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오마이뉴스의 모토는 '모든 시민은 기자다'입니다. 시민 개인의 일상을 소재로 한 '사는 이야기'도 뉴스로 싣고 있습니다. 당신의 살아가는 이야기가 오마이뉴스에 오면 뉴스가 됩니다. 당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좁은 베란다에 약간의 야채와 꽃을 심어놓고 호들갑을 떨고 있는 내게 드디어 어엿한 '밭'이 생겼다. 가로 4m, 세로 5m의 조그만 땅덩어리다. 흙은 거무튀튀한 게 기름지게 생겼다. 기름질 수밖에 없다. 전문가가 잘 관리를 하고 있으니까. 물론 땅임자도 내가 아니다. 단지 내년 3월까지 내가 쓸 수 있게 허락되었을 뿐이다.

ⓒ 장영미
주말농장? 아니다. 하지만 일주일에 한번 정도 가니까 그렇게 부를 수도 있겠다. 명확히 말하면, 근처 대학에서 마련한 '시민을 위한 공개강좌'다. 꽃과 야채 기르는 것을 전문가가 가르쳐주는 거다. 그러나 소문에 의하면, 선생님들이 일을 다 해준단다. 덕분에 힘도 안 들고, 그런데도 나중에 싱싱한 야채를 잔뜩 수확할 수 있다는데, 문제는 그 결과 아무것도 혼자서는 할 수 없다는 것이다.

이 강좌에 대해 관심을 갖게 된 건 벌써 2년 전이다. 그 해 (2004년) 봄학기에 등록을 하려 했지만 둘째아이를 갖는 바람에 포기했었다. 그 사이 폐강될 것이라는 소문이 들렸고 나와는 인연이 없으려니 했는데, 올해가 마지막 강좌라는 얘기가 들렸다. 이 강좌를 맡으신 교수님이 올해를 마지막으로 정년퇴직을 하시면서 폐강한단다. 아직 2살도 안된 꼬맹이를 데리고 밭일을 다녀야 하는 게 큰 부담이었지만, 마지막 기회를 놓칠 수 없어서 등록을 했다.

ⓒ 장영미
수강료는 7200엔. 5월 12일부터 7월 7일까지 매주 금요일에 대학 소유의 '자연농원'에서 수업을 한다. 강좌는 7월 7일에 끝나지만 내년 3월까지는 밭을 그대로 쓸 수가 있다. 올해 수강자는 나를 포함해 10명. 대부분 전부터 이 강좌에 참가했던 연세가 지긋하신 어르신들이고, 우리 아이와 같은 또래의 아이를 둔 젊은 엄마가 나까지 3명(우리 꼬맹이의 친구들이다), 그리고 아주 어려 보이는 젊은 총각이 한 명이다.

오이, 수박, 단호박, 스위트콘, 강낭콩 (일본에선 '잉겐'이라 하여 콩이 여물기 전에 껍찔째 먹는다), 금잔화는 공동재배 하고, 위에서 말한 작은 땅덩어리를 각각 분양받아서 각자 심고 싶은 것들을 자유재배 할 수 있다. 자유재배할 씨앗이나 모종만 각 개인이 준비하면 도구나 비료 등 모든 것을 무료로 사용할 수 있다.

2006년 5월 19일

미리 계분 등의 비료로 잘 일구어 놓은 밭에 먼저 옥수수, 깨, 애호박, 열무, 시금치 씨앗을 뿌렸다. 이것들의 수확이 끝나면 가을에는 배추, 무, 총각 무, 갓 등을 심어 김장거리를 장만할 생각이다.

이 날은 아이가 차 안에서 잠이 들어 줄곧 자주어서 일하기가 수월했다. 역시 소문대로 선생님 두 분과 줄곧 이 강좌에 참가해온 코미야마씨가 일을 도맡아 해주셨다. 애까지 딸린 데다 아무것도 모르는 철부지 아낙들은 땅 파놓은 곳에 거름을 날라 넣고, 흙 덮는 걸 거드는 게 전부였다. 마지막으로 보온을 위해 짚단을 덮어주는 것으로 씨앗뿌리기 완료.

ⓒ 장영미

2006년 5월 26일

과연 나의 씨앗들이 잘 자랄 것인가. 그러나 근심도 잠시, 일주일 후에 가보니 벌써 새싹이 파릇파릇 돋았다. 열무싹은 너무 촘촘해서 적당히 남기고 뽑아줘야 하는데 이걸 일본말로는 '마비끼(사이 띄우기)'라고 한단다. 애써 심은 것을 뽑자니 왠지 아깝기도 하고 안쓰러워서 손이 더디기만 했다. 뭘 뽑고 뭘 남겨둬야 하는 지 알 수가 있어야지…. 결국 4분의 1도 못 뽑았다.

