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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ont color=a77a2>계약해지 문자통보, 그리고 눈물...지난 3월  정규직화를 요구하며 파업 중인 KTX 여승무원의 휴대폰에 계약해지를 예고하는 문자메시지가 도착한 가운데 여의도에서 열린 집회에 참석중인 한 여승무원이 자신들의 절박한 상황을 호소하는 연설을 듣던 중 눈물을 흘리고 있다.
계약해지 문자통보, 그리고 눈물...지난 3월 정규직화를 요구하며 파업 중인 KTX 여승무원의 휴대폰에 계약해지를 예고하는 문자메시지가 도착한 가운데 여의도에서 열린 집회에 참석중인 한 여승무원이 자신들의 절박한 상황을 호소하는 연설을 듣던 중 눈물을 흘리고 있다. ⓒ 오마이뉴스 권우성

민세원 철도노조 서울 KTX열차 승무지부장.
민세원 철도노조 서울 KTX열차 승무지부장. ⓒ 오마이뉴스 안홍기
행운! 사람들이 행운의 네잎클로버만을 찾으려 할 때, 나는 네잎클로버의 행운보다는 세잎클로버의 행복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파업 100일을 앞두고 있는 지금, 나에겐 네잎클로버의 행운이 절실히 필요하다.

지난 2년간 내 인생은 말 그대로 희로애락의 시간이었다. 2년 전 시속 300km 꿈의 고속철도 KTX 승무원이 됐던 날을 난 아직도 잊을 수 없다. 너무나도 하고 싶었던 승무원의 꿈을 이뤘다는 기쁨에 하루에도 몇번씩 합격자 발표란에 찍힌 내 주민번호를 보고 또 보며 행복해했다.

쏟아지는 주변의 칭찬과 부러움, 그리고 언론의 스포트라이트에 나도 모르게 붕붕 떠있는 시간이었다. 철도 적자와 고속철의 미흡한 시설문제를 무마하기 위한 철도청, 그리고 정부가 날 방패막이 꼭두각시로 뽑았다는 사실을 깨닫기에는 너무 순진하고 무지했다.

합격자 발표날, 나는 행복하고 또 행복했다

철도 개통일인 2004년 4월 1일, 무언가 잘못됐다는 것을 난 어렴풋하게나마 깨달았다. 승무원이 차를 타는데 가장 기본인 승무다이아(열차운행시간표)가 1일 자정이 넘어도 나오지 않았다. 과연 내가 무슨 차를 어떻게 타야 하는지 모르는 불안감에 밤새 잠들지 못하고 뜬 눈으로 전화기만 바라봤다.

이후에도 열차를 타는 시간이 늘어날수록 나의 기대와 꿈은 산산이 부서져 갔다. 그것은 마치 순식간에 정상으로 올라간 롤러코스터가 올라갈 때보다 더 빠르게 바닥을 향해 치닫는 것 같았다. 꿈의 속도인 시속 300km로 말이다.

승무사업을 위탁 운영한다는 한국철도유통(구 홍익회)은 한 달이라는 견습기간에 승무원에게 주어야 할 견습비를 떼어갔으며, 초과근무수당과 상여금을 제대로 지급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 때까지만 해도 나는 불만을 제기하려는 마음보다는 그저 승무원이 좋다는 생각뿐이었다. 고용 불안 속에서 인생의 쓴맛과 단맛을 보고 있었지만, 처음 가졌던 KTX 승무원이라는 자부심이 컸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당시 한번쯤 가졌어야 할 의문과 불안을 애써 감추며 생활했다.

'그래…. 1기니까…. KTX 여승무원이란 직종이 처음 생긴 거니까…' 나는 당시의 일을 사업 초창기에 있는 당연한 시행착오이겠거니 하고 생각했다.

