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핏빛울음, 동백꽃
핏빛울음, 동백꽃 ⓒ 한지숙
어느 새 한낮은 여름처럼 무덥다. 봄의 끄트머리, 햇살 가득한 시골 길섶과 지리산 골짜기마다엔 저마다 고운 자태를 드러내는 들꽃들의 향연이 눈부시기만 하다. 자연에 널린 꽃과 나무로 물들이길 원했는데 여러 자잘한 일에 쫓겨 그 시기를 놓치기 일쑤인 요즘이다.

자루에서 쏟아져 나온 동백꽃잎
자루에서 쏟아져 나온 동백꽃잎 ⓒ 한지숙
작년 4월 동백꽃잎으로 염색했을 때가 떠오른다. 형제봉 아래 늘 지나다니는 마을 어귀엔 아름드리 커다란 동백나무가 한 그루 있었다. 이곳 하동에선 흔하게 만나는 동백나무인데도 그렇게 큰 나무는 처음 보기도 했고, 지나다닐 때마다 하루가 다르게 쌓여가는 동백꽃의 잔해에 눈독을 들이지 않을 수 없었다.

상한 것과 온전한 것, 쪼그리고 앉아 3시간을 주워모았다.
상한 것과 온전한 것, 쪼그리고 앉아 3시간을 주워모았다. ⓒ 한지숙
땅바닥에 떨어진 동백꽃잎들을 아무도 쓸어내지 않는 것을 보고는 어느 하루 몽땅 주워오기로 마음먹었다. 면장갑과 큰 마대 두 장, 빗자루, 쓰레받기를 챙겨들고 내려가 쪼그리고 앉은 채 3시간쯤 쓸어모았나 보다. 이미 지저분해진 꽃잎은 검게 상한 부분도 있고 갓 떨어진 듯 온전한 빨강으로 화사한 것도 많았다.

염료와 백반에 3회 주물렀으나 미색 이상으로 물들지 않았다.
염료와 백반에 3회 주물렀으나 미색 이상으로 물들지 않았다. ⓒ 한지숙
집으로 돌아와 무조건 끓이기부터 했다. 다른 때 같으면 자료 한 번 더 꼼꼼히 챙기고 시작하는데 자루의 주둥이 끈을 풀면서부터 내 앞으로 쏟아지는 동백꽃 더미를 보는 순간, 통째로 떨어져 ‘핏빛울음’ 운다는 동백의 고혹함을 느끼고 싶은 마음이 몸보다 앞서 서두른다.

귀한 동백꽃으로 물들였다고 자랑한 스카프.(맨 위가 동백꽃)
귀한 동백꽃으로 물들였다고 자랑한 스카프.(맨 위가 동백꽃) ⓒ 한지숙
1시간 남짓 끓인 염료를 두 번에 걸쳐 삼베 보자기로 걸러냈다. 옷감을 담글 때까지만 해도 주워온 동백이 또 다른 동백으로 환생하는 밑그림을 그렸으나 말끔히 지워지기까지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염료에 옷감을 담그는 순간, 밋밋한 미색으로 드러나자 가슴은 더욱 방망이질. ‘조금 더 오래 주무르면 붉은 기운이 돌겠지…’ 주물러도 미색
그 이상으로 진해지지 않자 당혹스럽기까지 했다.

맑고 짙푸른 하늘, 물들이기 좋은 날.
맑고 짙푸른 하늘, 물들이기 좋은 날. ⓒ 한지숙
백반을 넣으면 분명 달라질 거야. 이미 반쯤 주저앉은 실망의 가슴에 애써 희망 한 조각 더 얹었건만 염색과 수세, 매염(백반)과 수세의 과정을 세 번, 네 번 반복해도 더 이상의 변화는 일어나지 않자 슬슬 배신감이 들기 시작했다.

저무는 오후의 따가운 햇살 아래 쪼그리고 앉아 허리가 아프도록 무릎이 저리도록 흙먼지 털어가며 하나하나 정성스레 주워담은 시간을 낭비한 것에 미련이 생기고, 윗녘의 친구들은 쉽게 구하지 못하는 동백꽃잎을 이렇게 허망하게 써버린 것이 못내 아쉽기만 했다.

염료 추출을 위해 알콜을 따르다.
염료 추출을 위해 알콜을 따르다. ⓒ 한지숙
지난 2월, 부산의 ‘염색아카데미’ 수업에서 자근염색을 하며 알콜에 담가 염료를 추출하는 과정을 공부했다. 책상 위 다른 비이커 속엔 핏빛으로 우러난 동백꽃잎이 놓여 있어 말로만 듣던 ‘알콜로 염료 추출하기’를 경험하고 그 결과를 마주하니 신기하기만 했다.

산행길에 만난 작약
산행길에 만난 작약 ⓒ 한지숙
며칠 전, 수만 평의 밤나무 산에 놀러가 작약 군락을 발견했다. 지난해 놓친 동백꽃 염색을 작약으로 만회하라는 뜻일까, 새로운 숙제에 벌써부터 흥미진진하다. 아, 6월엔 장미도 지천인 것을.

덧붙이는 글 | 계절에 맞는 자연의 꽃과 나무로 물들이길 원했으나 바쁜 일상에 때를 놓쳐 아쉬운 마음. 작년 4월, 동백꽃잎염색의 실패를 돌아봅니다. <조간경남>에서도 만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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