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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객들이 숨죽이며 줄광대 김대균이 첫 발 내딛기를 기다리고 있다. 국립춘천박물관 야외공연장은 1200명이 앉을 수 있다. 무료 공연으로 통계 내기가 힘들었으나, 박물관측은 통로와 스탠드 뒤 나무 밑까지 메운 이날의 입장객을 약 1500여명으로 추산했다.
관객들이 숨죽이며 줄광대 김대균이 첫 발 내딛기를 기다리고 있다. 국립춘천박물관 야외공연장은 1200명이 앉을 수 있다. 무료 공연으로 통계 내기가 힘들었으나, 박물관측은 통로와 스탠드 뒤 나무 밑까지 메운 이날의 입장객을 약 1500여명으로 추산했다. ⓒ 곽교신
개관이래 최대의 인파가 모인 춘천국립박물관

지난 토요일(5월 20일) 오후 국립춘천박물관 야외공연장에서는 중요무형문화재 제58호 김대균의 줄타기 공연이 있었다. 이를 두고 "국립춘천박물관 개관이래 단일 행사로 최대의 인파가 몰려든 것 같다"는 말이 돌았다. 이는 춘천박물관측의 광고용 발표가 아니라 지난 토요일 오후 춘천 시내 식당에서 만난 시민들의 말이다. 박물관에서 요즘 한창인 지방선거 유세가 있었던 것도 아니고 별난 공짜 상품으로 관객을 유인한 것도 아니다.

'최대 인파'라지만 1500여명에 불과하다. 그러나 이런 말을 하는 춘천 시민들은 행복한 표정이었다. 국립춘천박물관이라는 지역 문화공간에 대한 뿌듯한 문화적 자긍심이었다. 하기야 춘천시와 인근 춘천문화권의 총 15만여 명 인구를 고려하면 그만한 사람들이 모인 것을 "최대 인파"라 표현해도 무리는 아니다.

영화 <왕의 남자> 상영 이후 '줄타기'에 대한 관심이 부쩍 높아져 그 때문에 관객이 몰렸다고 볼 수도 있다. 그러나 얼마 전 문화재청 주관으로 경복궁에서 비슷한 공연이 있었을 때 모인 관중이 3000명 선이었다.

서울 인구 천 만명과 경복궁에 모인 3000여명을 감안하고, 춘천문화권 인구 15만명과 춘천박물관에 모인 1500여명을 비교하면 계산이 이상하다. 단순히 영화가 낳은 줄타기 신드롬으로만 보기에는 아무리 넉넉히 잡아도 이 날 모인 사람은 너무 많은 것이다. 그럼 춘천박물관의 '인파'는 어떻게 해석할 것인가?

춘천박물관의 권위 벗어 던지기

길건영 춘천문인협회 회장은 "춘천국립박물관은 권위에 쌓여 시민과 친하지 않던 곳이었다"며 "하지만 '이젠 박물관에서 무슨 행사가 없나' 궁금해 한다"는 말로 시민들의 박물관 사랑을 전한다. 그 자신도 박물관에 크게 관심이 없던 사람이라고 했다.

'판토마임'하면 떠오르는 춘천의 대표적 문화인물 유진규씨도 "시민들에게 먼저 다가간 춘천박물관의 변화는 문화인 및 문화 정책을 입안하는 관료들에게 시사 하는 바가 많다"는 말로 시민들과 절친해진 춘천박물관의 변화를 흐뭇해했다.

작년 봄에 부임한 정 관장이 가장 먼저 한 일은 특별기획전 준비나 문화교육 프로그램 정비가 아니라 직원들에게 깊이 배어있는 권위 의식을 깨는 일이었다. 그는 시민들이 찾지 않는 박물관은 죽은 박물관이라 단정하고 개혁을 시작했다.

직원 차량 측면에 박물관 홍보스티커를 붙이고 다니게 하고, 조간신문에 특별전 안내 전단지를 넣어 돌렸으며, 박물관 외곽 담장은 항상 행사 플래카드로 채워 호기심을 유발했다.

