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 <태극기 휘날리며> 촬영 세트장의 파괴된 건물 창 너머로 보이는 <서울, 1945> 세트장 광고판
ⓒ 정일관
해방 전후의 한국 현대사를 비교적 균형 잡힌 시각으로 재현하고 있는 KBS 대하드라마 <서울, 1945> 세트장이 합천에 설치되어 여행객들의 발길을 끌어당기고 있습니다. 합천에 살고 있는 저도 찾아온 손님에게 편안하게 안내하고 무리 없이 다녀올 수 있는 곳으로 늘 <서울, 1945> 세트장을 염두에 두고 있습니다. 어른들은 어른들대로 과거의 향수를 느낄 수 있고, 아이들은 아이들대로 기차와 탱크, 포와 군용 지프차의 묘한 매력을 즐길 수 있는 곳이기 때문입니다.

▲ 서울의 상징 경성역 앞에서
ⓒ 정일관
잘 아시다시피, <서울, 1945> 세트장은 영화사상 처음으로 천만 명 관객을 달성했던 영화 <태극기 휘날리며> 세트장 옆에 있는데, 둘 다 불행했던 한국 현대사를 다루었던 무대여서 그 연관성을 인식하며 감상하는 것도 좋을 것입니다.

▲ 반도 호텔 앞 한길 가에 서 있는 옛날 우체통의 정겨운 모습
ⓒ 정일관
그러나 그 연관성에도 불구하고 얼핏 보아도 두 세트장은 전쟁 이전과 전쟁 당시의 모습을 비교하듯 보여 주고 있어 어쩌면 두 세트장은 전쟁과 평화라는 이미지를 각각 함축하고 있는 듯합니다. 또는 평화를 지키지 못하고 격동기를 슬기롭게 대처하지 못하거나, 분열하면 이처럼 아픈 상처를 남기게 된다는 역사를 고요히 웅변하고 있는 것 같기도 합니다.

이틀간 비가 추적거리며 내리다가 환하게 갠 5월 28일, 일요일. 울산에서 찾아온 장인 장모와 처제 동서들, 그리고 조카들과 함께 세트장을 찾았을 때 상당히 많은 사람들이 붐볐고, 또 새로운 세트를 세우려는 듯 중장비가 연신 움직이고 있었습니다.

<태극기 휘날리며> 세트장에 들어서자 가장 먼저 아이들은 기차에 올라갔는데, 뭐니 뭐니 해도 옛날의 풍물에서 기차는 빼놓을 수 없는 정겨운 철물임에 분명한 것 같습니다. 아니면 차창을 스치는 풍경을 뒤로 하고 어디든지 떠나고픈 인간의 집단 무의식이 절로 발현되기 때문일까요? 또한 장갑차와 탱크와 지프차가 보이면 어떻게 해서든지 올라가서 타보고 싶은 것도 어른이나 아이들 할 것 없이 공통된 모습으로 보였습니다.

▲ 반도 호텔 앞 한길. 이 거리 어디쯤 몽양 선생이 암살되는 장면을 촬영했습니다. 거리의 끝에 반도 호텔 건물이 보입니다.
ⓒ 정일관
<태극기 휘날리며> 세트장 너머로 <서울, 1945> 세트장을 광고하는 대형 포스터가 붙어 있는 것이 보입니다. 그리고 경성역도 어렵지 않게 볼 수 있습니다. 그 경성역을 향해 가면 <서울, 1945> 세트장에 발을 들여놓을 수 있습니다. 초기에 드라마 주인공들이 함흥에서 서울을 왔다 갔다 할 때 자주 등장했던 세트장입니다.

▲ 혜민 병원 건물 세트. 비록 세트장이지만 병원이 있다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놓입니다.
ⓒ 정일관
경성역 앞 큰 거리를 따라 조금만 내려가면 왼쪽에 반도 호텔 건물이 경성역 만큼 높이 솟아 있습니다. 반도 호텔은 호텔 매니저인 김해경과 최운혁 서울대 교수, 이동우 보좌관, 그리고 미군정의 이든 중령 등을 중심으로, 미군정과 한민당의 화합, 미군정과 좌익 세력의 대립이 숨 막히게 전개되는 장소입니다.

▲ 골목 풍경. 금양 전당포와 마포 설농탕이 보입니다.
ⓒ 정일관
그런데 그 반도 호텔의 문은 열어서는 안 됩니다. 그 호텔 문 안에 멋진 호텔 로비가 펼쳐져 있을지도 모른다는 착각에 빠져 문을 열어보면 세트장 이면의 황량함과 쓸쓸함을 만날 수 있기 때문이죠. 반도 호텔 옆길 안쪽에는 이름도 정겨운 ‘별’ 다방이 있고, 그 뒷골목에도 세트장을 조성하여, 가만히 보고 있노라면 마치 누군가가 다급하게 뛰어올 것 같은 느낌이 들어 서둘러 그 곳을 떠났습니다.

