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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 화백은 옛 시절 어린 독자의 청을 받아  펜을 들었다.
손 화백은 옛 시절 어린 독자의 청을 받아 펜을 들었다. ⓒ 황종원
사람들은 걷고 있었다. 나는 마치 그들이 딴 나라 사람 같다. 인사동은 천상병 시인의 '귀천'이 있는 곳이다. 그리고 네이버 카페 '만화와 추억' 지킴이 오경수씨가 있는 곳이다.

아는 만큼 세상은 좁거나 넓거나 하다. 내게는 인사동이 그렇게 좁다. 서울내기로 한 평생을 살고도 요즈음은 인사동에 오는 일은 별로 없어서일까. 그러니 인사동은 서울에 있으나 낯설다. 마치 오랜 친구를 만나듯, 추억을 되새길 때 오는 동네이다. 추억은 매일 만나는 것이 아니니까. 더러 낯설기도 하겠지. 추억의 만화에 미쳐 사는 오경수씨는 가끔 나에게 전화를 건다.

"이번에 만화가 누가 나오시니 시간이 있으시면 나와 보세요."
"좋아요. 언젭니까?"

작년 연말에는 라이파이 김산호 화백과 해넘이 자리에서 신이 났었다. 소년 시절에는 만화가에게 다가가고 하였으나 너무 먼 존재였다. 지금도 젊은이들이 호리에게 다가가고자 해도 어렵듯이. 그때 우리는 소년이었고 만화가는 다가갈 수 없는 또 다른 세계 속에 있는 '신'의 영역이었다. 만화가를 만나 한 번이라도 말을 나누고 싶었던 소망은 어린 날에 품었던 꿈이었다.

꿈은 이루어진다. 그리운 이름들. 라이파이, 약동이, 혁 형사가 우리 시절에 있었다. 한동안 뜸했던 오경수씨가 내게 전화를 걸었다.

"이번에 손의성 선생님이 나오십니다. 또 누가 나오고."

부산 식당 앞 '여기(아지오)'가 보이는 길에서 나는 오경수씨를 만났다. 함께 있던 손의성 화백도 만났다. 칠순의 나이에 청춘 시절부터 신는 백구두에 우리 시대의 영웅 '혁 형사'를 그린 손우성 화백과 함께 식당으로 들어선다. 나는 화백의 만화를 보았던 40년 세월을 뛰어넘으며 마치 형님을 보듯이 말한다.

"선생님, 백구두는 여전하시군요."

옛 독자들은 우리의 영웅을 자리의 중앙에 모셨다. 영웅은 50~60대들에게 그리움이었다. 손 화백(70) 대표작 <동경 4번지>(1965)는 혁명적 작품이었다. 주인공 혁은 카리스마 그 자체였다. 중절모에 롱 코트를 휘날리는 그는 왼손에 날이 선 비수와 오른손에 권총을 들었다. 살기 번뜩이는 그림은 한마디로 멋있었다. 손 화백은 60년대 초부터 무협 만화 <운명의 4444>와 독립운동 만화 <매국노>에 이어 <동경 4번지>로 최고의 인기를 끌었던 작가였다.

1주일에 한 번씩 <동경 4번지>가 나올 때마다 책 뒷면에는 주인공 혁을 그린 독자 투고 입상자의 작품이 실렸다. 그림 재주 있는 꼬마 지망생들은 투고했다. 독자 투고에서 1등을 하기 위한 경쟁이 치열했다.

한 배 돌리기 전에 화백에게 그림을 청한다. 어린 시절에 만약 그의 그림을 내가 가지고 있었다면 반 친구들에게 얼마나 부러움을 샀을 것인가. 젊은 만화가는 이제 칠순 노인이 되어 긴장을 한다.

"이제 잘 안 돼. 눈이 안보이고 손에 힘도 안 들어가서…."
그러면서도 옛 시절 어린 소년의 부탁에 추억의 주인공을 다시 살려낸다.

60년대 소년들의 얼을 빼던 '혁 형사'이다.
60년대 소년들의 얼을 빼던 '혁 형사'이다. ⓒ 황종원
나는 상장을 받는 소년처럼 그림을 받아 든다. 1960년대 만화책에는 독자의 투고 만화가 실렸다. 만화가를 꿈꾸는 아이들은 열심히 만화의 주인공을 그려 보냈다. 1등 2등 3등…. 상품은 파일롯 만년필이었다. 어떤 아이는 만화가의 문화생이 되어 나중에 이름난 만화가 된다. 누구는 대학 교수가 되고 누구는 방송국 MC가 된다.

