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민은 '지역의 주인'이라고 얘기된다. 특히 선거철만 되면 후보자들은 자신의 승리를 위해 주민들을 주인으로 모시겠다고 공약한다. 그러나 선거가 끝나면 당선자들은 하인 대하듯 주민을 대하곤 한다. 지역의 과제를 해결하려는 주민들은 대표자에게 '요구'하는 게 아니라 '애걸'해야 한다. 자신을 대표하라고 뽑아준 사람에게 애걸해야 하는 선거의 역설. 선거라는 마법에 걸린 주민은 4년에 단 몇일만 주인 대접을 받고 나머지 시간을 하인처럼 지내야 한다.
진정 주민을 주인으로 대한다면 그것은 공약(空約)이 아니라 정책으로 제시되어야 한다. 그리고 주민을 주인으로 대접하는 정책에서 참여예산제는 으뜸이라 얘기할 수 있다. 지방자치단체의 한 해 예산에서 특정한 퍼센트의 사용방안을 주민들이 직접 결정하는 참여예산제는 브라질의 포르투알레그레시에서 처음 시작되었고 전 세계 지방자치단체의 모범제도로 자리잡고 있다.
주민을 주인으로 대접하는 정책, 참여예산제
국내 참여예산조례의 비교정리 | | | 광주북구(2004년 3월) | 울산동구(2004년 6월) | 조례명 | 광주광역시북구주민참여예산제운영조례 | 울산광역시동구주민참여예산제운영조례안 | 목적 | 주민참여 보장, 예산 투명성 증대 | 주민참여 보장, 예산 투명성 증대 | 예산 위원회 기능 | 예산편성 지침에 대한 의견수렴, 예산에 대한 주민 의견 수렴·집약, 주민대상 교육활동, 예산정책토론회 개최, 결산에 대한 설명회 참여 활동 | 예산편성 지침에 대한 의견수렴, 예산편성에 대한 주민들의 의견을 수렴·집약, 총회·분과위원회 개최 | 예산위원 선정기준 | 인원은 80인 이내, 공개모집(1/2 이상), 주민자치위원회 추천 주민(각 동별 1인 이상), 예산 및 행정 전문가(비영리민간단체 추천) | 인원은 100명 이내, 공개모집(1/2이상), 주민자치위원회 추천 주민(각 동별 1명 이상), 시민·사회·직능단체·기관 등의 추천을 받은 자 | 지역회의 | 없음 | 동별로 주민참여예산지역회의. 해당동 위원 및 주민자치위원으로 구성, 주민도 참여할 수 있으나 동장이 대상자 선정. |
| 청주시(2004년 9월) | 안산시(2005년 1월) | 조례명 | 청주시민참여기본조례 | 안산시주민참여기본조례 | 목적 | 참여 활성화, 행정의 민주성과 투명성 증대, 시와 시민이 협동하여 지역사회의 발전 도모 | 참여 활성화, 행정의 민주성과 투명성 증대, 주민과 시가 협동하여 지역사회의 발전을 도모 | 예산 위원회 기능 | 예산에 대한 주민의견 수렴·집약활동, 시민 교육, 예산정책 토론회 및 결산 설명회 개최 | 예산편성, 예산초안에 대한 의견 수렴과 검토의견 제시 예산공청회에 관한 사항 | 예산위원 선정기준 | 지역·전문·직능·공익성 감안해 100인 이내. 주민자치위원회 추천한 자치위원, 주민공개모집에 의해 선정된 자, 비영리민간단체 추천을 받은 자 | 지역·전문성 감안 80인 이내. 주민자치위원회가 추천한 주민자치위원, 비영리민간단체 추천을 받은 자, 공개모집 절차에 의해 선정된 주민 | 지역회의 | 없음 | 없음 | | 대전 대덕구(2005년 10월) | | 조례명 | 대전광역시대덕구주민참여예산제 운영조례 | | 목적 | 주민참여 보장, 투명성 확보 | | 예산 위원회 기능 | 예산편성 매뉴얼과 예산안에 대한 의견수렴, 중점투자사업의 우선순위결정, 예산홍보활동과 토론회 등 개최 | | 예산위원 선정기준 | 예산 및 행정 전문가로 비영리단체 추천, 동 지역회의에서 추천한 자, 공개모집을 통해 모집된 자 등 100인 이내로 선정. | | 지역회의 | 동별로 10인 이내로 동장이 선정하여 위촉. 중점투자분야 등에 관한 의견 수렴 및 사업별 우선순위 제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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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행정자치부 역시 2004년부터 예산편성에 주민을 참여시킬 것을 권고하기 시작했고, 2005년에는 지방재정법을 개정해 "제39조 (지방예산편성과정에 주민참여) 지방자치단체의 장은 대통령령이 정하는 바에 따라 지방예산편성과정에 주민이 참여할 수 있는 절차를 마련하여 시행할 수 있다"는 규정을 마련했다.