<font color=a77a2>이 때만 해도... 지난 2004년 2월. KTX 운행을 하루 앞두고 예비 여승무원들이 동대구역으로 향하는 9999호 열차에 시험 탑승한 승객들에게 인사를 하고 있다.
이 때만 해도... 지난 2004년 2월. KTX 운행을 하루 앞두고 예비 여승무원들이 동대구역으로 향하는 9999호 열차에 시험 탑승한 승객들에게 인사를 하고 있다. ⓒ 연합뉴스 황광모
믿고 싶었지만, 더 이상 이건 아니었다

1주일에 하루 있는 휴무가 어느새 10일에 하루, 보름에 하루로 바뀌어 갔다. 그렇게 제대로 쉬지 못하고 밤낮없이 열차를 타면서 승무원들의 몸 상태는 나날이 나빠졌다. 동료 대부분이 병과 싸워야만 했다.

나빠지는 몸 상태와 달리 열차내 업무는 하루하루 가중되었다. PDA 하나 덜렁 주고서는 바로 다음날부터 PDA를 들고 검표를 하게 한 후 수익금을 내라며 압박을 했다. 계산법을 배우지 않아 착오가 있으면 차액을 승무원 개인에게 변상하도록 했다.

어느 날엔 비닐장갑 하나 없이 맨손으로 화장실 청소를 하라는 상부 지시가 내려왔다. 부정 승차객을 상대로 벌어오는 차내 수익금이 적은 날에는 일을 못하는 승무원으로 눈총을 받아야 했다.

서울-광명처럼 중간 정차역의 시간 간격이 15분 정도로 짧을 때에는 15분 만에 140명의 특실고객에게 음료 서비스를 하고 필요한 고객에게 담요를 제공하고 수거하고 승객도 깨워야 하는 슈퍼승무원이 되어야 했다.

하지만 업무가 힘들다고, 월급이 적다고 불평한 적은 없었다. 갈수록 줄어드는 월급과 늘어나는 업무량에 불만과 피로는 쌓여갔지만 우리가 원한 것은 돈보다는 제대로 된 상부의 업무관리와 교육 아래 일하는 것이었다.

첫날 느낀 어렴풋한 불안감은 2005년 2월 모든 KTX 승무원에게 분명한 현실로 나타났다. 새로 입사한 후배 승무원들의 교육기간이 보름에서 일주일로 바뀌더니 퇴사한 승무원에게 반납받은 헌 유니폼이 신입 승무원에게 지급되었다.

이런 온갖 부당함을 지적하는 승무원에게는 다음해 재계약을 빌미로 협박과 폭언이 쏟아졌다. 아파서 응급실로 실려간 승무원에게는 내일 당장 차탈 사람이 없으니 쓰러져도 열차에서 쓰러지라며 일하러 나오라고 했다. 더이상 이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쓰러지더라도 열차에서 쓰러져라"

2006년 2월은 정말 숨가쁘게 돌아갔다. 모든 KTX 여승무원의 조합원 총투표를 통해 90%가 넘는 압도적 가결로 총파업을 결의했다. 현장에서는 3월 1일 철도총파업에 대한 긴장감이 감돌았다.

2월 28일 전국철도노조 총파업 거점지로 이동할 때 하늘에선 무심하게 비가 내렸다. 그 때까지만 해도 두려움보다는 일주일만 버티면 반드시 이길 수 있을 것이라는 얕은 기대감에 젖어있었던 것 같다. 저녁 9시부터 진행된 전야제는 밤이 깊을수록 절정으로 치달았고, 눈치 없이 내리는 차가운 겨울비에 얼어가는 몸과는 상관없이 이렇게 많은 사람이 한자리에 한마음으로 모였으니 뜻을 이룰 수 있을 것이라는 확신으로 마음은 뜨거워져 갔다.

하지만 그 뒤의 시간은 차가운 시멘트바닥에서 올라오는 냉기에 온 몸이 꽁꽁 얼어붙고, 제대로 씻지 못하고 제대로 먹지 못하는 것이 얼마나 인간을 나약하게 만드는지 스스로 깨달아가는 1분 1초였다.

