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미동맹 재편과 관련해 규명되어야 할 핵심적인 의문 가운데 하나는 '자주적이고 수평적인 한미관계를 지향하겠다던 노무현 정부 때, 왜 미국이 원하는 형태로 한미동맹이 재편되고 있는 것인가'라는 것이다.
한미동맹의 변화와 관련해 노무현 정부는 이라크 파병, 미군 기지 재배치 및 감축, 전략적 유연성 등 각종 현안을 원만하게 해결함으로써 보다 수평적이고 긴밀하게 발전해왔다고 평가한다. 그러나 노무현 정부의 지지 기반이었던 개혁·진보세력은 이러한 평가에 동의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한국의 대미 종속성이 강화되면서 한미동맹이 미국 패권주의의 도구로 전락하고 있다고 비판한다. 이에 반해 노무현 정부 집권 전반기에 정부의 한미동맹관을 집중적으로 문제삼았던 보수세력은 한미동맹 재편 결과에 대체로 만족감을 표시하고 있다.
그렇다면, 이러한 결과가 나온 이유는 무엇일까? 먼저 노무현 대통령의 동맹관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정치 지도자의 인식이 정책 결정의 중요한 요소라고 할 때, 노 대통령의 동맹관은 한미동맹 재편 요인을 설명할 수 있는 핵심적인 요소이다. 특히 노무현 정부 출범과 동시에 한미동맹 재편이 추진되었다는 점에서, 대통령의 한미동맹에 대한 초기 인식은 대단히 중요하다.
대선 후보와 당선자 시절에 대미 자주적, 혹은 반미에 가까운 발언으로 논란을 일으키기도 했지만, 노 대통령의 한미동맹관은 한마디로 '유지를 전제로 한 변화'라고 할 수 있다. 대선 후보 때, "지난 50년간 한미동맹관계의 발전과 탈냉전 시대에 맞추어 이제 한미관계는 보다 수평적이고 균형적인 관계로 나아가야 한다"고 말한 것은 이러한 동맹관을 상징한다.
'콘텐츠'가 없었던 노무현 정부
그러나 노무현 정부는 동맹 변화의 구체적인 내용과 일정을 마련하지 않은 상태에서 '먼저' 한미동맹 재편 입장을 미국에 전달함으로써, 마찬가지로 한미동맹 재편을 추진하고자 했던 부시 행정부에게 역이용 당하고 말았다. 노무현 정부는 동맹 재편의 '각론'은 없고 '총론'만 있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데, 이는 동맹 재편의 구체적인 상을 그리고 있었던 부시 행정부에게는 반가운 소식이었다.
도널드 럼스펠드 미국 국방장관이 2003년 2월 3일 노 대통령 당선자의 고위 대표단을 만난 자리에서 "한미동맹 50주년을 맞아 동맹관계의 균형을 다시 조정할 필요가 있다"는 노 당선자의 입장에 대해, "동맹의 균형 재조정 필요성에 동의하며 긴밀히 협의할 용의가 있다"며 화답한 것은 이러한 분석을 뒷받침한다.
특히 럼스펠드는 이 자리에서 용산기지와 2사단 등 한강 이북의 미군 기지 이전을 위해 노무현 정권과 긴밀히 협력하자고 제안했다. 반면 한국의 대표단은 동맹 재편과 관련해 구체적인 요구 사항을 내놓지 않았다. 오히려 "우리는 동맹국으로서 일방적으로 미국에 요구만 하지 않고 더욱 능력 있는 동맹 상대방이 되겠다"고 말했는데, 이는 미국의 동맹 재편 방향과 정확히 일치한 것이었다.
자주적 발언의 반작용
노무현 정부가 미국의 요구에 대단히 취약한 모습을 띠게 된 원인에는 자주적, 반미적 발언이 반작용을 불러왔다는 점도 지적할 수 있다. 주지하다시피, 부시 행정부의 "악의 축" 발언과 대북강경책, 안톤 오노 사건, 미군 장갑차에 의한 여중생 사망 사건 및 이에 대한 미국의 무죄 평결 등으로 인해 2002년 대통령 선거에서 '미국 문제'는 뜨거운 쟁점으로 부상했다.
이와 관련해 노무현 후보는 "사진 찍으러는 미국에 가지 않겠다"는 발언이 상징하듯 '반미'에 가까운 발언을 즐겨 사용했다. 이러한 노무현 후보의 대미관은 당시 미국에 비판적이었던 여론에 호소력을 가지면서 대통령 당선을 가능케 한 하나의 요인으로 작용했다.
이렇듯 자주적이고 수평적인 한미동맹관을 피력했던 노무현 후보가 대통령에 당선되자, 한미 양국의 보수세력은 미국 내의 반한감정과 주한미군 철수론을 집중적으로 제기하면서 노무현 정부를 공격했다. 그러자 노무현 정부는 '반미' 혐의를 벗고자 했다. 일례로 2003년 1월 15일 한미연합사를 방문해, 미군 장병들을 격려하고 주한미군의 역할과 굳건한 한미동맹관계 유지의 중요성을 역설했다.