서로 소외감을 느끼던 지역 문화단체도 박물관장이 먼저 찾아가 서먹함을 없앴고, 박물관 강당을 지역 단체 행사 장소로 사용하게 내주었다. 모두가 박물관이 먼저 자세를 낮추고 시민들에게 다가가는 일이었다.

그러나 "우리(박물관 직원)는 너희(일반 시민)와 수준이 달라"식으로 관념적인 지적 우월감에 젖어있던 직원들의 의식을 바꾸는 일은 만만치 않아서 일부 직원들은 "우리가 왜 먼저 자세를 낮춰야 하느냐"며 은근히 반발하기도 했다고 한다.

1년이 지난 지금, 춘천박물관 직원들이 권위를 버린 대가로 예상을 초월한 결과를 얻게 되자 직원들도 스스로 놀라고 있다고 한다. 휴일이면 산과 계곡을 찾아 밖으로만 돌던 시민들은 이제 휴일에 박물관을 찾는다. 그 결과 인구 대비 박물관 입장객이 전국 최상위권에 들은 것으로 나타났다. 수학여행 등 단체 입장객이 많은 특정 국립박물관들을 빼면 인구대비 순수 관람객 전국 1위가 될 것이다.

시민들의 친근한 놀이공간으로 탈바꿈한 '박물관'

이 날 줄타기 공연은 관람객이 같이 즐기는 '쌍방향 공연'이었다. 줄타기를 체험하도록 낮게 매놓은 줄에는 공연이 끝난 후에도 관람객이 너무 몰려 나중엔 대기 인원 100명에서 끊고서야 장비를 철수 할 수 있었다.
이 날 줄타기 공연은 관람객이 같이 즐기는 '쌍방향 공연'이었다. 줄타기를 체험하도록 낮게 매놓은 줄에는 공연이 끝난 후에도 관람객이 너무 몰려 나중엔 대기 인원 100명에서 끊고서야 장비를 철수 할 수 있었다. ⓒ 곽교신
과거엔 박물관에서 특별전을 열어도 시큰둥하던 춘천 시민들이 이젠 '박물관에서 뭐 안하나'하고 먼저 궁금해 한다는 지역 인사들의 말은 공치사가 아닌 것 같다.

박물관에 모인 시민들의 표정은 박물관을 친근한 문화 공간이자 만만한 놀이터로 생각하고 있음을 말하고 있었다. 뭔가 뜻 모를 어려운 곳에 왔다는 머쓱한 표정이 아니라 나도 이런(수준 있는) 곳에 자주 들락거린다는 뿌듯한 문화적 자긍심에 찬 얼굴이었다. 시민과 박물관 간의 문턱이며 심리적 거리가 없어진 것이다.

같은 줄타기 행사를 같은 김대균씨가 같은 자리에서 공연했던 작년엔 공연자들에게 미안할 정도로 관람석이 비었었다고 한다. 올해 모인 인파는 국립박물관이 어디로 가야할 것인지 방향을 제시하고 있는 것이다.

연간 약 24억원의 국가 예산을 쓰면서도 춘천 시민들에겐 있는 듯 없는 듯하던 존재였던 국립춘천박물관이 춘천시민들 품으로 돌아간 이 사례는 문화 예산의 효율적 집행이 생각보다 어려운 일이 아님을 말하고 있기도 하다.

"뭔가 어렵고 나(시민)와는 상관없던 곳이라 생각하던 춘천박물관이, 수시로 들락거리는 만만한 곳으로 바뀐 것이 가장 큰 소득이다. 시민들이 박물관에 가서 뭘 보고 뭘 배울지는 그 다음의 일"이라는 춘천문인협회 길 회장의 말은 박물관 관계자들 뿐 아니라 이 나라 문화정책 입안자들에게 던지는 화두로 들린다.

박물관이 국민(시민)들을 위한 실질적인 종합 문화공간으로서 나가야하는 이유와 방법을 국립춘천박물관은 불과 1년 사이에 조용히 증명했다. 문화 지방자치 실현의 좋은 예이며 건강한 문화 민주주의로 가는 방향 제시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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