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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가장은 아주 조용했다. 그 많은 사람들이 어디로 사라졌는지 텅 빈 것 같은 느낌이었다. 두 사람을 맞이한 여인은 손불이의 마지막 일곱 번째 첩실인 심월아(芯月雅)였다. 그녀는 언뜻 보기에는 매우 어려 보였는데 자세히 보면 눈가에 잔주름이 잡히기 시작하여 이십대 후반이나 삼십대 초반은 족히 된 것 같았다.
그녀는 귀엽고 애교가 많아 보였지만 두 사람을 맞이하면서 한 번도 웃는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더구나 그녀의 얼굴은 어딘지 모르게 그늘이 앉아있었고, 금방이라도 눈물을 뚝뚝 흘릴 듯한 슬픈 기색까지 떠올라 있었다. 그녀는 시비들을 시키지 않고 직접 두 사람을 내원에 있는 한 전각으로 안내했다.
“이곳에서 잠시 쉬시길....... 한 시진 후에 모시러 오겠사옵니다.”
“나는 그리 한가한 사람이 아니오.”
무둑뚝한 담천의의 말투에도 심월아는 개의치 않았다.
“저녁을 드시기에는 너무 이른 시각입니다.”
그녀는 여전히 차분한 목소리를 유지했다. 말끝이 약간 떨려나오는 것이 이상했지만 그렇다고 담천의나 우교가 무슨 짓을 할까봐 두려워하는 것은 아니었다. 그녀의 말마따나 아직 훤한 시각이었다. 해가 지려면 앞으로도 족히 한 시진 반 정도는 지나야 할 것이다.
“다시 말하지만 나는 한가롭지도 않고 또한 이곳에 밥을 먹고자 온 것이 아니오.”
“장주님 역시 담공자를 기다리셨사옵니다. 그것 때문에 급히 마차까지 준비해 모셔온 것이 아니옵니까? 먼 여정에 피로도 쌓이셨을 터이니 잠시 쉬시옵소서. 씻으실 물과 새 옷도 준비해 두었습니다.”
무슨 수작을 부리는 것인가? 손불이는 무슨 생각으로 마차까지 준비해 자신을 급히 오게 했을까? 그가 잠시 생각하는 사이 심월아가 말을 이었다.
“이틀을 달려오셨는데 한 시진은 그리 긴 시각이 아니옵니다. 또한 담공자님의 지금 모습이 시비들을 놀라게 할까 두렵습니다.”
이미 그가 걸친 옷은 의복이라고도 할 수 없을 정도로 찢어지고 피에 절어있는 상태. 마차를 타고 오면서 충분한 휴식으로 체력은 어느 정도 회복했지만 옷을 갈아 입을만한 여유는 없었던 것이다.
어차피 기호지세(騎虎之勢)라! 그가 성급히 움직인다 해서 해결될 일이 아니었다. 이런 때일수록 침착하고 냉정해져야 한다. 일단은 상대가 의도하는 바가 무엇인지 파악해야 한다. 인내심을 가지고 참으면서 결정적인 기회를 노려야 한다. 더구나 그녀는 매우 침착해 보였지만 한편으로는 금방이라도 울음을 터트릴 것 같은 느낌이어서 담천의는 고개를 끄떡였다.
“좋소. 당신 말대로 한 시진은 그리 긴 시간은 아니오.”
“다행입니다. 그럼 한 시진 후에 모시러 오겠습니다. 다만 장주님께서는 오직 담공자님과 독대를 하실 것입니다.”
심월아는 담천의 옆에 있는 우교를 의식한 듯 또박또박 말했다. 우교의 짙은 눈썹이 한쪽으로 치켜 올라갔다.
“무슨 수작을 부리려는 겐가?”
우교가 참았던 말을 뱉었다. 그의 목소리는 나직했지만 진한 살기를 머금고 있어 듣는 이로 하여금 섬뜩한 느낌이 들게 했다. 그럼에도 심월아는 고개만 저을 뿐 위축되는 기색이 없었다. 외부의 반응에 너무 무감각한 듯 보여 어찌 보면 삶의 의지를 상실한 것처럼 보였다.
“수작을 부릴 참이면 본 장에 들어오는 순간부터 부렸을 것이옵니다. 담공자님을 따로 불러 수작을 부리고자 함은 아니니 안심하소서.”
그녀의 말은 옳았다. 이 안에서 수작을 부리려 했다면 벌써 손을 썼을 것이다. 굳이 번거로운 절차를 거치지 않아도 될 일이었다. 그녀는 그 말을 끝으로 더 이상 말을 잇기 어려운 듯 몸을 돌렸다. 그리고는 걸음을 떼기 시작했는데 가녀린 교구가 미세하게 떨리는 것 같았다. 무슨 까닭일까? 그녀는 터져 나오는 오열을 참고 있는 듯했다.