또한 출범 직후에는 핵심적인 대선 공약인 주한미군주둔군지위협정(SOFA) 개정을 '북핵 해결' 뒤로 미뤘고, 개혁·진보 세력의 강력한 반발에도 불구하고 미국의 이라크 침공을 지지하고 파병까지 단행했다. 대미 자주적 발언들이 '반미 혐의'를 가져오고 이러한 혐의를 씻으려다 보니 미국의 요구에 취약해지는 결과를 낳았던 것이다.
여기서 주목할 것은 노무현 대통령이 즐겨 사용한 자주적 발언의 '상반된 이중 결과'이다. 여기서 상반된 이중 결과란 노 대통령의 대미 자주적 발언들이 한편으로는 반미 혐의를 씻고자 정책적 친미화로 귀결되었고, 다른 한편으로는 정책의 친미화를 희석시키는 효과를 가져왔다는 것을 의미한다. 대체로 보수세력은 노무현 정부의 발언과 인사를 문제삼았던 반면에, 진보세력은 정책을 비판해왔다는 것은 이러한 분석을 뒷받침한다.
노무현 대통령이 2003년 8월 15일 광복절에서 천명한 자주국방이나 2005년 3월 8일 동북아 균형자 발언도 마찬가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이러한 안보전략이 한미동맹을 저해할 수 있다는 비판이 한미 양국에서 제기되자, 노무현 정부는 자주국방 앞에 '협력적'이라는 수식어를 붙여 한미동맹과 병행·발전하는 개념이고, 동북아 균형자 역시 한미동맹 강화를 전제로 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이는 한편으로는 국민들로 하여금 정부의 안보정책이 자주적인 것처럼 인식시키게 만들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이러한 노선이 '탈미'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입증하려다보니 미국의 요구에 더욱 취약해지는 결과를 낳고 말았던 것이다.
북핵 해결과 한미동맹의 '어설픈' 연계 전략
집권 이후 노무현 정부의 한미동맹관에 영향을 준 요인으로 빼놓을 수 없는 것이 바로 북핵 문제이다. 출범과 동시에 핵문제를 둘러싼 북미간의 첨예한 갈등에 봉착한 노 정부는 이를 "안보 IMF"로 규정하면서 북핵 문제의 평화적 해결을 첫 번째 전략과제로 설정했다. 이를 위해서는 한미동맹이 가장 중요하고 이에 따라 이라크 파병, 한미동맹 재편 협력 등 미국의 요구를 수용하는 것이 북핵 문제의 평화적 해결에 필요한 '기회비용'이라는 인식을 갖고 있었다.
이러한 맥락에서, '굴욕외교' 논란을 일으켰던 2003년 5월 중순 노 대통령의 첫 방미는 중대한 의미를 갖는다. 당시 노 대통령은 "미국이 53년 전 도와주지 않았다면, 오늘날 나는 정치범 수용소에 있었을 것이다", "미국의 대북 공격 위협이 북핵 문제에 도움이 된다", "현 단계에서 북한과 정치적, 경제적 공동체를 만드는 것에 대해 회의적이다"는 등, 노골적인 친미 발언으로 물의를 일으켰다.
이에 대해 노 대통령은 귀국 후에 이러한 발언들이 "좀 오버했다"는 점을 인정하면서도, 북핵 문제의 평화적 해결을 위해서는 그럴 필요가 있었다고 말했다. 또한 북핵 문제를 최우선적인 해결 과제로 상정하다보니, 미국에 대한 생각이 이전과 달라졌다는 점도 강조했다.
이와 같은 정부의 '한미동맹 중심 접근법'은 김대중 정부 때의 한미관계에 대한 비판적인 인식과도 연결되어 있었다. 윤영관 당시 외교부 장관은 2003년 6월 4일 서울 이코노미스트 클럽이 주최한 조찬간담회에서 "북핵문제 해결을 위해서는 미국과의 관계가 제대로 되어야한다는 것이 현 정부의 첫 번째 인식"이라며, "지난 정부(김대중 정부)는 명목상으로는 동맹인데 동맹관계가 긴밀하게 서로 의사소통이 되거나 정책조율이 되지 못했고 삐그덕거리고 따로 노는 경우도 있었다"고 평가했다. 윤 장관은 또 "이런 상태의 한미 관계로는 복잡한 현안을 풀기 힘들다고 생각했다"며, 이에 따라 "한미관계는 질적으로 한 단계 심화시킬 필요가 있다는 것이 기본적인 정책 방향이다"라고 말했다.
이러한 인식 및 한미동맹과 북핵문제의 연계전략은 이라크 파병에 대한 정당화 논리로 이어졌다. 일례로 이종석 NSC 사무처장은 2003년 10월 추가 파병을 결정한 직후 가진 한미정상회담에서 부시 대통령이 북한의 안전을 서면으로 보장하겠다고 발언을 했는데, 이것은 최초의 일로서 "꺼져가던 6자회담의 불씨를 살리는 계기가 되었다"고 주장했다. 즉, 부시 행정부가 대북 안전보장을 서면으로 할 용의가 있다고 밝힌 것이 '추가 파병의 효과'라는 것이다.
