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BC 드라마 <주몽>의 시청자 게시판이 연일 뜨겁다. 재미있다는 칭찬도 있고, 자랑스런 고구려사를 왜곡했다는 비판도 있다. 사극의 역사왜곡 논란은 흔하지만, <주몽>처럼 연일 역사논쟁으로 게시판이 달아오른 경우는 처음인 것 같다.
상상력으로 채워야 하는 고대사
아테네의 고고학 박물관에 갔을 때 그저 부럽기만 했다. 고대 유물들이 '수북이' 쌓여 있어서였다. B.C. 몇 천 년 전 유물들인데도 너무 많아 자리 하나 차지 못하고 무더기로 쌓여 있다. 고대 그리스의 기록도 이에 못지않게 많이 남아 있다.
우리나라 고대사는 화가 날 정도로 기록이 적다. <삼국유사> <삼국사기>, 중국 사서의 <동이전> 발췌한 것 정도가 전부다. 그래서 국사 교과서 초기 국가편(부여, 옥저, 동예 등의 국가들)은 <삼국지> 위지 동이전을 사실상 베끼다시피 서술했다.
학부 시절 교수님이 이런 말씀을 하셨다. "고대사는 천재가 연구하고, 중세사는 보통사람이 연구하고, 근대사는 체력으로 연구합니다. 고대는 사료가 적어 상상력을 많이 발휘해야 하니 천재가 연구해야 하고, 중세는 양이 적당해서 저 같은 보통 사람이 연구하기 좋지요. 근대사는 자료가 많아 누가 많이 보느냐 싸움이니 체력으로 한다고 합니다."
고대사는, 군데군데 구멍이 난 곳에 무엇이 써있었는지 복원해야 하는, 낡고 벌레 먹은 고문서와 같다. 구멍난 부분을 바르게 복원하려면 상상력을 발휘해야 한다. <주몽>의 작가도 인터뷰에서 상상력을 많이 발휘하겠다고 밝혔다. 사극 <주몽>은 순전히 거짓말이 아니냐, 역사를 배경으로 한 사극이 오히려 역사 왜곡에 나서는 거 아니냐는 비판이 나올 수 있다.
그러나 사극이 역사 연구에 영감을 제공할 수도 있다. 역사가에게는 사실만 써야 한다는 제약이 있지만, 작가에게는 그런 제약 없어 자유로운 상상력을 발휘할 수 있기 때문이다. 작가가 그럴 듯하게 써 내려간 이야기가 기발한 아이디어가 되어 새로운 역사 이론이 나올 수도 있다.
사료의 문제
게시판에는 작가가 기본적 역사 공부도 하지 않고, 식민 사학이 주장한 잘못된 학설대로 드라마를 썼다는 비판도 있다. 하지만 이것은 그 시청자가 한 학자의 견해만 읽고 그 반론은 읽어보지 않아서이다.
자료가 적은 고대사이다 보니 학자들은 궁리를 거듭해 많은 학설을 내놓았고, 상당수가 갑론을박 중이다. 아마도 정설, 통설이 가장 적은 시대가 고대사가 아닐까 싶다. 어떤 학설을 명쾌하게 부정하기도 받아들이기도 사료가 부족하기 때문이다.
어떤 이는 환단고기, 태백일사, 규원사화 등이 고대사 사료인데, 식민사학에 오염된 강단 사학계가 이들을 부정한다고 한다. 하지만 신뢰도가 높은 사서(예를 들자면, 사마천의 <사기> 등)도 꼼꼼히 사료 비판을 해서(<사기>의 한의 고조선 정벌 기록의 경우 중국인의 시각으로 쓴 것이니 중도적 시각에서 다시 비판적으로 검토, 이용해야 한다) 이용해야 하는데, 진위 논쟁이 있는 책을 믿고 싶다고 무조건 이용할 수는 없다.
이는 일본이 논란이 많은 역사 기록(<일본서기>는 일본 고대사 연구의 기본적 사서이지만, 6세기 이전 기록은 전설로 보는 학자가 많다)을 근거로 독도, 임나일본부의 역사를 왜곡한다고 비판하면서, 우리도 똑같은 짓을 하는 격이다. 환단고기 등이 신뢰할 수 있다고 밝혀지면 사료로 쓸 수 있겠지만, 아직은 그럴 수 없다.
<주몽>의 드라마적 설정과 역사 왜곡 논쟁
드라마 <주몽>은 ①한 군현에 저항하는 고조선 유민의 영웅 해모수 ②해모수와 금와의 동지 관계 ③해모수와 유화의 사랑 ④한의 철기군 등을 역사 기록과는 다르게 창조해 설정했다. 이런 설정이 역사적 기록과 다르니 왜곡이라는 주장도 있다.
하지만 역사적 기록에 충실하려면 해모수는 오룡거를 타고 하늘에서 내려와야 하고, 유화를 꾀어 정을 통한 후 도망가야 하며, 주몽은 알에서 태어나야 한다. 이것이 윤색된 설화이니 신화 해석 기법을 써서 현실적으로 고치더라도 재미없기는 마찬가지다.
위 설정 중 가장 비난을 많이 받은 부분은 한 군현 관련 내용이다. 현토군은 압록강 부근에 없었고, 한 군현이 우리 민족을 지배하지도 못했으며, 현토군 태수 따위가 우리의 군장들을 소환하는 따위의 설정은 말도 안 된다는 주장이 있다.
