핵문제를 둘러싸고 정면 충돌로 치닫던 미국과 이란 사이에 대화 움직임이 싹트고 있다. 유화적 분위기는 부시행정부가 이란과 직접 대화에 나설 의사가 있고, 이란이 우라늄 농축 프로그램을 포기하면 핵기술 지원도 가능하다는 태도변화에서 비롯되었다. 미국이 이란과 직접 대화 의사를 밝힌 것은 1979년 이후 처음이다.
미국은 이러한 양보안을 바탕으로 지난주 유엔 안보리 5개 상임이사국과 독일(P5+1) 등 6개국 외무장관 회담에서 협상안을 만들었다. 그리고 이번주 들어 하비에르 솔라나 유럽연합(EU) 외교정책 대표는 테헤란을 방문해 이란측과 집중적인 협의에 들어갔다.
미국의 양보안이 포함된 협상안을 받은 이란의 분위기도 온건해지고 있다. 알리 라리자니 이란핵 협상대표는 솔라나 대표를 만난 직후, "(협상안의) 각 조항들을 면밀히 검토한 뒤 답변하겠다"고 밝혔다.
특히 그는 "미국 주도의 이 안에는 긍정적 조치들과 좀더 분명하게 밝혀야 할 모호한 내용들이 혼재돼 있다"고 말했다고 연합뉴스는 보도했다. 이란이 협상안에 대해 긍정적인 반응을 보인 것도 이번이 처음이다.
부시행정부가 태도를 바꾼 이유
관심의 초점은 그동안 이란과의 직접 대화 불가를 고수해왔던 부시행정부가 태도를 바꾼 이유와 협상안의 구체적 내용이다. 안보리 상임이사국과 독일 등 6개국은 협상안의 구체적인 내용을 밝히지 않고 있지만, 이란의 우라늄 농축 활동포기를 조건으로 ▲경수로 제공 ▲미국의 핵 기술 지원 ▲이란의 세계무역기구(WTO) 가입 지원 ▲보잉사 항공기 부품과 미국 농업기술 이란 판매 허용 등이 거론되고 있다.
이 협상안은 이전에 유럽연합 주도로 만들어진 방안에 비해 발전된 내용이 있다. 미국이 대이란 무역제재를 완화하고 세계무역기구(WTO) 가입을 반대하지 않으며, 핵기술 이전까지 고려할 수 있다는 것은 새롭게 추가된 내용이다. 그러나 이란에 대한 안전보장 방식은 공개되지 않아 향후 협상과정에서 이 문제가 쟁점으로 부상할 가능성도 있다.
이처럼 미국이 한발 물러선 데에는 여러 가지 요인이 복합적으로 작용한 것으로 보인다. 우선 협상 이외에 마땅한 방법이 없다는 점이다. 유엔 안보리를 통한 대이란 제재는 러시아와 중국의 반대로 용이하지 않고, 설사 제재에 들어가더라도 이란의 석유 무기화를 촉발해 이란 경제뿐만 아니라 세계경제를 뒤흔들 수 있다.
무력 사용도 현실적 방안이 아님은 물론이다. 이란 핵시설을 정밀 타격해 이란의 핵개발을 늦출 수는 있지만, 오히려 이 방안은 이란의 핵개발을 '평화용'에서 '군사용'으로 전환시키는 결과를 낳을 수 있다. 또한 이라크 사태와 맞물려 전선을 중동 전체로 확산시킬 위험이 있고, 이란이 석유 금수 조치에 나서 이란발 세계석유파동을 초래할 수 있다. 또한 이라크 사태의 장기화로 전쟁에 신물난 미국 국민이 이란 폭격을 지지할 것으로도 보이지 않는다.
미국 안팎에서 점증해온 부시행정부에 대한 압박도 한목 했다. 이란 핵문제가 악화일로를 걷자 미국의 일부 언론과 싱크탱크, 그리고 민주당 및 공화당 일각에서조차 부시행정부는 이란과의 직접 대화에 나서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여왔다.