그러나, 이는 사실과 다르다. 이미 콜린 파월 국무장관은 노무현 정부의 추가 파병 결정 이전인 2003년 8월에 서면 안전보장 제공 의사를 밝힌 바 있고, 오히려 이라크 파병과 북핵 문제를 연계시키려고 했던 윤영관 장관에게 파월은 "그것은 동맹국을 대하는 태도가 아니다"며 핀잔을 주었다.
노무현 정부의 북핵 해결과 한미동맹 재편 연계 전략은 두 가지 측면에서 애초부터 한계를 가질 수밖에 없었다. 하나는 노무현 정부가 북핵 해결과 한미동맹을 연계시킨다면, 부시 행정부로서는 이를 활용할 수 있게 된다는 점이다. 북핵 문제 해결을 지연시킬수록 한미동맹과 관련된 자신의 요구를 관철하기가 훨씬 용이해진다는 공식이 성립할 수 있기 때문이다.
다른 하나는 이러한 연계 전략이 '기대심리'의 수준을 벗어나지 못했다는 점이다. 연계 전략이 성공하기 위해서는 '나의 요구를 들어주지 않으면 너의 요구도 받아줄 수 없다'는 인식을 상대방에게 심어주어야 한다. 그러나, 노무현 정부는 미국의 요구를 먼저 수용하면서 미국의 대북정책 변화를 기대하는 모습을 보여왔다. 그리고 그 결과는 한미동맹 재편은 거의 마무리 단계에 접어든 반면에, 북핵 문제의 해결은 여전히 기약 없는 상황으로 나타나고 있다.
'빗나간' 자주국방 열망
노무현 정부의 한미동맹관과 관련해 함께 고려해야 할 것은 노 대통령의 자주국방 의지이다. 노 대통령은 출범 초기부터 자주국방에 대한 강한 의지를 피력해왔다. 2003년 3월 15일 국방부를 방문한 자리에서는 한미동맹의 중요성을 강조하면서도, 세계와 한반도 안보환경 및 미국의 군사전략의 변화를 거론하면서 "언제까지 미국에 우리 안보를 의존할 수만은 없다"며 "자주국방력을 갖출 수 있는 준비를 하고, '국민 안도 프로그램'을 제시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 해 4월 19일에는 "우리가 자주국방으로 다 할 수 있고 그밖에 미군의 역할이 있어 서로 협력하는 관계로 가야 한다"며, "주한미군은 앞으로 동북아의 새로운 균형자로서 지역안정을 도모하는 것"이라고 말해, 한미간의 역할 분담의 기본 방향을 제시했다. 이후에도 자주국방 의지를 여러 차례 피력한 노 대통령은 2003년 8월 15일 광복절 연설에서 "10년 이내에 자주국방 역량을 구축하겠다"고 선언하기에 이르렀다.
노무현 정부의 이와 같은 자주국방 노선은 크게 두 가지 인식 하에 나왔다. 하나는 한미동맹을 수평적이고 균형적으로 발전시키기 위해서는 한국 스스로의 국방 역량을 강화해야 한다는 인식이다. 아울러 여기에는 한미동맹 재편을 원하는 미국의 요구를 자주국방 실현의 기회로 삼겠다는 생각도 깔려 있었다.
다른 하나는 주한미군 재배치에 따른 국민들의 안보 불안 심리를 자주국방을 통해 적극적으로 해소해보겠다는 인식이다. 노 대통령은 여러 차례에 걸쳐 주한미군에 약간의 변동만 생기면 불안해하는 국민들과 이를 부채질하는 보수진영에 대해 우려를 표하면서, "국민이 대한민국 국군만 믿고 안보에 대해 불안해하지 않는 대한민국을 만들어가야 한다"고 강조해왔다.
이러한 노무현 정부의 자주국방 노선은 한미동맹을 재편해 대북 억제의 주된 역할을 한국군에게 넘기고, 주한미군은 기동성과 유연성을 확보해 다양한 임무를 수행하기를 원했던 부시 행정부의 동맹 재편 전략과 맞아떨어지게 된 것이다. 그리고 결과적으로 자주국방 노선은 한미동맹을 방어형에서 공격형으로, 한국 방위에서 지역동맹으로, 안보동맹에서 가치동맹으로 재편하는데 일조하게 된다.
이는 새로운 형태의 대미 종속성과 안보 딜레마를 야기하고, 한국군과 주한미군 모두 대규모의 전력증강으로 이어지면서 북한과의 군사·안보문제를 푸는데 장애요인이 되고 있다. 미국의 한미동맹 재편 목적과 의도, 그리고 한반도 군사문제의 복잡성에 대한 충분한 고려 없이 추진된 자주국방이 '의도하지 않은 결과'를 낳고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