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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쟈싱 김구 선생 피난처 2충 침실에서 바라본 쪽배. 저 배를 타고 김구 선생은 도망 다녔다.
ⓒ 유창하
상하이 근교 도시인인 쟈싱(嘉興; 가흥)이라는 곳에 가면 김구 선생이 2년 동안 일본군의 추적을 피해 있던 서남호 변에 있는 주택과 남북호 변에 있는 재청별장이라는 피난처가 2군데 있다.

윤봉길 의사가 1932년 폭탄을 투척하는 거사를 하고 난 후 일본군에 체포되자 김구 선생은 "내가 바로 윤봉길 의사 배후 범인이다"라고 밝히고, 일본 비밀경찰의 추적을 피해 상하이 근교로 도주한다.

마침 평소 가까이 지내던 중국 국민당 간부 추푸청 선생의 도움으로 상하이에서 인근 도시인 쟈싱이라는 곳으로 피신한다.

추푸청 선생이 제공해준 피난처는 쟈싱 메이완지에(梅灣街) 서남호(西南湖) 변에 있는 개인주택으로 일본경찰의 잠입 낌새를 느끼면 대기하고 있던 쪽배로 서남호를 따라 긴급히 피신을 할 수 있는 구조다.

이곳에서 김구 선생은 2년 동안 몸을 숨기고 수시로 주위에 집단숙소를 마련한 이동녕, 박찬익, 엄항섭, 김일한 선생과 비밀 회동을 하며 '떠돌이 임시정부'를 꾸려나간다.

쟈싱 '김구피난처기념관' 개관식 열려

▲ 이번에 개관한 쟈싱 "김구선생피난처 기념관"에 있는 주변 지형 모형
ⓒ 유창하
지난 5월 27일에는 쟈싱 김구피난처기념관 개관식이 있었다. 쟈싱 메이완지에(梅灣街) 김구 선생이 머문 곳을 포함한 일대를 성급문물보호지역으로 선포하여 2005년부터 대폭적인 수리를 단행해 이번에 끝낸 쟈싱 인민정부에서 정식으로 '김구피난처기념관' 개관식을 거행하고 일반인에게 공개하였다.

쟈싱 메이완지에 변 서남호가 바라보이는 김구 선생 침실이 있는 2층으로 올라서서 창밖으로 서남호를 바라보니 당시 피난하던 쪽배가 한쪽 편에 묶여 있어 도망자 신분이었던 당시 급박한 상황을 실감한다.

2층에 놓여있는 자그만 침실과 좁은 방 그리고 좁은 계단 등은 피난 시절의 어려움을 느끼게 한다. 더구나 여기서 조금 떨어져 있는 임시정부 요인들의 방들은 집단합숙소로 한 방에 4~8명 온 가족이 거처하도록 되어 있다.

그러다가 김구 선생은 일본 경찰의 마수가 서서히 좁혀져 오는 것을 느껴 쟈싱에서 2시간 거리 정도에 떨어져 있는 하이옌(海鹽)이라는 '남북호(南北湖)'의 재청별장으로 또다시 피신하게 된다.

남북호의 재청별장 역시 쟈싱에 은신처를 제공했던 추푸청 선생의 며느리 친정집 별장으로 항조우완(杭州灣) 바닷가에 인접한 경관이 아름다운 호숫가에 자리 잡고 있다. 김구 선생은 여기서 6개월 정도 휴식을 취하다가 다시 쟈싱으로 돌아온 후 곧바로 임시정부청사를 항주로 옮기게 된다.

아름다운 남북호 호수가 바라보이는 재청별장 창문 가까이에는 당시 김구 선생이 사용하던 책상, 집기류 등이 놓여있다. 집기류와 호수를 바라보니 그 당시 김구 선생 모습이 잠시 떠올랐다.

김구 선생의 오랜 독립운동 활동 중에 맞은 6개월이라는 짧은 은둔과 휴식 기간이었지만 결코 달콤하고 편안하지 않았을 것이다. 오히려 감옥에 들어가 있는 독립운동가들보다 더 고통스러웠을 것이다.

찾는 한국인 없어 고요한 김구 피난처

▲ 재청별장 김구피난처 안내간판은 깔끔하게 되어 있지만 정녕 찾는 한국인은 없다.
ⓒ 유창하
한국인들이 대개 중국 상하이를 방문하면 여행사의 판에 박은 듯한 관광코스만 방문하게 된다. 상하이를 방문하면 시간을 내어 백범 김구 선생의 험난했던 임시정부 피난길도 한번 찾아나서 보기 바란다.

김구 선생 피난처 옆 건물에 자료 전시실이 마련되어 있고 얼마 떨어져 있지않은 곳에는 김구 선생의 어머니와 아들, 그리고 임시정부 요인들 가족들이 기거했던 집단 숙소도 보존되어 있어 당시의 임정 요원들의 어려웠던 생활상도 엿볼 수 있다.

▲ 재청별장의 김구 선생 침실은 남북호수가 바라보이는 창문가에 있다
ⓒ 유창하
하이엔(海鹽) 남북호 재청별장에 입구에 마련된 김구 전시관에 들어가니 찾아오는 한국인들은 없고 몇몇 중국인들이 중국 안내원에게 설명을 듣고 있다.

참으로 안타까운 광경이다. 김구 선생의 독립운동 과정과 피난의 애절한 사연이 담긴 자리에서 중국인의 발자국 소리와 중국말밖에 들을 수 없었다는 것이 너무나 안타깝기만 하다.

도망자의 신분으로 어려운 삶을 살다간 김구 선생을 비롯한 수많은 임시정부 독립유공자 이름들이 하나 둘, 사람들 머릿속에서 사라져만 간다. 하루에도 한국관광객 수천 명이 상하이를 방문하지만 김구 선생의 피난길은 찾아오는 한국인 아무도 없이 적막하기만 하다.

▲ 재청별장에서 바라보는 남북호수의 전경
ⓒ 유창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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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무 오랜 기간 오마이뉴스에서 쉬었네요. 힘겨운 혼돈 세상, 살아가는 한 인간의 일상을 새로운 기사로 독자들께 전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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