3월 1일 철도노조의 총파업은 처음으로 정규직과 비정규직 노동자가 함께 하는 투쟁이었고, KTX 여승무원 문제를 포함한 모든 요구안의 일괄타결을 놓고 끝까지 투쟁할 것을 결의했기에 뜻깊은 싸움이었다.

하지만 3월 4일 철도노조는 직권중재와 공권력 투입이라는 횡포에 현장으로 복귀하기로 결정했고 KTX승무원들은 총회를 거쳐 독자적인 파업을 지속하기로 결정했다. 그리고 그날 밤, 서울 KTX 승무원들과 부산 KTX 승무원들이 힘있는 파업투쟁을 위해 양평에 모였다.

파업... 그리고 상상도 못하던 세상

<font color=a77a2>파업 첫날 KTX 여성 승무원들이 붉은 띠를 두른 채 잠들어 있다.
파업 첫날 KTX 여성 승무원들이 붉은 띠를 두른 채 잠들어 있다. ⓒ 박상규
난 아직도 양평행 버스를 타던 그 순간을 잊을 수 없다. 어떻게 될 지 모르는 불안한 미래를 앞에 놓고 어두운 버스 안에 앉아 몇 시간이나 울었는지 눈조차 떠지지 않을 정도였다. 시시때때로 흔들리는 나를 세우며 견디던 게 한 달을 넘어 어느덧 90일이 훌쩍 지났다. 내가 살고 있는 이 사회에 대한 뼈저린 인식은 분노와 배신감을 낳았고 투쟁으로 표현됐다.

노동자의 인권과 노동권을 박탈하며 생사여탈권을 쥐고 저울질을 하는 상대가 철도공사만이 아니고 정부라는 것이 내게는 너무 큰 충격이었다. 국민을 보호하는 존재라고 당연히 믿고 살아왔던 경찰의 폭력에 몸과 마음의 상처를 얻고, 국민의 권리를 지켜준다던 법에 의해 유린당하며 평생 나랑 상관없을 것만 같았던 경찰서 유치장에서 밤을 지새우는 것…. 90여일 전에는 상상도 못하던 세상이 내 눈앞에 펼쳐졌다.

우리의 요구는 단순하다. 철도공사 직접 고용! 그것이 계약직이라도 좋으니 KTX 여승무원에 대한 실제 운영권한을 갖고 있는 철도공사 소속이 되어 고객의 안전과 서비스를 책임지겠다는 것이다.

하지만 철도공사는 KTX 관광레저라는 제3의 회사에 우리를 또다시 위탁하려 하였다. 이미 5월 3일을 기점으로 승무사업을 부분적으로 개시했고, 5월 15일부로 레저로 복귀하지 않은 280여 명의 승무원에게는 정리해고 통보를 보냈다. 그리고 5월 19일까지 이적 시한이라는 것을 주며 인심 쓰듯 다시 한번 우리를 우롱했다.

KTX 관광레저로 가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우리는 너무도 잘 알고 있다. 그것은 철도유통에서 받았던 고통보다 더한 고통을 또 겪게 되는 것이다.

KTX 여승무원 업무는 특성상 철도공사 정규직 열차팀장의 지시 하에 이뤄진다는 사실, 고속으로 움직이는 밀폐된 교통수단 안에서 수 시간 수많은 정차역을 거치며 1000명이 넘는 고객을 모시기 때문에 안전과 직결된다는 사실 등 더 얼마나 많은 사실을 열거해야 철도공사가 그리고 정부가 KTX 여승무원을 외주 위탁하겠다는 방침을 바꿀 것인가.

