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대인하면 매부리코, 수전노, 아랍분쟁, 모세기적 등의 단어들이 떠오른다. 하지만 이스라엘 반대편 중국 상하이에서 유대인이 집단으로 거주했던 집단촌을 발견하곤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러시아 혁명이후 볼셰비키와의 전쟁에서 패한 백군파가 도망 나와 당시 프랑스조차지내에 세웠던 러시아음악학교(현 상해음악대학 전신) 건물 중 하나가 과거 유대인들의 구락부였다는 사실을 알고부터 상하이의 유대인 흔적에 대해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그러다 과거 일본 조차지역인 홍커우(虹口)에서 '시노고그'라고 불리는 구 유대인회당 건물을 알게 되었는데 모세유대인회당(OHEL MOISHE SYNAGOGUE)이라 불리는 유대인교회였다. 교회 주변 도로 일대는 유대인 집단주택 건물, 유대인상가 등이 60여 년 전 모습 그대로여서 과거와 별반 다르지 않아 보였다.
이 일대가 바로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독일 히틀러 정권에서 자행된 끔직한 유대인 학살을 피해 유럽에서 배를 타거나 시베리아 기차를 타고서 상하이로 피난 온 3만여 명의 유대인이 모여 살았던 지역이다.
유대인, 멸시와 흠모의 대상
"히틀러는 왜 유독 유대인만을 그렇게도 미워했을까?"
1933년 1월, 독일정부를 장악한 히틀러는 '과거나 지금이나 새로운 정권이 들어서면 새로운 정책으로 국민적 관심 끌기를 좋아하듯' 제1차 세계대전 패배로 실의에 빠진 당시 독일 국민들을 하나로 묶기 위한 방편을 생각한다.
그래서 나치정권이 들고 나온 것이 이른바 '독일 아리아족의 순수혈통을 보존하자'는 인종차별주의 정책이다. 곧바로 독일 내의 소수민족인 유대인, 집시, 황색인, 흑인에 대한 우월적 차별정책을 편다.
하지만 유대인들은 당시 독일과 유럽 곳곳에서 상당한 부를 축적하고 있었기 때문에 집시들처럼 쉽사리 이주를 하지 못하고, 오히려 히틀러 정부 초기에는 나치의 눈치를 보며 부를 더 축적하기도 한다.
그러다 노골적인 탄압이 진행된 1935년 9월에 이르러 유태인의 권리가 박탈당하고 외국으로 추방되기 시작한다. 이윽고 1938년 11월에는 91명의 유태인이 학살되고 유태인회당과 유태인이 운영하는 가게들이 파괴되고 유태인 남자들은 체포되어 강제수용소에 수용되는 최악의 상황을 맞는다.
당시 독일 거주 유대인은 독일 전체 인구의 3% 밖에 되지 않았지만 독일 전체 부의 상당부분을 차지할 정도로 부를 독식하고 있었고, 독일 이웃 다른 나라의 경우도 마찬가지로 유대인의 재산은 상당하여 서민들로부터 흠모와 질시를 동시에 받고 있었다.
셰익스피어 작품 <베니스의 상인>에 나오는 주인공 샤일록처럼 당시 유대인들은 유럽에서 고리대금업자 이거나 상점을 경영하는 소수의 부자로 서민 다수에게는 쉽게 질시대상이 됐다.
상하이로의 긴박한 탈출 감행한 유대인
이렇게 제2차 세계대전 시기 유럽에서 신분상 위태롭고 불안한 생활을 하던 유대인이 중국 상하이로 건너오게 된 계기는 1933년, 중국의 지도자 송칭링(宋慶齡), 루쉰(魯迅) 등이 주상하이독일총영사관을 찾아가 독일의 인종차별정책을 항의하는 항의서를 전달한 사건으로부터 시작한다.
이때부터 유럽 거주 유대인들에게 상하이라는 도시가 알려지며 유대인이 차츰 넘어오게 된다(유대인 이주 1세대는 1842년 아편전쟁 이후 들어와 무역상을 차린 '사순', 상하이 번화가인 난징동루(南京東路)를 개발한 '하든' 등이 있다. 상하이 이주 유대인 1세대들은 이미 상하이에서 부를 잡고 있었고 후에 넘어오는 피난 유대인을 위한 구호사업을 펼치기도 한다).
당시 독일 인접 국가들은 여러 이유로 독일 거주 유대인 이주를 받아주지 않았다. 이후 독일군이 유럽 전 지역을 점령하며 유대인 색출에 나서자 유대인들은 비자가 필요 없는 상하이를 피난처로 선택한다.
중국인 학자들로 구성된 상해유대연구중심(上海猶太硏究中心)에서 발간한 자료에 의하면 1933년부터 1941년까지 상하이로 넘어온 유대인은 약 3만여명 정도 된다(러시아 혁명이후 내전에서 패한 후 쫓겨 상하이로 넘어온 구 짜르 정권 백군파 러시아인도 1935년 당시 상하이에 2만5천여 명이나 있었다).
케쉬타푸, 상하이 일본군에게 집단처형 제안
몸을 피해 상하이로 막 넘어온 유대인들은 홍커우(虹口), 현 모세유대교회당 근교인 티란차오(提藍橋) 일대에 거주를 한다. 도망 나오느라 아무것도 가지고 오지 못한 유대인들은 이미 정착한 1세대 유대인들로부터 식품, 의료 등의 지원을 받으면서 상하이 생활에 적응해 나간다.
