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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작 소설집 <강진만>
연작 소설집 <강진만> ⓒ 온누리
도시가 꽃이라면 농촌은 뿌리라는 말이 있다. 꽃은 겉보기에 화려해 보이지만 결국은 뿌리의 결과물일 뿐이다. 뿌리가 없는 꽃은 금방 시들어 죽기 마련이다.

그런데 요즘 우리의 현실은 어떤가. 꽃의 화려함을 위해 뿌리를 마구 잘라버리는 것은 아닌가? 한미 FTA 협상 과정을 지켜보면서, 나는 내내 그런 생각을 지울 수 없다. 우루과이 라운드라는 낯선 이름으로부터 시작된 농산물 시장 개방 압력은 마침내 개별 국가간의 자유무역 협정을 통해, 완전한 무장 해제를 요구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사실 따지고 보면 농촌의 해체는 이미 도시화·산업화를 추구하던 1960년대 말 70년대 초부터 집요하고 끈질기게 진행되어 왔다. 농촌 인구의 도시 유입을 통해 값싼 노동력을 확보하고, 저렴한 생산 단가를 바탕으로 수출을 늘려 경제 발전의 동력으로 삼아온 게 사실이다.

세상에서 밀려나고 내쫓기는 오늘의 농민은 어떤가? 그 농민들은 무엇으로 살아가고 있는가? 이런 질문은 한상준의 소설 <강진만>(온누리)을 읽는 내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강진만>은 한상준의 연작 소설집이다. 모두 일곱 편의 중·단편들로 묶인 이 소설집의 특징을 한 마디로 요약하면, '열악한 농촌의 현실과 농민의 끈질긴 생명력'이다. 일곱 편의 소설은 그 배경이 어떻든 간에 모두 농민소설이다.

<1989년 11월 3일, 김창호>와 같은 작품은 언뜻 보면 교육 소설처럼 읽힌다. 고등학교 3학년인 김창호의 방황과 좌절, 시골 고등학교의 열악한 현실이 소설에 생생히 담겨 있다. 또 학생의 날 기념식을 치르는 아이들과 그것을 막으려는 장학사와 교장과의 갈등은 긴장감 있게 전개된다.

그러나 이 소설 역시 농민소설일 수밖에 없다. 김창호의 의식을 결정짓는 환경은 바로 농촌이라는 현실적 조건에서 비롯되기 때문이다. 김창호가 결국은 농촌에 남아 농민으로 살아가기로 결정한 것도 이 소설을 농민소설의 범주에 넣게 하는 조건이다.

<강진만>의 연작 소설에는 오늘날의 우리 농촌 현실이 사실적으로 담겨 있다. <곗날 풍경>은 이농 현상과 분열되어 가는 농촌 공동체를 그려내고 있다. 이미 노인네들만 남게 된 농촌 현실 속에서, 약삭빠르게 현실에 적응해 슈퍼마켓이나 비디오 가게를 차린 측과 여전히 바라볼 수 있는 것은 농토밖에 없는 붙박이 농민 측의 곗날 싸움이 이 소설의 사건이다.

농촌 해체는 공동체 구성원간의 반목과 분열로 이어지고, 결국은 인간성 상실을 가져온다는 것을 <곗날 풍경>은 잘 담아내고 있다.

<낫과 예초기>는 이런 현실의 모습을 보다 치밀하게 보여준다. 벌초단을 만들어 돈을 받고 벌초를 대신 해주자는 측과 조상의 무덤을 낫도 아닌 기계로 벌초할 수 없다는 김 노인의 대립은, 현실주의자와 원칙주의자의 대립을 상징한다. 또한 이들의 대립은 농업을 바라보는 시각의 대립이기도 하다.

연작 소설 <강진만>에는 이처럼 해체되어 가는 농촌의 현실과, 그 현실에 맞서 있는 농민의 절규를 고스란히 담겨 있다. <유자밭>이나 <'쌀 개방찬반투표' 조직화사업에 관한 보고서> 같은 작품들은 농산물 개방의 파고 속에서 땅을 지켜내고자 하는 농민의 투쟁과 의지를 잘 형상화하고 있다. 앞의 작품들이 현실의 모습을 그려내고 있다면 이들 작품들은 현실에 맞선 농민의 절규를 담아내고 있는 것이다.