또한 유럽연합과 중국, 러시아 등 이란 핵문제의 핵심 당사국들도 미국에게 직접 대화를 촉구해왔다. 이 상황에서 부시행정부가 이란과의 직접 대화 '불가'를 고수할 경우, 대이란 강경책에 대한 명분을 확보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미국 안팎에서 부시행정부가 고립되는 상황까지 고려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콘돌리자 라이스 국무장관이 부시 대통령에게 이란과의 대화를 거부하면 미국과 유럽연합 사이에 심각한 균열이 초래될 수 있다고 보고하자 이를 전해들은 부시 대통령이 이란정책의 변화를 승인했다는 <뉴욕타임스>의 보도(6월 3일)는 이 분석을 뒷받침한다.
핵심은 '우라늄 농축' 문제
그러나 이란 핵문제가 순조롭게 해결될 지는 여전히 미지수이다. 우선 딕 체니 부통령과 도널드 럼스펠드 국방장관이 이란과의 직접 대화를 비롯한 미국의 양보안에 반발하고 있다. 대외정책의 막강한 영향력을 발휘해온 체니와 럼스펠드는 리크게이트와 이라크정책 실패 등으로 궁지에 몰려 있으나, 이들이 이란과의 협상에 팔짱만 끼고 있지는 않을 것이다.
더욱 중요한 문제는 이란 핵문제의 촉발요인이자 최대 쟁점인 우라늄농축 문제의 향배이다. 이란은 핵확산금지조약(NPT) 회원국으로서 우라늄농축 프로그램을 포함한 핵연료 주기를 완성하는 것은 "양도할 수 없는 권리"이자, 오히려 국제사회가 지원해야 할 사안이라며 '포기 불가'를 고수하고 있다.
특히 이란은 외부의 핵연료 제공이 "경제적, 정치적 무기"가 될 수 있다는 반박 논리를 펴고 있다. 즉, 원자로 가동에 필요한 핵연료를 외부에 의존할 경우 이란은 그 연료를 제공하는 국가에 정치적, 경제적으로 종속될 수 있다는 논리이다.
이같은 이란의 입장을 고려할 때, 이란이 우라늄 농축 프로그램 포기라는 결단을 내리기는 쉽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이란이 우라늄 농축 프로그램에 어떤 입장을 보이느냐가 향후 이란 핵문제의 최대 분수령이 될 것으로 보인다. 이란이 미국 등의 협상안을 수용해 농축활동을 중단하면 극적인 타결 가능성이 높아질 것이고, 반대로 포기 불가를 고수하면서 협상안을 거부할 경우 미국과 유럽연합은 유엔 안보리 회부를 본격 추진할 것으로 전망된다.
그러나 이란이 협상안에 대해 '검토해볼 만하다'는 반응을 보이고 있어, 당분간 대화 국면은 계속될 것으로 보인다. 특히 미국과 이란의 직접 대화 여부 및 그 결과가 주목된다. 이란이 협상안에 대해 미국과 직접 대화를 요구하고 미국이 이를 수용할지, 아니면 이란과 미국 내 강경파의 반대로 무산될지 말이다.
또 한가지 중요한 것은 이란의 안전보장 방안이다. 협상안에서 이란의 우라늄 농축 활동 포기의 대가로 에너지를 포함한 경제지원 방안은 일부 공개되고 있지만, 안전보장 방안은 아직 공개되지 않고 있다.
참고로 부시행정부는 이란을 북한, 이라크와 함께 "악의 축"으로 규정하면서 선제공격 대상으로 삼아왔다. 이때부터 이란의 핵개발 움직임이 가속화됐고, 이란이 우라늄 농축 활동에 집착하는 이유에는 '대미 억제력' 확보도 포함돼 있다고 볼 수 있다. 따라서 이란에 대한 미국의 안전보장 방안도 핵심적인 이슈라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