그러나 상하이로 넘어온 유대인들의 불안은 계속된다. 한 때는 끝까지 쫓아오는 독일 비밀경찰의 살해음모 대상이 되기도 한다. 전쟁 후기 일본과 동맹관계를 맺은 독일은 1942년 비밀경찰을 보내 유대인 거주지를 마련해준 일본군(진주만 습격 전으로 미국 내 유대인에게 전쟁 군자금을 받기 위한 조치)에게 유대인이 유대교회당에 모였을 때 전격적으로 학살할 것을 제안하였다. 하지만 일본군은 세계 이목을 고려, 1937년 이후 상하이 유입 유태인만을 선별하여 지정 장소에 거주하게 하는 격리정책을 쓴다.
바로 이 일본이 마련해준 격리구역에서 유태인들은 학교, 식당, 병원, 신문사, 교회당을 짓고, 직업훈련소를 운영하면서 그들만의 생활을 한다.
당시 이곳은 '작은 비엔나'라 불릴 정도로 상하이 속 독특한 유대인 문화공간으로 조성된다. 이 거리가 오늘날의 창즈루(長治路), 탕산루(唐山路), 조우산루(舟山路), 훠산루(霍山路), 궁핑루(公平路) 일대로 도로 이름에서도 유대인들의 당시 상황을 느낄 수 있다.
이곳에서 유대인들은 그들만의 유대인 예술문화 거리를 조성한다. 조성된 유대인 거리는 프랑스 조차지인 화이하이중루(淮海中路)에 있는 러시아인 거리와 함께 '러시아인과 유대인의 서구적 예술문화거리'가 된다. 이 거리에서 서구식 문화예술세계가 펼쳐진다.
나름의 유대인 문화를 향유하며 살아가던 유대인들은 '1941년 100만 명가량이 죽었다'는 아우슈비츠수용소 유태인학살 소식을 들으며 경악을 하고, 마음조리며 살다가 '1945년 5월 독일 항복' 한다는 말을 듣고, '1945년 8월 일본의 패전' 소식을 접하게 된다. 자신들을 감시했던 일본이 드디어 항복을 하자 유대인들은 이때부터 자유로운 몸이 되어 다시 남미, 미국, 호주 등으로 각자의 연고지를 찾아 하나 둘씩 떠나게 된다.
떠나면서 그들은 "상하이! 우리는 다시 돌아 올 것이다"라고 말하며 눈물을 흘리고 언젠가 다시 꼭 만날 것을 서로 다짐한다. 모세유대회당 벽면에 걸린 떠나갈 당시의 전시 사진 속에는 그때의 아픈 기억을 되살려주기라도 하듯 "Shanghai, We will be back again"이라고 큼지막하게 적혀 있다.
상하이에 다시 나타난 유대인들
유태인들은 몇 십 년 후 중국 개혁정책과 함께 상하이가 발전을 하자 여행객으로, 글로벌 기업 주재원으로, 서구문화 전달자로, 유대인 피난사 연구원으로 다시 상하이에 돌아온다.
과거 유대인회당 건물이었던 모세유대인회당(OHEL MOISHE SYNAGOGUE)에는 지난 피난시절의 사진, 유대인 묘비, 관련서적, 잡지 등이 전시되어 있고 한쪽에는 이곳을 방문한 유대인들이 남긴 기념물들도 벽에 걸려있다.
회당을 찾은 유대인들은 보관된 전시자료를 보며 영어를 구사하는 중국인 왕(王)노인(87·모세유대회당 관리인) 안내를 받으며 상하이유대인중심센터가 출판한, 한국 돈으로 3만원~5만원에 해당하는 고가서적인 <유태인재중국(猶太人在中國)>, <유태인재상하이(猶太人在上海>를 거리낌 없이 구매한다.
젊은 유대인 커플은 유대회당 모퉁이에 수집되어 있는 상하이에서 사망한 유대인들의 묘비석 잔해물을 유심히 보고 또 들여다보고 있었다. 다른 한편에서는 나이든 유대인 부부가 "주거단지의 집단주택들을 들러보고, 인근공원에 세워져있는 '2차대전 유대인 피난거주지 기념비'를 찾아 나선다"며 회당 문을 나선다.
초강대국 미국을 움직이는 슈퍼맨, 유대인
세계에 흩어져 살고 있는 유대인들의 조직력과 결집력은 너무나 잘 알려져 있다. 500만 명의 유대 인구를 가진 미국 거주 유대인의 유대인회당만도 몇 천개를 헤아린다고 한다.
1945년 이후 상하이를 떠나 각 나라로 흩어진 3만여 명의 유대인들도 정착한 나라 별로 가족단위 모임을 만들어 모인다 한다. 모여서 유대인 피난사를 공부하고, 단체로 과거 흔적 찾기를 위해 상하이를 방문하기도 한다.
어떤 이들은 자본주의보다 더한 시장경제가 진행되고 있는 중국에 '슈퍼 유대인'이 되어 들어온다. 스티븐 스필버그는 미국 할리우드 최고의 감독으로, 빌게이츠는 중국의 최고지도자 후진타오 주석의 지원을 받으며 당당하게 상하이로 돌아왔다. 사주가 유태계 사람인 AP통신은 전파를 타고 안방으로 들어온다.
그들은 한동안 힘없는 소수민족으로, 박해받던 피해자 신분으로, 중세 때는 '게토'라 불리는 집단빈민가에 살 수 밖에 없었던, 뿔뿔이 각국에 흩어져 살아야만 했던 유대인들이었다. 하지만 테러응징을 위해 또 다른 테러를 행사하는 미국을 움직이는 '배후인물'로, 중동과 세계평화를 위협하는 '용의자'로 세계경제를 주물럭거리는 큰손으로 유대인이 주목받고 있는 점은 참으로 '역사의 뒤틀림'이라 말하지 않을 수 없다.
덧붙이는 글 | -중국서적 <유태인재상하이> <유태인재중국>을 참조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