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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3년 10월 현대비자금 사건 관련 국정감사 증인으로 출석한 이익치, 박지원, 권노갑씨.
2003년 10월 현대비자금 사건 관련 국정감사 증인으로 출석한 이익치, 박지원, 권노갑씨. ⓒ 오마이뉴스 이종호

박지원 전 문광부장관에 대한 파기환송심 재판을 맡은 서울고법 형사2부(재판장 이재환 부장판사)가 25일 현대비자금 150억 원 수수혐의에 대해 무죄를 선고한 가운데, 검찰이 이 사건에서 이익치 전 현대증권 회장에 대한 처벌을 면제해주는 대가로 이씨가 검찰이 요구하는 대로 박 장관에게 불리한 진술을 하는 '거래'(플리 바기닝)를 했음을 입증하는 증언과 증거가 나왔다.

플리 바기닝(Plea Bargaining)이란, 검찰이 수사편의상 주요 관련자 또는 피의자에 대해 유죄를 인정하거나 증언하는 대가로 협상을 통해 형량을 경감하거나 면제하는 것으로, 대법원은 플리 바겐에 의한 진술은 증거로 채택되기 힘들다는 취지의 판례를 제시한 바 있다.

현대 비자금 수사 관계자의 증언과 검찰 수사기록으로 '플리 바겐' 확인은 처음

지난 2003년 현대비자금 사건을 수사한 검찰 관계자는 최근 <오마이뉴스> 기자와 만나 "당시 우리는 권노갑씨와 박지원씨에게 각각 200억 원과 150억 원을 건넸다고 진술한 이익치씨를 상전 모시듯 했다"고 밝혔다. 이 검찰 관계자는 "특히 정몽헌 회장이 검찰 조사중에 자살함에 따라 이씨는 돈을 건넨 사실을 증언해줄 유일한 증인이었기 때문에 이씨와 현대그룹간 민형사 사건의 편의를 봐주는 등 보물 다루듯 했다"고 덧붙였다.

또 <오마이뉴스>가 입수한 '이익치에게 200억 수수 우선 수사 고지' 제목의 대검 중수부의 수사보고서(2003년 8월 12일 양부남 검사)에 따르면, 검찰은 당시 권노갑 씨를 조사하면서 이익치 씨를 참고인 자격으로 불러 대질조사하기 전에 "수사기법과 편의상 200억 원 부분에 대해 우선적으로 수사함을 이익치씨에게 사전 고지해 대질수사 도중 권노갑씨가 있는 자리에서 이익치씨가 2500만 달러 관련 언급을 하지 않도록 미리 수사협조를 요청했음"이 입증되었다.

박지원 전 장관의 현대 비자금 150억 원 수수 의혹 사건이 핵심 증인의 '면죄부'를 대가로 한 플리 바기닝의 결과라는 의혹이 제기된 것은 이번이 처음은 아니다.

이미 2003년 6∼8월경에도 대북송금 특검(송두환 특별검사)과 특검으로부터 수사기록을 넘겨받아 현대 비자금 사건을 수사한 대검 중수부 수사팀은 대북송금 사건의 상징적 인물인 박지원 전 장관을 구속하기 위해 이익치씨와 무기중개상 김영완(해외 도피중)씨에 대해 '수사에 협조할 경우 불구속 수사할 수 있다'는 방침을 정하고 이익치·김영완씨측과 협상을 벌였다는 플리 바겐 의혹이 제기된 바 있다.

또 <오마이뉴스>도 지난 2004년 9월 24일 김영완 씨의 측근인 오성우(재미교포)씨 인터뷰를 통해 검찰이 김영완·이익치 씨와 면죄부를 대가로 '플리 바겐'한 의혹을 집중 추적해 두 차례에 걸쳐 보도한 바 있다. 그러나 이처럼 현대 비자금 수사에 직접 참여한 검찰 관계자의 증언과 검찰이 작성한 수사기록으로 플리 바겐 의혹이 확인되기는 이번이 처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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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노갑, 박지원 150억원 무죄면 수사팀을 위계 의한 공무집행방해죄 고발 예정

