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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경동 시집 <꿀잠>
송경동 시집 <꿀잠> ⓒ 삶이 보이는 창
그러니 내가 시인 송경동을 만난 것은 온전히 그의 시집을 통해서다. 나이 마흔, 늦다면 늦은 나이에 그는 <꿀잠>(삶이 보이는 창)이라는 시집을 냈다.

그런데 나는 그의 시집을 읽으며, 그를 아주 자주 만난 것처럼 느끼곤 했다. 그만큼 그의 시 세계가 나와 친숙한 것이었기 때문이기도 하다. 또 그의 시가 어려운 말을 억지로 꾸며내지 않고, 담담하고 진솔하게 자신의 삶을 들려주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리어카 보관소가 있는 종묘 담 끼고 돌아
싼 밥집 모퉁이 이층
불교달력을 만들던 하꼬방 인쇄소
찬바람 일 때면 중절모 스님들이 티 몇 잔 불러두고
다방 아가씨 손금 봐주는 소리가
조용조용 간이 칸막이 너머로 들리던 곳
염주알마냥 둥그렇게 꿰어 도는
달력 조하이 일에 지치면
환풍기 창 너머 종묘 뜰
오백 년도 넘게 푸르른 단풍나무들처럼 살고 싶었다

하루에도 서너 번 난데없이 울리던 축포소리
거리는 연일 들끓는 광장이 되고
이따금씩 눈시울 적시던 최루탄가루
한적하던 나무계단을 울리며
한 떼의 청년들이 들이닥치면
왠지 모른 부끄러움에
우린 원죄처럼 얼굴을 숨겼다
그때도 치욕이라는 말을 알았을까
작업장 구석에 쥐새끼처럼 숨어
토끼눈 반짝이던 청년들보다
우리가 더 막다른 곳에 다다라 있다는 아득함
내 뜻이 원하는 곳으로 당당히 끌려갈 수 있다면
하지만 상념도 잠깐, 우린 아니라고
우린 어떤 불순한 꿈도 꿔본 적 없는 조하이공일 뿐이라고
곤봉 든 체포조들에게
이 세상에서 가장 선한 얼굴로 애걸하며
우리도 증오라는 말을 알았을까
수백 년의 세월을 가지런히 모아 풀칠하고
또 한 해씩을 떼어 철을 하다 보면
환기창 프로펠러 사이
고요한 종묘 담 너머 뜰로
붉은 해가 지고 있었다


'나는 지금도 그 뜰에 가고 싶다'는 시의 전문이다.

달력을 만드는 조그만 인쇄소 풍경과, 갑자기 들이닥친 시위대와 체포조, 그들 사이에서 부끄러움으로 고개 들지 못하는 인쇄 노동자의 비애가 이야기처럼 담겨 있다. 이 시의 시선은 시위에조차 나설 수조차 없는 처지에 놓여 있는 노동자의 것이다. 그런데 그 시선을 시인은 울분으로 그려내지 않는다.

울분일 때, 시는 구호로 떨어질 가능성이 크다. 시인은 울분 대신 '원죄', '치욕'이라는 말로 그 감정을 대신한다.

원죄나 치욕은 시선을 자신의 내부로 돌리는 언어다. 그래서 이 시는 한창 치열하던 사회 민주화 운동의 한 부분을 다루고 있으면서도 쓸쓸하고 아련하기까지 하다. 그것은 시의 제목에서처럼 어쩌면 그가 그 시절로부터 먼 길을 걸어왔지만, 그 때에 대한 그리움을 여전히 간직하고 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송경동의 시집에는 이처럼 구체적인 노동자의 삶과 경험을 서사적 울림으로 노래하는 작품이 많다. 서사는 삶의 구체성과 진정성으로부터 비롯된다. 그의 시에 서사성이 살아있다는 것은 그의 삶이 구체적 현실에 뿌리 내리고 있다는 의미가 된다.

어이, 하며 저쪽 철골 위에서 환하게 흔들던 손
야, 임마 하며 반워 손아귀를 꽉 쥐면 얼얼하던 손
H빔 위에서 떨어질 뻔한 내 등을 꼭 붙잡아주던 그 손


시 '손'의 마지막 부분이다. 그는 이 시에서처럼 건강한 노동자의 손, 서로에게 목숨을 지탱하게 하는 손을 통해 노동의 의미를 되살려낼 줄 아는 눈 밝은 시인이다. 그래서 그의 시집 <꿀잠>을 읽으면 새로운 세상을 꿈꾸며 우리가 걸어온 지난날들에 대한 그리움과, 그러나 아직도 제대로 세우지 못한 세상에 대한 희망의 불씨를 되살려 내게 된다.

실제 그는 십여 년이 넘는 세월을 구로 노동자 문학회와 전국 노동자 문학 연대에서 활동해 왔다. 현장 노동자로서의 경험과 노동 운동가로서의 의식이 시로 버무려져 한 권의 새로운 노동 시집을 탄생시킨 것이다.

수많은 이들이 자신의 이력을 부인하고 돌아서는 때, 송경동은 오히려 자신의 자취를 당당하게 드러내고 있다. 그것도 어떤 비유나 수식보다도 더 강한 경험의 사실성을 바탕으로 해서 말이다.

최근 대추리 시위 현장에서 그가 부상을 당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그 소식을 들으며 나는 '역시 그답다'는 생각을 했다. 치열한 삶의 현장 속에 서있는 시인의 의식이야말로 그의 시의 힘이 될 것이다.

바람 불어 오거리 쓸쓸한 날
아무도 없는 해장국집 들러
다글다글 끓는 지난날 떠올리자면
거기 내 그리움도 얼큰히 풀려
고춧가루 서너 숟갈 더 퍼부어도 시원찮은데

지금은 모두 어디에 있는가
맵고 짠 기억들 올올이 가슴에 안고
열 갈래 스무 갈래
떠나간 친구들


시 '오거리 뼈해장국'의 부분이다. 이 시에서처럼 함께 걷던 그 길에서 열 갈래 스무 갈래 흩어져버린 그 시절의 사람들에게 송경동의 시들은 어떤 의미로 다가갈까?

'현장에서 일할 때, 산재로 죽어 가는 사람들을 보며, 나도 저렇게 죽을 수도 있다는 생각을 유서처럼 가슴에 담고 살았다'는 시집의 머리말의 말대로 현장의 팽팽한 긴장감과 함께 노동자에 대한 한없는 동지애, 가난한 우리 이웃들에 대한 따스한 애정이 고스란히 녹아있는 시들을 읽는다.

그러면서 나는 송경동 시의 현장성이 늘 팽팽하게 깨어 있을 것이라고 믿게 되었다. 그 의식이야말로 이제는 '열 갈래 스무 갈래 떠나간' 친구들을 깨울 수 있는 무기이기도 할 테니까 말이다.

덧붙이는 글 | 송경동 : 1967년 전남 벌교 출신. 2001년 <내일을 여는 작가>, <실천문학>을 통해 작품 활동 시작. 시집 <꿀잠> (삶이 보이는 창) 을 냄.


꿀잠

송경동 지음, 삶창(삶이보이는창)(2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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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집 <장다리꽃같은 우리 아이들>, <작은 바람 하나로 시작된 우리 랑은>, <천년 전 같은 하루>, <꽃,꽃잎>, <물골, 그 집>, <람풍>등의 시집과 <비에 젖은 종이 비행기>, <꽃비> , <무지개 너머 1,230마일> 등의 소설, 여행기 <구름의 성, 운남>, <일생에 한 번은 몽골을 만나라> 등의 책을 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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