이렇듯 한상준은 소설집 <강진만>을 통해 절망 속에서도 좌절하지 않고 희망의 끈을 놓지 않는 농민을 표현하고 있다. 그의 이런 낙관과 희망은 어디서 나오는 것일까. 바로 농민에 대한 믿음이다.

<'쌀 개방찬반투표' 조직화사업에 관한 보고서>의 한 장면을 보자. 농민회 경제사업부장인 장남식은 노인들이 대부분인 마을을 돌며 쌀 개방 찬반투표를 조직해 낸다. 그런데 천신만고 끝에 마련된 자리에서 FTA의 문제를 설명하기 위해 휴대폰을 꺼내 설명하려는 차에, 휴대폰 벨이 울린다. 그런데 그 벨소리가 '농민가'였다. 벨소리를 들은 노인들은 회의보다 농민가에 대한 이야기로 부산하다.

"아따, 그거, <뇡민가> 아녀?"
"금메, 한드폰이당가, 뭔가가, 때르릉 한 허고, 요새는, 가락이 착착 나와불대, 와."
<중략>
"접때, 지난 겨울에 말여, 테레비봉게, 국회 앞으서 뇡민대회라등가 머시냐, 그런 거를 헐 때 봉게, '동해물과 백두산이'는 안 나오고, 저 노래만 쭝뿔나게 허잖던 게비네."
"춤 추며 싸우닝게, 맨날 지는 거여."
<중략>
"춤 추면서 싸워 왔응게, 이만침이나 젼뎌온 거시여. 글 안했으먼, 폴쎄, 까무라치고, 나자빠져 부렀제. 아, 누기라고, 논두렁, 받고랑에다 뻘밭으까지 나댕기믄서, 허리 꾸부정혀 갔고, 숟가락 들 심조차 몸띵이서 빠져나가는 것 번연히 봄서나 촌구석으서 살라고 혔겄냐고..."


춤추며 싸울 줄 아는 넉넉한 낙관이 바로 농민의 마음이며, 그 농민의 마음을 제대로 살펴주지 못하는 이 땅에 진정한 미래는 없다는 것을, 이 소설은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다.

붕괴되어 가는 농촌 공동체만큼이나 농민의 삶을 다룬 소설을 보기 힘들어진 요즘이다. 이문구의 <우리 동네> 이후, 몇몇 소설가들이 농촌을 소설로 그려냈지만 본격적으로 농촌소설에 자신을 거는 작가는 드물었다. 이런 때 한상준의 농촌 연작 소설 <강진만>을 만난 것은 매우 반가운 일이다.

온통 도시 중심의 세계가 활개 치는 세상, 모든 가치를 생명이 아니라 자본으로 따지고 드는 세태에서 한상준이 그려내는 세상은 어쩌면 시들어 가는 곳일 뿐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작가는 늘 세상의 경계에 서 있는 존재이며, 소외되고 억눌린 사람들의 이야기를 그려내는 존재가 아니던가.

요즘 한창 한미 FTA 문제로 시끄럽다. 끝없이 야욕을 넓혀 가는 세계 자본의 욕망 앞에서 우리는 과연 어떤 입장으로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한상준의 <강진만>은 우리에게 이 질문을 던지고 있다.

덧붙이는 글 | 한상준:전북 고창 출생. 1994년 <삶, 사회, 그리고 문학>에 <해리댁의 망제>를 발표하며 등단. 가톨릭 농민회, Y-교사회, 전교조 등에서 활동하였음. 현재 전라남도 완도의 한 중학교 교장. 소설집 <오래된 잉태>, <강진만>이 있음.


강진만

한상준 지음, 온누리(2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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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집 <장다리꽃같은 우리 아이들>, <작은 바람 하나로 시작된 우리 랑은>, <천년 전 같은 하루>, <꽃,꽃잎>, <물골, 그 집>, <람풍>등의 시집과 <비에 젖은 종이 비행기>, <꽃비> , <무지개 너머 1,230마일> 등의 소설, 여행기 <구름의 성, 운남>, <일생에 한 번은 몽골을 만나라> 등의 책을 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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