"자, 우리에게 꿈을 주셨던 손우성 선생님에게 건배를 합시다."
"위하여~!"

열흘 전에 식중독으로 혼이 나서 속이 아직 편치 않고, 당뇨로 고생하며 온몸이 종합병원이라고 탄식하면서도 손 화백은 어린(!) 독자들이 권하는 술잔을 받는다. 만화의 주인공을 그려서 보내고 보내도 단 한 번 뽑히지 않았으나 만화를 좋아하여 만화가까지 좋아하는 소년 강석은 아직도 마음은 소년이다.

다른 소년 하나는 손 화백의 만화 역사를 줄줄이 꿰고 있다. 뿐이랴. 만화책 뒤에 실렸던 어린 독자들의 그림과 이름까지 어제 일처럼 말하니. "나는 내 이름도 기억이 안 나는데 대단하네." 손 화백의 칭찬까지 받는다.

아이들의 가질 수 있는 취미는 만화와 영화였다. 영화관은 잘 갈 수 없지만, 만화가게는 마음대로 갈 수 있었다. 나는 만화가게 주인의 아들이었다. 인기 있는 만화가 있고 없는 만화가 있다. 나는 남보다 제일 먼저 만화를 보았고 내가 마음에 드는 아이에게 먼저 보여줄 대단한 권리도 있었다.

만화가게에는 구색을 갖추기 위하여 이 만화 저 만화를 진열해야 한다. 아이들이 불티나게 찾는 만화라고 그 만화만 놓아 둘 수는 없는 노릇이다. 만화는 나오는 날 다음날만 돼도 약발이 떨어졌다. 마치 영화가 개봉관에서 동시 상영관으로 옮겨가는 짝이다.

소년들이 이제는 귀밑 머리가 하얗게 되었다. 추억의 건재를 '위하여'
소년들이 이제는 귀밑 머리가 하얗게 되었다. 추억의 건재를 '위하여' ⓒ 황종원
만화가게집 아들은 아이들이 만화를 서로 돌려 보지 않도록 경계할 책임이 있다. 당장 수입에 지장이 있기 때문이다. 만화 가게 아들은 늘 만화를 끼고 살고, 만화를 돈 내고 빌려 볼 필요가 없다. 그때는 만화 가게 안에서만 만화를 보았지. 집에까지 가지고 가지 않던 때였다.

어린 소년들이 독자 투고라 하여 이 그림을 베껴서 만화가가 사는 신촌에 보냈다. 그 틈에 소년 강석이 있었다. 하지만 소년의 그림은 뽑히지 않았다. 한 동네 사는 소년이 그린 그림은 자주 등수에 올라서 뽑혔다. 그 소년의 이름을 소년 강석은 아직도 기억한다. 손 화백의 만화 주인공을 그린 인연만으로 강석은 마치 학창 시절 선생님을 모시듯이 한다. 소년 강석에게 화답하기 위하여 손 화백은 만화 주인공을 미리 그려 가지고 왔다.

손 화백의 문하생을 꿈꾸었던 소년 황재는 훗날 무협 만화에서 일가를 이룬다. 이제 그도 환갑을 바라보는 나이가 되었다.

"저는 춘천 살아요."
황재는 어린 날 마음의 황제였던 손 화백을 뵈러 서울 인사동에 이렇게 왔다. 이제 목사가 된 소년과 이제 대학교수가 된 소년과 이제 음식물 쓰레기 처리기를 파는 회사의 부사장과 이제 방송국 MC가 된 소년들은 귀밑머리가 하얗건만 마음은 소년이 되어 요즘 세상을 다 잊고 60년대로 떠난다. 춥고 배고픈 이야기는 잊고 만화 속에 꿈꾸던 동심을 이야기한다.

서로 행복하다. 늙은 화백은 독자의 사랑과 존경에, 늙어 가는 독자들은 다시 돌아온 어린 날의 추억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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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산성본부 iso 심사원으로 오마이뉴스 창간 시 부터 글을 써왔다. 모아진 글로 "어머니,제가 당신을 죽였습니다."라는 수필집을 냈고, 혼불 최명희 찾기로 시간 여행을 떠난 글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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