승무원은 오로지 서비스만 하라? 그럼 안전은

KTX 관광레저는 승무원더러 열차 내에서 오로지 서비스만 하라고 한단다. 다른 업무에는 권한조차 없다. 그렇다면 무엇을 하란 말인가? 열차가 터널 중간에 섰을 때, 승강문이 열리지 않아 고객이 열차에서 내리지 못할 때, 열차가 고장이 나서 다른 열차로 고객을 바꿔 태울 때, 갑자기 응급환자가 생겨 응급처치가 필요할 때…. 승무원은 그런 일을 담당할 책임도 권한도 없으니 오로지 '서비스'만 하라니 고객의 안전은 누가 책임지며 그 '서비스'는 도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철도공사는 'KTX승무사업권'과 함께 'KTX내 물품 판매권'까지 한국철도유통으로부터 KTX 관광레저에 넘겼다. 결국 철도공사는 KTX 여승무원더러 안전은 중요하지 않으니 열차내 안전업무는 포기하고 대신 물건을 팔아 돈을 벌라고, KTX 여승무원과 노사관계 자체를 맺고 싶지 않으니 다른 회사로 가라고 강요하는 것이다.

<font color=a77a2>철도노조 파업은 끝났어도... 이철 철도공사 사장과 면담을 요구하며 철도공사 서울지역본부 점거 농성을 벌였던 KTX 승무원들이 지난 3월 27일, 경찰에 의해 강제해산당한 뒤 울먹이며 구호를 외치고 있다.
철도노조 파업은 끝났어도... 이철 철도공사 사장과 면담을 요구하며 철도공사 서울지역본부 점거 농성을 벌였던 KTX 승무원들이 지난 3월 27일, 경찰에 의해 강제해산당한 뒤 울먹이며 구호를 외치고 있다.
우리는 100일 가까운 시간 동안 끊임없이 철도공사 직접고용만을 요구하며 싸워왔다. 이철 사장과의 면담을 요구하다가 남자 전투경찰의 방패와 군홧발에 짓밟힌 3월 27일을 시작으로 4월 19일 국회 헌정기념관 농성과 연행, 5월 12일 철도공사 서울지역본부 농성장 무력해산 후 연행, 5월 14일 강금실 선거캠프 내 평화 농성 승무원 강제연행까지 총 4번의 공권력 투입과 3번의 경찰연행을 당했다.

80명을 해산시키기 위해 1000명에 가까운 경찰이 동원됐고, 물대포와 수십 대의 전경차가 배치되었다. 비정규직 특위 대표는 구속되셨고 주요핵심간부 6명에게는 체포영장이, 13명의 지도부에게는 손해배상과 고소 고발이, 260명 전 승무원에게는 철도건물 10곳에 대한 출입금지 가처분 신청이 떨어져 있다.

정의가 이기기 때문에 싸우는 것이 아니다

사용자의 불법행위를 '합법'적으로 해결하기 위해 온갖 노력을 다했지만 늘 사용자의 횡포 앞에 무력하게 무너졌고, 그렇기 때문에 결국 단체행동을 시작해 파업까지 왔다. 정부와 철도공사는 일상과 임금을 포기하고 고통을 감수하면서까지 부당함을 고쳐보려는 KTX 여승무원의 피땀어린 노력을 '불법'이라 칭하며 온갖 '합법'적 탄압을 자행하고 있는 것이다.

파업이 100일째 되는 날(6월 8일)을 앞두고 있는 나에게 지금 필요한 것은 행운의 네잎클로버다. 그것은 옳은 것을 옳다고 이야기하는 소신이 전달되는 행운이 찾아와주기를 기원하는 바람이다. 오랜 농성으로 약해진 몸을 이끌고 단식을 통해 투쟁하는 동지들이 버티고 있다. 정부와 철도공사의 호도와 매도로 더욱 차가워진 시선에 맞서 우리는 온몸으로 싸우고 있는 것이다.

난 더 이상 정의가 이긴다는 순진한 생각은 하지 않는다. 내가 정당한 길을 가겠다고 결심했으니까, 그 신념 하나로 싸우는 것이다. 신념을 지키기 위해서는 힘이 필요하다. 그 어떤 것에도 굴하지 않는 강한 힘, 희망의 힘, 끈질기게 투쟁하는 동지들을 위해, 난 네잎클로버를 찾는 그 간절함으로 오늘도 희망을 찾는다.

덧붙이는 글 | 민세원 기자는 현재 KTX 열차 승무지부장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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