“............?”
담천의와 우교의 시선이 마주쳤다. 무언가 이상했다. 과연 손불이는 무슨 생각을 가지고 있는가? 두 사람은 약속이나 한 듯 적막한 주위를 한 번 둘러보았다. 그들은 도저히 짐작할 수도 없었다. 고개를 갸우뚱하며 방안으로 들어섰다.
방안에는 옷이 한 벌 놓여 있었다. 하늘빛을 닮은 옅은 청색의 단삼(單衫)이다. 담천의가 처음 손가장에 왔을 때 살해당한 언수화란 여인이 그의 방에 놓아두었던 것과 똑같은 옷이었다. 그 때와 마찬가지로 세심하게 속옷까지 놓아두었다. 그리고 한쪽에 놓여있는 나무욕조와 비단천.
그는 서슴없이 옷을 벗고 전신의 핏자국을 닦아냈다. 어차피 주어진 상황에서 마련된 자리라면 마다할 이유가 없다. 새 옷으로 갈아입고 그는 가부좌를 틀고 앉았다. 깊은 상처도 없었고, 진기 역시 막히는 곳이 없었다.
방안을 나가 이곳저곳을 헤메며 송하령을 찾고 싶었지만 그는 참았다. 그가 지금 할 일은 오직 조용히 기다리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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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하령은 이제 눈에 띠게 불러오기 시작한 배를 쓰다듬으며 미소를 짓고 있었다.
“아가야.... 이제 곧 아빠가 오신단다.”
연락을 받은 터였다. 오늘 저녁이면 담천의가 이곳에 당도할 것이고, 만나게 될 것이라고. 그것도 손장주가 지나가다 들른 듯 껄껄 웃으며 말해 주었다. 왠지 호탕하게 웃는 손장주의 어딘가에 진한 슬픔이 배어 있었음을 느낀 것은 그녀만의 생각이었을까? 하지만 그녀에게 그런 것은 중요하지 않았다. 단지 담천의가 자신을 만나러 온다는 사실에 가슴이 두근거리고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을 뿐이었다.
“아직 아빠는 너를 가진 것을 모르실 것이야. 우리 아빠가 오면 놀래켜 드리자. 다른 사람들이 말하지 말아야 할 텐데....”
아이를 가진 그녀의 관심사는 오직 하나뿐이었다. 무림의 일도, 중원에 무슨 일이 벌어져도, 심지어는 부모형제에 대한 것도 그녀의 생각 밖이었다. 오직 사랑하는 사람과 뱃속에 있는 아기뿐이었다.
문득 그녀는 화장을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초췌해진 자신의 모습을 사랑하는 사람에게 그대로 보여줄 수는 없었다. 새 옷으로 갈아입는 것도 좋을 것이다. 그녀는 마치 사랑하는 사람과 신혼의 첫날밤을 맞는 처녀처럼 막연한 설레임으로 어찌할 바를 모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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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서 오시게.”
안내된 곳은 아주 소박하게 꾸며진 넓지 않은 방이었다. 탁자 위에 차려진 음식도 일반 가정에서 먹는 두부와 소채 정도였다. 특이한 것이 있다면 연포탕(蓮鮑湯)이 두 그릇 올려져 있어 방안 가득 향기가 진동했다. 아마 경여가 끓였을 것이다.
“손장주께서..... 아니 모용장주라 불러드리리까?”
“어떻게 부르든 무슨 상관이 있겠나? 누가 어떻게 부르던 나는 내가 아닌가?”
담천의는 서슴없이 맞은 편 의자에 앉았다. 이미 코로 술내음이 파고드는 것을 보니 혼자서 몇 잔 걸친 모양이었다.
“독작(獨酌)하실 줄 알았다면 좀 더 일찍 올 것을 그랬던 모양이오.”
“한 잔 하겠나?”
손불이는 자신이 마시던 자기(瓷器) 술병이 아닌 한 쪽에 놓인 죽통의 마개를 열면서 물었다. 향기로운 죽엽청주의 향기가 배어나왔다.
“아직 장주가 마시던 술병이 비지 않은 것 같은데......”
“이것 말인가?”
손불이는 약간은 의심스러운 눈빛으로 자신을 보는 담천의를 보다가 허탈한 미소를 지었다.
“물론 아직 비지 않았네.”
“장주는 고귀한 분이라 마시는 술도 다른 것이오? 소생에게는 주고 싶지 않은 모양이오?”
의심스런 눈빛과 말투는 분명 술에 무슨 수작을 부리고 있는 것이 아니냐는 의미를 담고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손님을 오게 해놓고 자신과 다른 술을 마시게 하는 것은 확실히 의례적인 일은 아니다. 분명 실례가 되는 일이고 의심을 받기에 충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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