현토군을 비롯한 한 4군의 위치 문제는 여전히 논란 중이다. 그 중 어느 학설을 택해도 식민사학의 시각이다, 국수주의적 시각이라며 역시 비난을 받았을 것이다.
중국 사서는 고조선이 8조법 만으로도 잘 살았는데, 한 군현의 지배를 받으면서 법이 60여 조목으로 늘어났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를 고등학교 국사 교과서는 한 군현의 가혹한 지배로 고조선 유민들이 고생하고 살았다는 내용으로 해석한다. 고구려 성립 후 성장 과정은 한 군현과의 투쟁과정이었다. 교과서는 미천왕 때 낙랑군을 마지막으로 한 4군을 몰아낸 것으로 본다.
중국인들이 왜곡해 기록한 역사를 사학계가 받아들이고, <주몽>은 그것을 답습하여 드라마를 만들고 있으니 중국의 동북공정보다 더한 고대사 왜곡이라는 주장도 있다. 우리 민족은 고조선 때 중원까지 장악해 넓은 영토를 지배했으며 강력한 제국을 건설했다는 주장과 함께.
하지만 이것은 정말 아니다. 역사는 우리의 과거를 멋지게 창작하여 후손들에게 용기를 주기 위해 배우는 것이 아니다. 현재 우리의 모습이 왜 이런지 과거를 살펴봄으로 해서 바르게 이해하고, 이를 토대로 미래를 잘 만들어 가기 위해 배우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반드시 진실을 배워야 하고, 역사의 진실을 찾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아직 증거를 찾지 못한 기록에 의거해, 우리 조상은 광활한 대륙을 지배했고 우리 민족은 위대했다고 말하는 것은 옳지 못하다. 이것이 국수주의이기 때문이다. 과거사를 바르게 밝혀내는 것도 중요하지만, 우리는 위대했던 나라의 후손이 아니라, 위대한 나라의 국민, 여전히 위대할 나라의 고마운 조상들이 되어야 할 것이다.
<삼국사기> 동명성왕편은 구전되다 윤색된 설화이다. 역사적 진실은 모른다. 해모수가 한에 저항한 고조선 유민의 영웅이었기에 천제의 아들로 윤색되었을 수도 있고, 유화를 사랑했지만 한 군현 군대에 살해되었기에 도망간 것으로 윤색되었을 수도 있다. 그래도 해모수가 너무나 그리워 백성들이 그를 북부여의 왕이 되었다고 설화에서나마 왕으로 만들었을 지도 모른다.
작가가 역사적 기록을 토대로 상상력을 발휘해 그 시대에 그 주인공들이 했을 법한 이야기를 만들어 낸 것이 사극이고, <주몽>의 이런 드라마적 설정은 그다지 억지스럽지 않다.
사극은 드라마일 뿐
<주몽>에도 물론 오류는 있다. 지적하고 싶은 것은 철기군의 갑옷과 전투 형태다. 해모수가 철기군을 화살로 쏘는데, 아무리 괴련철이라지만 정확히 쏘았는데도 튕겨나가는 설정은 비현실적이다. 서양 중세 기사들의 갑옷이 점점 두꺼워진 것은 창이 철갑옷을 뚫지 못하게 하기 위해서였다. 뾰족한 창에 갑옷은 쉽게 구멍이 났다.
화살촉을 튕겨낼 만큼 갑옷을 두껍게 만들었다면, 철기군은 갑옷이 무거워 혼자서는 말에 타지도 못하고, 말에서 떨어지면 움직일 수도 없어야 한다. 서양 기사들의 마상시합(토너먼트)에서 창으로 상대의 얼굴, 몸통을 찌르는 것보다 더 높은 점수를 받은 것은 상대를 말에서 떨어뜨리는 것이었다. 전쟁터에서 기사가 말에서 떨어졌다면 적이 와서 투구를 벗기고 죽일 때까지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고 한다. 갑옷이 무거워서 움직일 수 없었기 때문이다.
역사 발전 단계상 불가능하거나 물리적으로 불가능한 설정이라면 오류라고 지적해 주는 것이 옳다(물론 드라마를 찍다보면 알면서도 할 수 없이 불가능한 설정을 넣는 경우도 있다). 하지만 역사적 상상력을 마음껏 발휘해 만든 내용까지 역사책과 다르다고 딴죽을 건다면 재미있고 감동적인 사극은 포기하고 현대를 무대로 한 드라마만 만들어야 한다.
많은 이가 걱정하는 것은, 사람들이 역사 드라마가 진짜인 줄 알고 잘못된 역사 지식을 가지게 된다는 것이다. 하지만 사극은 드라마이다. 역사 다큐멘터리가 아닌 드라마인 것을 염두에 두고 봐야 한다.
과거와 현재의 끊임없는 대화
역사는 과거와 현재의 끊임없는 대화라고 한다. 처음 들었을 때는 무슨 말인지 이해하지 못했다. 일어난 과거의 사건은 변하지 않지만, 그 사건에 대한 해석은 시대마다 달라진다는 의미였다. 역사를 항상 새롭게 해석해서 그것으로 미래를 발전적으로 만들자는 말이었다.
여기에 사극이 기여할 수 있다. 역사를 재해석한 논문이 많지만 대개가 지루하다. 하지만 역사적 상상력으로 새롭게 해석한 사극은 시청자에게 재미와 영감을 줄 수 있다. 사극이 과거와 현재의 대화를 재미있고 쉽게 보여줄 수 있는 것이다. <주몽>이 고구려사의 새로운 해석을 보여주는 좋은 문화상품이 되기를 기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