2005년 10월 당시 형집행정지로 치료중인 권노갑씨. 권씨는 박지원씨가 150억원 수수혐의에 대해 무죄를 선고받음에 따라, 이익치씨를 봐주는 대가로 자신에게 불리한 진술을 '조율'한 의혹이 있는 대검 중수부 관계자들을 직무유기나 위계에 의한 공무집행방해죄 등의 혐의로 고발할 것으로 예상된다.
2005년 10월 당시 형집행정지로 치료중인 권노갑씨. 권씨는 박지원씨가 150억원 수수혐의에 대해 무죄를 선고받음에 따라, 이익치씨를 봐주는 대가로 자신에게 불리한 진술을 '조율'한 의혹이 있는 대검 중수부 관계자들을 직무유기나 위계에 의한 공무집행방해죄 등의 혐의로 고발할 것으로 예상된다. ⓒ 오마이뉴스 김당
한편 25일 박지원씨 파기환송심 선고공판에서 150억원 수수혐의에 대해 무죄가 선고됨에 따라, 권노갑씨 등이 이익치씨를 봐주는 대가로 자신에게 불리한 진술을 강요한 대검 중수부 수사 관계자들을 직무유기나 위계에 의한 공무집행방해죄 등의 혐의로 고발할 것으로 예상돼 이씨에 대한 재수사가 불가피할 것으로 보인다.

권씨의 한 측근은 "박 장관이 150억원 수수혐의에 대해 무죄를 선고받음에 따라 결국 150억원을 전달했다는 이익치씨가 입증 책임을 지는 것 아니냐"며 "따라서 권 고문에게도 200억원을 전달했다는 이익치씨를 입건조차 하지 않고 권 고문에게 모든 것을 뒤집어 씌운 중수부 수사팀을 고발해 이씨에 대한 재수사를 이끌어내고 재심을 통해 무죄를 입증할 것"이라고 밝혔다.

검찰 수사결과에 따르면 이익치씨는 150억원의 뇌물을 박 전 장관에게 전달한 '뇌물 공여전달자'이다. 그런데 뇌물이 아닌 단순한 정치자금 전달자도 처벌된 전례가 있다. 그것도 바로 대검 중수부가 수사한 사건에서 그랬다.

또 이씨 본인도 정치자금 전달 혐의로 사법처리된 전례가 있다. 이른바 세풍(稅風) 사건에서 현대가(家)의 '오너'를 대신해 이회창 후보 캠프에 거액의 정치자금을 전달한 혐의였다.

대북송금 사건에서 유죄를 선고받은 김윤규 현대아산 사장의 형량과 비교해도 검찰이 이씨를 불입건한 것은 형평에 맞지 않게 대조적이다. 김 사장은 1심에서 외국환거래법과 남북교류협력법 위반 혐의로 징역 1년에 집행유예 2년을 선고받았다.

그런데 검찰이 제시한 '범죄사실'에 따르더라도 ▲피고인 김윤규는 이익치 등과 공모해 재경부장관에게 신고하지 아니하고 ▲피고인 김윤규는 공소외 이익치 등과 공모해 통일부장관의 협력사업승인을 얻지 아니하고 북한에 4억5천만 달러를 송금해 협력사업을 시행하고 등으로 공모관계를 적시하고 있다.

검찰 관계자 "이익치가 혹시라도 초기 진술을 바꿀까봐 전전긍긍했다"

그런데도 검찰이 다른 사람은 죄다 입건·구속하면서도 이씨에 대해서는 150억원 뇌물 공여전달은 물론 대북송금 공모혐의로도 입건조차 하지 않았다.

이와 관련 2003년 현대비자금 사건을 수사한 검찰 관계자는 "우리는 권노갑씨와 박지원씨에게 각각 200억원과 150억원을 건넸다고 진술한 이익치씨를 상전 모시듯 했다"면서 모종의 '거래'가 있었음을 시인했다.

이 관계자는 "특히 정몽헌 회장이 검찰 조사중에 자살(2003년 8월 4일)함에 따라 이씨는 돈을 건넨 사실을 증언해줄 유일한 증인이었기 때문에 수사팀은 이씨가 혹시라도 초기 진술을 바꿀까봐 전전긍긍했다"면서 "이씨의 요청으로 이씨와 현대그룹간 민형사 사건의 편의를 봐주는 등 이씨가 원하는 것은 다 들어주면서 보물 다루듯 했다"고 밝혔다.

정몽헌 회장 사망 이후 검찰이 이익치씨에게 '수사협조'라는 이름으로 진술을 '조율'하고 있음을 알 수 있는 2003년 8월 12일자 대검 중수부 수사보고서.
정몽헌 회장 사망 이후 검찰이 이익치씨에게 '수사협조'라는 이름으로 진술을 '조율'하고 있음을 알 수 있는 2003년 8월 12일자 대검 중수부 수사보고서. ⓒ 오마이뉴스
검찰과 이씨의 '거래' 사실은 검찰이 작성한 수사보고서에서도 드러난다. 대검 중수부 양부남 검사가 정 회장이 자살한 뒤인 2003년 8월 12일자로 작성한 '이익치에게 200억원 수수 우선 수사 고지' 제목의 수사보고서는 이렇게 돼 있다.