ⓒ 장영미
그 사이에 벌써 코미야마씨는 남겨진 밭에 이랑을 2개 만들어 놓으셨다. 젊은 야마모토 선생님께 고구마 모종 심는 것을 배워서 몇 그루 심고 있는데 코미야마씨가 보기에 신통치 않았는지 다시 시범을 보이셨다. 따로 부탁을 드린 것도 아닌데 내 밭의 맞은 편에 밭을 일구시는, 연세가 지긋하신 코미야마씨는 알아서 척척 내 밭까지 일구어주신다. 축 늘어져 누워 있는 고구마 모종에 물을 주면서 보니 함께 따라 온 우리집 남매가 물장난에 흙장난까지 신이 나 있었다. 21개월짜리 꼬맹이는 온 몸이 진흙투성이가 되어 물놀이 삼매경에 빠져 있었다. 작업은 여기서 끝. 얼른 아이들을 데리고 철수.
 
ⓒ 장영미
2006년 6월 2일              

다시 일주일 후, 낮잠에서 깨어난 꼬맹이를 데리고 밭에 가보니 애호박에 못보던 망이 쳐져 있었다. 호박은 벌레들기가 쉬워서 모두 이렇게 망을 쳐놓는단다. 일주일 새에 애호박의 싹이 많이 자라서 벌레에 당하기 시작하자 선생님들이 망을 씌워놓으신 모양이었다. 싹이 제법 많이 자랐다. 깨는 아직도 떡잎 상태였고, 시금치는 제법 길쭉하게 올라와 있었고, 열무는 꽤 열무다워졌다. 고구마 모종은 여전히 널브러져 누워 있었다. 내심 걱정이었지만 다른 밭들도 비슷한 걸 보면 제 힘으로 서는 데 시간이 좀 걸리는 모양이겠거니….

지난 주에 끝내지 못한 열무싹 뽑기를 하고 있는데 코미야마씨가 능숙한 솜씨로 애호박에 쳐놓은 망을 열어젖혀 안에 있는 벌레들을 내쫓았다. 그리곤 빈 이랑에 심을 거라며 순무씨앗을 보여주셨다.

지난 주에 작은 해프닝이 있었다. 다른 이랑엔 모두 싹이 났는데 밭 중간의 한 이랑에만 전혀 싹이 나질 않은 것이었다. 뭔가 조금씩 돋긴 했는데 선생님께서 잡초라신다. 씨앗뿌리기를 도맡아 해주셨던 코미야마씨가 무척 난감하셨던 것 같다. 어쩌다가 씨앗도 안 뿌리고 흙을 덮었을까 많이 의아해 하시더니 그게 미안해선지 순무씨를 가져오셨다. 난 별 생각도 못했는데….

ⓒ 장영미
이 날은 이랑 사이의 흙을 파서 잘게 부숴주는 일을 했다. 그 새 땅이 많이 굳어 있었다. 잡초도 나기 시작해서 그것도 뽑았다. 일하는 사이에 조용하다 싶어 보니 우리집 꼬맹이와 꼬맹이 친구는 이 날도 물장난에 빠져 옷을 흠뻑 젖시고 있었다.

2006년 6월 3일

수업날은 아니었지만 전날 다 하지 못한 싹뽑아주기를 해야 할 것 같아 밭에 갔다. 주말이라 밭구경을 하겠다며 가족들이 다 따라나섰다. 인적이 드물어 혼자 갈 수도 없는 곳이다. 전날 코미야마씨가 했던 것처럼 애호박의 망을 걷어 벌레를 쫓고, 열무싹을 뽑아주고, 잡초도 뽑고, 밭에 물도 주고, 더불어 이웃밭에도 물 좀 주고, 가족들 사진도 찍으며 잠시 쉬었다.

ⓒ 장영미
나무 그늘 아래 앉아 시원한 바람에 땀을 식히고 있자니 '평상'이 있으면 싶었다. 원두막이면 더욱 제격이지만…. 평상 위에 둘러앉아 개울에 담가놓았던 수박 한덩이 갈라 먹으면 얼마나 시원할까. 노동 후의 잠깐의 휴식…. 꿈에서 깨라, 얍!

하루가 다르게 쑥쑥 자라나는 생명들. 매일, 매 순간 눈 앞에서 펼쳐지는 '생명현상'은 차라리 경이롭기까지 하다. 전에는 느껴보지 못했던 신선함이다. 특히 싹이 나고, 꽃이 피고, 열매가 맺히는 이즈음은 더욱 그렇다. 힘들게 일하고, 고뇌하는 농군님들께는 매우 죄송하고 염치가 없지만 철없는 풋내기는 마냥 신기하고 즐겁기만 하다.

노랑나비 두 마리가 정답게 팔랑거렸다.
ⓒ 장영미

밭 앞쪽에 있는 폐가. 딸아이는 '도깨비 집'이라 부른다.
ⓒ 장영미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독자의견

이전댓글보기
연도별 콘텐츠 보기