현재 한국의 지방자치단체에서도 참여예산제를 실행하고 있는 곳들이 몇군데 있다. 광주 북구와 울산 동구, 대전 대덕구, 청주시, 안산시가 바로 그런 지역들이다.
그 중 참여예산제가 활발히 진행되고 있는 광주 북구와 울산 동구는 이미 여러 성과를 낳고 있다. 2004년에 광주 북구는 예산 사업에 총 25건(반영 20건, 미반영 5건)의 주민의견을 반영시켰고, 비예산사업에 총 29건(반영 26건, 미반영 3건)을 반영했다. 그리고 2건의 과다예산을 조정했고 주민과의 대화를 통해 17건의 사업을 반영했다.
울산 동구는 지역회의와 1차 총회, 분과위원회를 통해 총 51건의 건의사항을 수렴했고 이 중 20건을 반영하고 21건을 장기과제로 검토했으며 10건을 반영하지 않았다.
아직 지방자치제가 뿌리를 내리지 못한 우리 현실에서 이런 성과는 결코 무시될 수 없는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 주민들의 실제 욕구가 행정에 반영되고 있기 때문이다. 더구나 참여예산제는 주민과 공무원이 한데 모여 토론하고 합의할 수 있다는 점을 가능하게 했고, 그것이 지역을 더 풍요롭게 만든다는 점을 증명하고 있다(정부는 광주 북구를 혁신 브랜드 사업으로 지정했다).
당연히 참여예산제가 구체적으로 진행되는 과정에서는 여러가지 갈등이 터져나올 수 있다. 공무원과 주민간의 갈등이나 주민들간의 갈등도 터져나올 수 있다. 그러나 이런 갈등이야말로 사회적 합의를 위해 필요한 과정이다. 학교에서 배웠듯이 민주주의가 시행착오를 통한 시민교육과 사회적 합의를 지향한다면 말이다. 참여예산제는 행정의 일방적인 사업집행을 막을 뿐 아니라 주민들이 갈등하면서 서로를 이해하고 사회적 합의를 모색하도록 교육한다.
한계 : 자치단체의 미미한 예산권과 낮은 재정자립도
물론 참여예산제의 현재와 미래를 무조건 낙관할 수는 없다. 왜냐하면 참여예산제가 새로운 대안모델이 되려면 지방자치단체가 실질적인 예산권한을 가져야 하는데, 그렇지 못하기 때문이다. 한국에서는 지방세의 비율이 낮아 지역의 재정자립도가 낮을 뿐 아니라 조례가 지역의 실질적인 법으로 기능하지 못하고 있다. 이런 점에서 한국에서 참여예산제는 근본적인 한계를 가지고 있다.
그리고 참여예산제의 실시는 공무원의 적극적인 협조를 필요로 하는데, 아직 한국의 공무원사회는 이런 부분에 보수적이다. 주민들이 참여예산제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려면 예산과 관련된 정보가 투명하게 공개되어야 하고, 주민들이 실질적인 권한을 가져야 한다(이런 점에서 참여예산제의 활성화는 정보공개제도의 활성화와 맞닿아 있다).