"권노갑 피의자와 이익치 참고인을 대질조사함에 있어 수사기법과 편의상 200억 부분에 대해 우선적으로 수사함을 이익치에게 사전 고지하여 대질수사 도중 권노갑이 있는 자리에서 이익치가 2500만불 관련 언급을 하지 않도록 미리 수사협조 요청하였음을 보고드립니다."

검찰은 수사보고서에서 '수사기법과 편의상'이라는 표현을 쓰고 있지만, 이씨에게 '수사협조'라는 이름으로 진술을 '조율'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대검 중수부, '수사협조'라는 이름으로 이익치씨 진술 '조율'

언론에만 공표하고 공소장에는 포함되지 않은 권노갑씨의 2500만 달러 수수혐의는 '미제' 사건으로 남아있다.

그런데 검찰에서 2500만 달러(처음에는 3000만달러)를 처음 언급한 사람은 이익치씨였다. 이씨는 2003년 7월 25일 검찰 진술에서 정 회장 지시로 3000만달러가 '민주당'에 건네졌으며 자신은 김영완씨로부터 해외계좌를 받아 정 회장에게 전달했다고 밝혔다.

그런데 그 다음날 정 회장은 2차 진술에서 2000년 1월경 권노갑씨에게 3000만달러를 전달했다고 털어놓았다. 신라호텔 라운지 커피숍에서 이익치, 김영완씨와 함께 권씨를 만났는데 그 자리에서 권씨가 "총선이 얼마 안 남았다. 여당을 도와줘야 대북사업도 잘 되지 않겠냐"며 돈을 요구했다는 것이다.

검찰이 확인한 바에 따르면 현대상선 미주법인은 2000년 2월 26일 스위스연방은행 모 계좌로 2500만달러를 송금했다. 한시가 급한 '총선 지원용' 자금을 해외계좌로 송금해 달라는 것은 상식밖의 일이다.

게다가 정 회장은 검찰에서 2000년 2월말 권노갑씨로부터 "지난번엔 고마웠다"는 인사와 함께 200억원을 추가로 요청받았다고 진술했다. 정 회장의 진술이 사실이라면 권씨는 2500만달러(320억원 가량)를 받은 지 며칠 만에 다시 200억이라는 거액을 요구했고 정 회장은 그 부탁을 들어준 셈이다. 이 또한 상식밖의 일이다.

권씨측은 만약 200억원을 받았다면 '총선 지원' 명목으로 받은 것이므로 정치자금 성격이 짙은데 정 회장과 이익치씨가 '카지노 청탁의 대가'라고 진술한 데는 검찰의 의도가 작용한 것으로 본다. 즉 정치자금법 위반죄의 시효(3년)가 지나 그것으로는 기소할 수 없기 때문에 공소시효가 5년인 뇌물수수죄(특가법상 알선수재)를 적용하기 위해선 두 사람의 진술이 꼭 필요했다는 것이다.

이익치씨, 2003년 6월 중수부 조사받기 전에 현대가(家)와 '척'져

그런데 이씨가 지난 2003년 2월 서울중앙지검에 제출한 고소장 등에 따르면, 이씨는 그해 2월 4일과 11일 2회에 걸쳐 서울지검에 현대그룹 사주인 정몽구, 정몽헌, 정몽준 등 정씨 일가뿐만 아니라 자신과 함께 근무했던 동료 직원 십수명을 증권거래법 위반죄로 고소한 데 이어 2월 11일과 4월 14일 2회에 걸쳐 고소인 진술조사를 받았다.

알다시피 이 회장은 99년 현대증권 회장 재임 중 주가조작 혐의로 구속되어 증권거래법 위반으로 징역 2년, 집행유예 3년을 선고받았다. 이 회장은 그 때문에 현대중공업으로부터 손해배상 청구소송을 당해 실질적 오너인 정몽준 의원과 '척'을 졌으며 그 '원한'은 2002년 대선 전 '정몽준 후보 비난' 기자회견으로 폭발된 바 있다.

이 회장은 또 주가조작 사건으로 구속되었다가 출감한 뒤에도 2000년 3월 이른바 '왕자의 난'을 거치면서 정몽구 현대차 회장과도 '척'을 졌고, 그는 2000년 9월 현대증권 대표이사 회장(99년 1월~)을 마지막으로 현대그룹을 떠났다.

