근. 야미도가 40여 가구가 거주하는 것에 비하면 아주 큰 마을이다.

어장이 좋아 사람들이 많이 떠나지 않았지만 새만금사업으로 인한 보상문제, 땅값문제, 개발기대효과 등의 이유로 세대수는 줄어들지 않고 있다. 평당 몇 만원 하던 신시도의 땅값이 비싼 곳은 70여만 원까지 올랐다. 인근 야미도가 250만원까지 오른 것에 비하면 그래도 적게 오른 편이다.

한때 대부분의 마을 사람들이 김양식으로 먹고 살았지만 새만금 사업이 시작되면서 조류가 바뀌고 신시도 옆에 배수갑문이 설치되면서 양식은 더 이상 계속하기 어려워졌다. 지금은 터진 방조제가 완전히 막히고 배수갑문을 통해서 거친 조류가 드나들고 있다. 이곳을 통해 토사들이 흘러나오면서 비안도와 신시도의 바다 속 바위들은 펄로 코팅을 하듯 입혀져 인근 어장에서 어업활동은 거의 어려운 실정이다.

그리고 신시도나 야미도처럼 방조제로 연결된 섬들은 평생소원이던 육지와 연결되어 덕이라도 보지만 비안도나 두리도처럼 조류의 변화로 어업이 신통찮고 방조제 효과마저 볼 수 없는 곳은 앞길이 막막한 실정이다. 김양식을 하거나 거동이 쉽지 않은 노인들을 제외한 신시도 주민들은 겨울철이면 대부분 군산으로 나가 생활하다, 고기잡이나 농사가 시작되는 봄철이면 돌아온다.

ⓒ 김준

신시도 한 민박집에서 본 포구모습
신시도 한 민박집에서 본 포구모습 ⓒ 김준
우리 섬이 새만금의 중심이다

신시도 주민들이 새만금사업에 거는 기대는 남다르다. 누가 이곳까지 차를 타고 들어 올 것이라고 상상이나 했겠는가, 정말 천지개벽이 따로 없다. 섬이 육지가 되었다는 점 말고도 전라북도가 내놓은 신시도와 선유도를 연결하는 연도교 사업, 국내 최고의 타워건설, 국제신항 등 사업들이 신시도를 기점으로 계획되고 있다. 그래서 새만금 인근의 주민들도 새만금 사업으로 가장 큰 발전과 변화가 예상되는 지역으로 신시도를 꼽는다. 다른 지역처럼 어장을 상실하는 것도 아니면서 개발효과를 누릴 수 있다는 점 때문이다. 게다가 군산과 부안을 연결하는 33km의 중간지점이 신시도이기도 하다.

야미도는 물론 신시도도 군산시에 속해 있으며, 신시도와 가력도 배수갑문 쪽도 군산에 속한다. 군산에 일을 보기 위해서는 자동차를 이용해 방조제를 타고 군산으로 나가야 한다. 야미도는 그래도 직접 마을에서 차를 타고 나 갈수 있지만 신시도 사람들은 배를 타고 방조제 공사장 근처 선착장까지 이동해 배를 정박해 두고 야미도에 주차해 놓은 차를 가지고 나가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걸어서 성치산을 넘어 야미도로 들어가야 할 형편이다. 이러한 불편은 방조제 공사가 완료되어 국도든 지방도든 번호를 부여받기 전까지 계속될 것 같다.

새만금 방조제가 막히면서 주민들은 무엇보다 방조제와 신시도 마을을 연결하는 도로를 하루빨리 뚫어주길 원하고 있다. 그 길은 해안을 따라 도로를 내는 방법과 산을 뚫어 마을로 연결하는 방법이 있다. 그 동안 신시도 사람들이 이용했던 포구는 마을 앞 선착장인데 방조제가 막아지면서 중심이 마을 뒤쪽으로 옮겨가고 있다. 새만금방조제 완공을 기념해 야미도에서 개최되는 축하행사에 마을주민들이 모두 배를 타고 나들이를 나선 탓에 왁자지껄하던 포구가 조용하다.

지난 4월 새만금 방조제가 완공 축하공연에 참여하기 위해 배를 타는 주민들.
지난 4월 새만금 방조제가 완공 축하공연에 참여하기 위해 배를 타는 주민들. ⓒ 김준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전라도닷컴-섬섬玉섬'에도 연재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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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여 년 동안 섬과 갯벌을 기웃거리다 바다의 시간에 빠졌다. 그는 매일 바다로 가는 꿈을 꾼다. 해양문화 전문가이자 그들의 삶을 기록하는 사진작가이기도 한 그는 갯사람들의 삶을 통해 ‘오래된 미래’와 대안을 찾고 있다. 현재 전남발전연구원 해양관광팀 연구위원으로 근무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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