▲ 해남 식당. 문을 드르륵 열고 들어가 국밥 한 그릇 먹고 싶어집니다.
ⓒ 정일관
또한 반도 호텔 앞으로 펼쳐진 큰 길에는 식당이나 극장 등이 늘어서 있어 이 거리가 세트장의 주도로임을 느끼게 하였습니다. 몽양 여운형 선생도 그 거리 어딘가에서 암살되었습니다. 미군정과 친일파 세력의 야합으로 남북 분열의 조짐이 가시화되는 즈음에 몽양의 좌우 합작 시도는 비록 실패하였으나 매우 소중한 의미를 안고 있으며, 당시엔 시대정신의 표현이었습니다.

몽양의 죽음은 이후 친일파의 득세와 남한 단독 정부 수립, 한국 전쟁이라는 불행한 역사의 신호탄과도 같은 것임을 생각할 때, 그의 노력이 얼마나 값진 것인가를 알 수 있게 합니다. 주인공 최운혁이 표현한 말할 수 없는 슬픔과 눈물은 이 드라마 작가의 역사관이 어느 지점에 있는가를 알 수 있게 하는 대목이지요.

▲ 문정관 자작 저택으로 가는 길 옆에 놓인 예쁜 우물 정자 우물 세트
ⓒ 정일관
그 큰 길이 왼쪽으로 돌아가는 곳엔 여러 개의 크고 멋진 건물들이 들어서 있습니다. 혜민 병원 건물과 몽양의 발인식이 열리던 건물도 보이고, 수도 경찰청 건물도 있습니다. 고급 요정을 연상시키는 큰 한옥도 있고, 그 옆에 친일 경찰 박창주가 몸을 의탁하기 위해 찾아간 장택상 경찰청장의 집도 보입니다. 세트장 외곽 부근에 문정관 자작의 저택과 그 앞길이 이젠 역사의 전면에서 사라져서인지 쓸쓸한 느낌을 주며 방문객들을 맞이하고 있습니다.

드라마 <서울, 1945>의 또 다른 매력 가운데 하나는 좌익이 탄생할 수밖에 없었던 소이연을 따져 그 역사적 필연성을 부여하면서도 친일파들을 일방적으로 매도하기만 하지 않고, 문정관 자작과 그 딸 문석경을 통해 하고 싶은 말을 다 하게 하는 균형 감각을 가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도덕적인 선악의 잣대로만 판단하지 않는 개방성을 가지고 있다는 말씀이지요. 어쩐지 문정관 자작은 단순히 나쁜 사람이라고 하기보다는 불쌍하고 어리석은 사람이라는 느낌이 더 강하게 온 것도 그런 드라마의 전개 때문이 아닐는지요.

문 자작의 저택을 나와 다시 골목으로 들어서면 다양한 모양의 상점과 술집, 그리고 양장점, 제화점, 제과점 등이 즐비하여 지난 시기의 풍물을 엿보게 하고 더듬어 보게 합니다. 그 중에서 가장 큰 인기를 끄는 것은 김해경의 어머니(고두심 분)가 운영하는 함흥 식당입니다. 함흥 식당에 오면 혹시나 드라마의 분위기를 찾을 수 있을까? 하고 모두가 안을 기웃거리곤 합니다.

▲ 함흥 식당. 여행객 대부분은 식당 안을 들여다 보며 드라마의 분위기를 엿보려 합니다.
ⓒ 정일관
골목을 다 빠져나오면 다시 반도 호텔을 지나 경성역을 왼쪽에 두고 세트장을 벗어나오게 됩니다. 세트장을 돌아보면 문득 슬픈 생각이 납니다. 저 속에서 이 나라의 아픈 현대사가 표현되고 있구나. 저 속에서 가슴 아픈 청춘들의 사랑도 그리고 있구나. 이 아픔을 어떻게 치유해야 할까? 다시 돌이킬 수는 없지만, 우리는 현대사를 통해 무엇을 생각할 수 있을까? 아직도 계속되는 현대사의 질곡을 어떻게 극복할 수 있을까? 하는 생각들이 머릿속을 스쳐 갑니다.

▲ 술집 앞 테라스에 앉아 쉬고 있는 어떤 여행객의 모습이 잘 어울립니다.
ⓒ 정일관
추억은 비록 아프더라도 우리를 가만히 젖어들게 합니다. 아름다운 봄날이 다 가기 전에 KBS 대하드라마 <서울, 1945> 세트장에 들러 역사와 풍물과 사랑 속에 젖어들지 않으시겠습니까?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경남 합천의 작은 대안고등학교에서 아이들과 만나고 있습니다. 시집 <느티나무 그늘 아래로>(내일을 여는 책), <너를 놓치다>(푸른사상사)을 펴냈습니다.




독자의견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