이씨 스스로도 고소장에서 '2000년 9월 현대그룹에 의해 버림당했다'고 주장했다. 또 이씨가 평소에 '아버지'라고 불렀던 정주영 명예회장마저 2001년 3월 세상을 뜨는 바람에 이 회장은 현대가에서 아무도 의지할 데가 없는 '고아'나 다름없었다.

게다가 이씨는 앞서의 97년 현대증권 대표이사 사장 시절에 이사회 결의를 거치지 않은 채 현대중공업에 현대증권 대표이사 명의의 지급보증 각서를 써준 혐의(업무상 배임)로 추가로 고소고발 되었다가 지난 2004년 6월에 서울중앙지검 금융조사부에 의해 불구속 기소되었다.

또 현대중공업은 이 각서를 근거로 이씨와 현대증권, 현대전자 등을 상대로 2억2천만 달러의 연대지급을 청구하는 민사소송을 제기해 2002년 1월 1심에서 1,718억원의 일부 승소판결을 받아냄으로써 이씨 등이 상고해 현재 대법원에 계류중인 것으로 알려졌으나 이씨는 이 소송에서 패할 경우 빈털터리가 될 가능성이 크다.

이익치씨, 자신의 '복수극' 위해서도 검찰 '수사협조'에 적극적으로 응한 듯

결국 이씨는 자신이 30여년 동안 '헌신'해온 회사로부터 1999~2000년 사이에 잇달아 형사고발 및 손해배상 청구소송, 그리고 '왕자의 난'을 겪고서 쫓겨나는 신세가 되었고, 이 때문에 이씨는 대북송금 특검 조사를 받을 무렵에 이미 자신이 '왕자'로 모셨던 정몽헌 회장을 비롯해 함께 일한 임직원 십수명을 고소할 만큼 현대가에 대한 적개심으로 불타 있었다.

따라서 이씨로서는 자신의 '복수극'을 위해서는 물론 정몽구·정몽헌·정몽준 일가와 벌이고 있는 민형사 사건에 대한 유리한 환경을 조성하기 위해서라도 김대중 정부의 권력 핵심으로 간주된 권노갑·박지원씨를 사법처리 하기 위한 검찰의 '수사협조'에 적극적으로 응한 것으로 보인다.

이와 관련 박지원씨의 변호인인 소동기 변호사도 지난 4월 20일 재판부에 제출한 변론보충서에서 "이익치는 검찰이 자신에 대해 처벌을 면제해주는 대가로 검찰이 요구하는 대로 허위진술했다는 의구심을 배제할 수 없다"고 주장했다.

플리 바기닝(Plea Bargaining)이란?
대법원, "플리 바겐에 의한 진술은 증거로 채택되기 힘들다"

플리 바겐(Plea Bargain) 혹은 플리 바기닝(Plea Bargaining)으로 표현하는 이 '사전형량조정제도'는 검찰이 수사편의상 주요 관련자 또는 피의자에 대해 유죄를 인정하거나 증언을 하는 대가로 협상을 통해 형량을 경감하거나 조정하는 것으로 주로 미국에서 많이 행해지고 있는 제도이다.

우리나라에서는 이 사전형량조정제도를 법적으로 채택하고 있지 않다. 그러나 검찰의 기소에 대한 재량을 폭넓게 인정하는 기소독점주의와 기소편의주의를 채택하고 있어 이와 유사한 형태의 수사가 종종 행해지고 있다. 주로 뇌물공여죄나 마약범죄 등과 같이 자백이 필수적이거나 당사자의 제보가 결정적인 단서로 작용하는 범죄의 수사과정에서 제한적으로 적용된다.

그러나 플리 바겐은 피의자의 약점을 잡아 제3자의 수사단서나 범죄 관련 진술을 확보한다는 점에서 비인간적이고 반인권적인 수사기법이라는 비판이 높으며, 대법원도 플리 바겐에 의한 진술은 증거로 채택되기 힘들다는 취지의 판례를 제시한 바 있다. 왜냐하면 플리 바기닝은 자백으로만 처벌케 해 피의자에 대한 수사기관의 강제적인 허위자백 유발로 무고한 피해자를 발생시킬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

덧붙이는 글 | * 김당 기자의 블로그(http://blog.ohmynews.com/dangk/124360)를 방문하면 지난 3년 동안의 박지원 씨 사건에 대한 집중취재 기사와 특종기를 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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