그리고 예산안과 관련된 전문적인 정보들이 주민들이 쉽게 이해할 수 있는 용어로 '번역'되어야 한다. 이런 과정에서 공무원이 핵심적인 역할을 해야 하는데, 아직 주민과 공무원 사이에는 서로에 대한 '불신의 벽'이 높이 세워져 있는 듯하다.
그러나 이런 한계들이야말로 한국에서 참여예산제를 더욱더 강력하게 추진해야 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지방자치제를 실현할 힘은 국가나 시장, 뛰어난 대표자가 아니라 바로 시민들에게서 나와야 하는데, 무엇이 문제인지를 절실하게 피부로 느껴야 시민이 스스로 행동에 나서게 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우리가 염두에 두어야 할 사실은 참여예산제란 주민의 선택이 아니라 세금을 납부하는 '주민의 권리'라는 점이다.
| | 클래식 가로등, 대학 내 동물보호소의 의미 | | | 박광우 '광주참여자치21' 사무처장이 말하는 참여예산제 | | | | 광주광역시 북구 문흥동 근린공원에 가면 아침 저녁으로 클래식 음악을 들을 수 있다. 이곳서 운동을 하는 주민들의 가슴 속까지 맑게 해주는 '소리나는 가로등' 덕택이다. 북구청은 지난해 1400여만원의 예산을 들여 이곳에 앰프와 스피커 24개를 설치해 운영하고 있다.
북구청은 지난해 500만원을 투입해 전남대 내에 동물보호소를 설치했고, 도로가 좁아 통행이 불편했던 한 분교 앞 도로를 확장하기 위해 사유지를 매입하기도 했다.
위의 세가지 사례는 북구청에서 지난 2003년부터 시행하고 있는 '참여예산제'의 작지만 의미있는 성과들이다. 첫번째 사례는 예산참여 시민위원의 제안이었고, 두번째 사례는 지역의 유기 동물들을 보다못한 동물애호가들의 주문, 세번째는 학부모들이 북구청에 제안한 것이다.
"예산 편성과정에 시민들이 참여해서 우선순위를 반영시키는 제도입니다. 그간에는 집행부가 독점적으로 예산행정을 쥐고 있었습니다. 납세자인 시민들의 입장에서 봤을 때 민주주의의 심각한 왜곡입니다."
박광우 광주참여자치21 사무처장의 말이다. 그는 예산참여제는 98년부터 시작된 시민사회단체의 예산감시운동의 연장선이라고 말했다.
"과거 시민단체들은 이미 예산이 집행된 결과를 감시해서 낭비사례를 적발하고 고발하는 운동을 해왔습니다. 대표적인 게 함께하는 시민행동의 '밑빠진 독상'입니다. 그런데 낭비사례를 적발해도 이미 엎질러진 물입니다. 그런 운동의 한계를 극복하기 위한 제도입니다."
하지만 그는 "참여예산제 제도 시행 초기 단계이기 때문에 전형적인 성공 사례가 나오지는 않았다"면서도 "시민들의 참여를 어떻게 증폭시키는가에 따라 관 주도 행정의 패러다임을 바꾸고 참여민주주의의 새로운 전형을 창출할 수 있는 제도"라고 정의했다.
광주 북구청은 2004년 참여예산제의 성과 보고서에 다음과 같이 적었다.
"주민의견 수렴결과 시민위원회 토론회시 42건 2,397,146천원, 찾아가는 예산설명회, 인터넷 등 기타 14건1,610,516천원, 주민과의 대화시 27건에 5,161,690천원 등 총 83건 9,169,352천원의 의견이 접수되어 예산사업 52건중 37건 3,494,316천원을 비예산사업은 29건중 26건을 기타 과다예산 2건을 반영 삭감함.
특히, 가용재원의 범위 내에서 성과 등을 분석하여 아름다운 마을 만들기 특화사업 추진비, 노인복지시설 이용 확대를 위한 안전시설물 설치, 민원용 복사기 설치, 보안등 추가신설, 어린이공원 제초 작업 건의, 보안등관리자 표찰 부착 등 주민생활과 밀접한 주민숙원사업을 타 사업에 우선하여 반영하였음." / 김병기 NGO서포터 | |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